동해에서 아침을 먹고 평택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곡성으로 내려왔다. 설날 영동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해 평상시보다 두배 가량 7시간이 걸렸고 평택에서 내려올 때는 평상시 보다 한가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1984.01.29 정인세 원장
성경말씀은 빌립보서에서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1절서부터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빌립보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협력해 온 것을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훌륭한 사업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 하셔서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내가 갇혀있을 때나 기쁜 소식을 수호 하고 있을 때 나와 은총을 나누고 고생해온 여러분은 모두 항상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와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을 생각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길러서 여러분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되고 또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1절까지 읽었습니다.
우리가 차분한 마음 준비가 되어있고 또 시간이 허락돼 있으면 빌립보서를 한번 다시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까 하는 마음이 근자에 와서 가끔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금 빌립보서를 우선 펴봤는데 이걸 절절이 지금 해석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 첫머리를 이렇게 펴고 보니까 한 말씀 한마디가 다 우리 마음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씀들이 자꾸 이렇게 눈에 뜨입니다. 그래서 그걸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몇 마디만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거기 보면 맨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랬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종, 종이라는 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고 또 그 다음에 보면 은총과 평화를 빈다고 그랬지요?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빈다고 은총과 은총이라는 말도 끝없이 생각을 해도 참 끝없이 우러나오는 아주 은혜가 많은 말씀이거든요. 또 평화라는 말씀도 그렇고 또 아래가보면 감사라든지 기도라든지 우리가 많이 알면서도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고 또 그 은혜가운데서 깊이 생활 체험이 부족한 것 같고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 몇 가지를 이 시간은 생각하려고 그럽니다. 이거 여러 번 이야기 한 것이니까 중복하지 않겠습니다만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서신이라고 이렇게 여러분들도 알고계시고 또 주후 63년경 말년서신 가운데 하나라고 알고계십니다. 그리고 바울사도께서 히브리서까지 치면 14개의 편지를 쓰셨는데 빌립보서와 같이 사랑이 넘치는 참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편지가 드물다고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물론 성경 말씀은 어느 말씀을 우리가 듣고 보고 생각 할 적마다 감동을 주지만 빌립보서에게는 무엇인지 우리 속에 있는 사랑 애정을 이렇게 자꾸 끌어 일으키게 하는 우리 마음가운데 메말랐던 사랑을 소생시켜주는 그런 말씀이 많고 또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얼마나 깊은 믿음과 사랑으로서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 할 때에 오늘 현대의 빌립보 교인들이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바울사도와 빌립보 교인들 사이에 맺어졌던 그런 관계를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맞아졌으면 현대 교회가 모두 또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이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또 빌립보 교회와 바울사도가 인연을 맺었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예수님과의 관계 또 나와 교회와의 관계 그런 것이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이 새삼 납니다. 그런데 하나 더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붙이고 싶은 것은 이 빌립보라는 도성은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이라고 그랬지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데 첫째 도시고 큰 도시고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이 빌립이었지요? 그이도 대왕이었지요. 빌립 대왕이었지요. 그이가 세운 도성이고 아주 사도바울이 거기를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 주후 52년경이지요? 그러나 그 빌립보 성은 주전 387년경에 설립된 도시입니다. 그러면 한 400년 된 참 오래된 도시이지만 그 도시는 옛날이나 그때나 상당히 왕성하고 번창하고 교통의 요충이 되는 동시에 사업이라든지 또 로마 식민지로서 정치적으로든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성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해왔는데 그 가운데 사도바울로 말미암아서 주후 52년에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지요?
처음으로 그 복음이 들어갔을 적 장면부터가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이 되어서 사도바울이 어디 예배 볼 데 없을까 하고 갔다가 개울가에서 루디아를 비롯해서 몇몇 여인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는 장소에 가서 합석을 했지요. 그래가지고 거기 가서 말씀을 전하니까 은혜가 있었어요. 그래서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바울사도를 가자고 억지로 끌어서 그 자주장사하는 루디아 집에서 빌립보 교회는 시작이 되었다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도 웬만한 분들은 다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할 적에 빌립보교회 또 빌립보 교회의 시작 또 거기 처음에 루디아를 비롯해서 모였던 사람들의 그 신앙 대단히 순수하고 참 사랑이 넘치는 것을 우리는 느껴요. 거기다가 이 편지를 쓰면서 바울사도가 한 말씀은 아주 참 그들에 대한 애정 사랑이 넘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의 중심 깊은 곳에 있는 신앙을 고백하고 또 자기가 지금 계획하는 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주 숨김없이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는 점 이런 점들이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먼저 여기 몇 자구에 대한 해석을 해보지요. 거기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난 바울과 디모데는 이렇게 했지요. 그러면 이 감옥 속에는 지금 사도바울이 혼자 계신 것이 아니고 수종을 들고 있는 디모데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사도는 언제든지 자기의 입장을 먼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로 설명을 많이 했지요. 하나는 종, 그 로마서에도 보면 맨 처음에 가서 종이라는 말로 시작을 했지요.
이 종에 대한 것도 여러 번 설명을 드린 것 같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이 이 편지를 씁니다. 이랬는데 여러분들이나 저는 이 시간에 먼저 종, 예수님과 바울사도 관계는 종과 예수님이 주인이고 바울사도는 종이다. 이 관계를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건 사도지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나 바울은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 꼭 사도 종 이 말을 썼는데 이 시간에 종에 대한 것을 잠깐 생각하고 지나가야겠습니다. 그 종에 대한 것은 보통 이렇게, 요새는 종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잘 모르지요. 종 제도가 없으니까 그러나 집에서 머슴처럼 심부름 하는 종과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 번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은 옛날에 로마정치 시대에 노예, 그 노예제도에 노예와 같은 것인데 그 노예보다도 더 강도가 짙은 거지요. ‘둘러스’라는 말을 썼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건 강도가 짙은 것이 되어서 절대로 자유가 없다. 여기 종이라는 말에 그 ‘둘러스’라는 말은 이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주인이 마음대로 하고 오고 가고 잠자고 심지어 처자에 대한 문제까지 일절 요만한 자유도 허락되지 않은 종입니다. 그러니까 그 종은 길거리에 가다가 그 종을 주인이 때려주면 누가 때려주지 말라고 간섭도 못하고 그 종을 팔아도 말도 못하고 종을 죽여도 법률도 죄를 못줍니다. 그 이 종을 죽일 적 에는 그런 종이에요. 여기 종 제도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러지만 로마법은 그때 그랬거든요. 종을 죽여도 그건 죄가 안 되어요. 그러니까 완전, 완전한 소유물이지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개나 돼지나 이런 짐승을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팔고 죽이고 어떻게 하듯이 해도 누가 간섭도 아니 하고 당연시 하듯이 그런 상태의 종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왜 이 말을 애용을 했을까? 아주 이걸 대단이 좋아했거든요. 예수님과 자기와 관계는 그 ‘둘러스’의 관계다. 하는 그걸 어째서 그렇게 강조했느냐? 하는 걸 우리는 생각을 해야 되요. 사실은 이 말씀 한마디만 가지고 이 시간을 지내도 사실은 괜찮은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우리 자신들도 거기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정말 그리스도인 이라고 또 예수님의 제자라고 또 우리들도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을 잘 쓰지요. 특별히 목사나 신부 같은 교역자들은 아주 종이라는 애칭을 잘 씁니다. 그러면 정말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고 또 종이 되려면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거와 같은 그런 종이 되어야지요. 이왕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그런데 우리들은 무엇으로 보던지 그리스도의 종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 사셨으니 우리가 멸망할 것을 구원받은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또 피조물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지 창조 때부터 마지막 구원 얻는 그 시간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에 왔고 지어졌고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구속을 받고 영생을 받게 되니까 또 우리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숨 쉬는 것도 눈 깜짝거리는 것도 밥 먹고 소화를 하는 것도 말 하게 되는 것도 전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된 거지 그 외의 것은 하나도 없거든요. 그 외의 것 우리가 자유로 뭐 되어 진 것 한 가지도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없지요. 있다면 죄짓는 거지요. 우리가 한 것은 죄 짓는 것뿐이고 우리가 생명과 구원에 상관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총이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 진 것이니까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리스도에게 내 자유까지 전부를 드리는 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이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입 끝으로만 종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 맘과 몸을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바치고 그분의 명령대로 살고 숨 쉬고 움직이고 일하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종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는 사실은 이렇게 되기 전에는 완전하게 맺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은 무서운 타락성과 죄악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종과 ‘둘러스’의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는 우리들은 조금도 자유 할 자격도 없고 또 자유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완전한 종이다. 또 이왕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생각하고 지나갑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완전한 종으로 또 사도 바울은 그 아래가 보면 포로라는 말을 쓰셨는데 우리를 포로로 삼으셔서 쓰시면 절대로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잘못 쓰실 리가 있습니까? 예수에게 우리가 전부를 영육 간에 맡기고 주님이 알아서 하시옵소서. 죽이시던지 살리시던지 그저 무엇에다 쓰시던지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그리고 맡긴다면 절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잘못 쓰실 리가 있습니까?
생각을 해보시오. 가장 선하게 가장 완전하게 훌륭하게 우리의 생활을 정리시키실 거예요. 아마 이 땅위에 인간 쳐놓고 예수님에게 맡겨가지고 잘못된 생활을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에게 우리 생활을 우리 생각을 전부 맡긴다면 아마 인간 쳐놓고 가장 높고 훌륭하게 완전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 종이라고 하고 나를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맡긴다는 것같이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종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그런 말이 끝없이, 끝없이 여러 가지고 생각이 떠오르는 거지요. 참 좋다. 바울사도는 어떻게 그렇게 자기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훌륭하게 맺으셨을까? 우리는 언제나 한번 이렇게 되어볼까? 뭐 한마디 더 붙인다면 대개는 마귀의 종노릇들 하지요. 예수님의 종노릇 하는 게 그 종소리가 싫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백 명이면 아흔아홉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사는 것이 아마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 할 것은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보조자들 여기는 일반 교인을 먼저 내세웠지요. 성도들 이라고 그랬지요? 성도들 그 성도들이라는 말이 참 좋은 거거든요. 그전 개역성경을 보면 성도들과 그리고 집사들과 장로 감독들에게 이렇게 아래서 위로 올라갔지요? 사실 그렇지요. 교회라는 게 목사가 먼저 생겼거나 신부가 먼저 생긴 게 아니지요. 교인들이 먼저 생긴 거지요. 교인이 있으니까 목사가 필요한 거지요. 교인이 없는 목사 혼자 있는 교회가 그게 교회입니까? 그러니까는 여기 이 성경의 순서가 옳은지도 몰라요.
참 요새말로 하면 교인들과 이렇게 모두 직분들과 교역자를 맨 나중으로 내세웠어요. 그들에게 편지를 한다. 이러고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이랬는데 제가 은총이라는 말씀을 항상 드려도 제가 깊은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미흡함을 느껴요. 그러면서도 이 은총 혹은 은혜 이 은혜라는 말이 참 우리가 그 말씀 가운데서 항상 생각 하면서 살아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요새 제가 더러 책을 틈틈이 이것저것 읽어봅니다. 그런데 그 조지 워싱턴 카버라는 이의 전기를 요새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참 그 사람 어머니 젖꼭지에서 떨어지면서부터 그렇게 죽는 날 까지 고생가운데서 일생을 삽디다. 그리고도 흑인 지도자로 유명하게 된 이인데 참 대통령까지 그런 이들까지 찾아와서 교제를 맺고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지요. 나중에는 그런데 그이같이 핍박도 많고 억울하고 흑인으로서 당하는 것 외에도 참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는데 한 번도 낙망하거나 비관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다투거나 그런 일이 없이 살았어요. 그거 참 용하 더 라니까요. 그런데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 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참으로 느끼고 사는 사람은 그 책에서 나온 말이에요. 이 말은, 만사에 감사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모든 것이 은혜가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 책에 가장 강조 한 게 하나 있습디다. 은혜가운데 제일 큰 은혜가 핍박 받는 은혜라는 거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래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강도 틈에서 억울하게 죽는 그 은혜에 참예 하는 거 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고 제가 이야기할 결론부터 나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외에 것 은혜가 안 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건 가만히 보면 그 카버 나중에는 박사가 돼서 카버 박사 카버 박사 그랬는데 카버 박사뿐만이 아니라 대개 성인들은 거의가 그랬거든요. 성 프란치스도 그랬지요. 가장 큰 은혜는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거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원하는 기도가 그 거였지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이라는 것은 억울한 죽음을 하는 거지요. 까닭이 없는 벌을 받고 죽는 것이 십자가의 고난도 되지요. 또 사랑의 죽음도 되고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이 되는 거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참 은혜 받은 생활이라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어요. 참 그 말이 좋습디다.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할 때 은혜 아닌 것이 사실은 하나도 없지요. 은혜라는 건 거저 받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내가 누구 일을 해주고 삯을 받는 건 은혜가 안 되지만 내가 받을 까닭이 없는데 누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돈을 준다던지 내게 자꾸 무엇을 베풀어 준다면 그걸 은혜라고 그러지요. 거저 받는 것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사도바울도 그랬지요. 너희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라고 우리가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우리가 생각 하는 거나 먹는 거나 뭐 한 가지도 거저 받지 않은 것이 없거든요. 그렇지요? 여러분이 뭐 자기가 잘나서 받을 자격이 있어서 자기 힘으로 자기 공로로 아마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내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내가 쌀을 먹지 않냐? 여기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몇 없지만 어찌되었던지 그런다고 합시다. 그런다고 해도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땅을 주시지 아니하고 물을 주시지 아니하였으면 농사가 아니라 별것을 다해도 자기가 먹을 수 없는 건 다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하면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전부 하나님께로 받은 거야. 그런데 우리가 그 긴 걸 많은 것을 설명할게 아니라 가장 큰 걸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한 거와 같이 그리스도와 나와 관계를 종의 관계로 이렇게 주종 관계로 이렇게 절대적인 종의 관계로 그렇게 맺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없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거저 받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 받을 자격이 없지 않아요? 그런 예수님을 나에게 뿐 아니라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예수님을 거저 하나님이 주신 것이거든요. 또 전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떡으로 또 제물의 양으로서 오셔서 희생제물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없거든요. 그런데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참으로 그 은혜에 대해서 정말 감격하고 참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만일 그렇게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무슨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몸에 병이 나거나 약간 고생을 당한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할 그런 엄두도 내지를 못할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원체 둔해서 그렇지만 이제 와서 나이를 먹고 내일 모레가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까 이 조금 알아져요. 아 참 내가 예수 믿은 것 같이 고마운 것은 없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키신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구나 하는 것이 이제 와서 조금 깨닫게 돼요.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완전히 깨달아진 것 같지 않아요. 정말 내가 완전히 그리스도가 내게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라고 은총의 결과라고 이렇게 깨달아지면 내 생활이 훨씬 더 아주 명랑하고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고 더 좀 희생적이고 더 좀 그 이기적인 부분이 아주 그림자도 없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 갈릴리 지방 그 지도를 보면 저 북쪽에 가서 갈릴리 바다라는 것이 있지요? 이것도 여러분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걸 바다라고 그러지만 호수지요. 그런데 그 물은 위에서 헬몬 산에서 물이 흘러들어 와서 갈릴리 바다로 들어와 가지고 요단강을 통해서 사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요. 계속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흘러들어가고 흘러 나가고 그래 갈릴리 바다는 아주 경치도 좋고 맑고 고기가 많고 참 무엇으로 보던지 풍성한 바다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 바다가 요단강 물 줄거리를 타고 들어가서 끝머리에 가서 사해 바다라는데 들어갑니다. 그것도 바다가 아니지요 호수지요. 호수인데 그 사해바다로 들어가면 이상하게 사해 바다라는 데는 바다인데 바다니까 그렇지만 아주 깊은 데가 있어가지고 영 흘러나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밤낮 그 물이 흘러 들어가기만 하지 나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증발은 되지요. 햇빛에 증발은 되니까 이제 염분이 많아가지고 물이 짜서 물고기도 못살고 푸성귀도 못살고 그러니까는 사해라고 죽음의 바다라고 그러는 곳이지요.
그것들을 많은 설교자들이 예를 듭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자꾸 들어가고 나가고 하니까 그렇게 오만가지 물고기가 있고 주위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고 경치가 좋은데 사해 바다는 자꾸 들어가기만 하고 내놓지 않으니까 그냥 물이 죽은 물이 돼서 동물도 못살고 식물도 살지 못하고 그런 아주 죽음의 바다가 된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이것 참 큰 교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총의 바다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서 살고 그 받은 은혜를 남에게 나눠주고 또 그렇게 은혜로운 생활을 함으로서 내 몸 전체를 영 전체를 바치는 사람은 갈릴리 바다같이 항상 신선하고 항상 생명이 넘친다는 거지요. 그렇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밤낮 은혜를 받기는 많이 받는데 자기 혼자 마음에다 가둬두고 무엇이든지 누구에게서 받을 궁리만 하고 누구를 줄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밤낮 듣기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전도할 줄을 모르고 그저 밤낮 달라, 달라. 그 뭐라고 그러던가? 다오, 다오. 하는 새가 있다고 하더니 밤낮 주시오, 주시오. 하고 받을 궁리만하고 먹을 궁리만하고 자기욕심만 채우고 이기주의만하면 사해 바다같이 인간이 썩어져 버린다는 거야. 인간이 지독한 이기주의가 되고 마음도 좀팽이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돼요. 우리가 그런 걸 많이 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내 자신도 그걸 반성해 봐야하지만 우리 주위에서도 보시오. 항상 누구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기쁨으로 평안하게 잘 삽디다. 그러나 밤낮 받기만 원하는 사람은 보면 밤낮 불만이고 밤낮 불평이고 밤낮 그저 얼굴에는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어요. 이상하지요? 많이 받는 사람이 감사는 더해야 할 텐데 많이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일수록 감사 없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잘 알아요. 이런 단체 안에서도 보면 그것이 아주 잘 보입니다. 남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은혜를 많이 받고 그런 사람일수록 밤낮 불평이고 밤낮 감사가 없습니다. 이거 무서운 거야. 그것이 지옥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자기 영혼의 상태나 생활을 반성해 봐야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그렇다는 것을 지금 말하려고 그래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든지 다 많이 받는데 은혜 안 받는 사람은 없거든요. 숨을 쉬고 있는 자체(끊김)
그렇게 있는 자에게 더 주어서 풍성하게 해준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그 사람에게서 또 넘쳐나가는 겁니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여러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되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여러 생명이 기쁨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으로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런데 그 은혜를 영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받아도 감사 할 줄도 모르고 은혜가 은혜인지도 모르고 또 밤낮 이렇게 무엇이든지 받으려고만 하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받으려고만 하지. 그걸 소화를 하지 못하고 끼여 두기만 하는 사람 그것이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비유지요. 그걸 꼭 많이 받았다. 적게 받았다. 그것이 아니라 받아 가지고 꽁꽁 싸서 묻어두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나중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주 그 셋째 번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비유 보십시오. 얼마나 인간이 참 변명이나 하고 아주 옹졸하고 주인에게 아양을 떨고 아첨을 하고 주인께서는 이러이러한 분인 줄 압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주인의 돈을 손해를 보일까 해서 이렇게 아주 보자기에다 싸서 땅에다가 깊이 묻어두었습니다. 하고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하는 태도가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수두룩하거든 예수를 믿는 물론 입으로만 떠드는 교인들도 있지요. 마음으로가 아니라, 그러나 어떻든지 이 은혜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하고요. 하나님 외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첫째 알아야하고 둘째로는 그 은혜는 깨닫는 사람에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암만 은혜를 받아도 고마운 걸 모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은 또 그 은혜를 나누어 줄줄 알아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또 넘치는 거지요. 은혜가 넘치는 거지요. 은혜를 누구에게 이렇게 증거하고 소개하고 그럴수록 그건 말로만이 아니지요. 말로만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그 생활로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가지고 은혜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예수라고 그랬습니다. 생명이지요. 복음이지요.
그 은혜를 받아가지고 또 은혜를 항상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사람 그 준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은혜를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남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줄 수가 있는데 나누어 준다는 것은 내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운데 제일 큰 은혜가 예수라고 그랬지요? 예수님을 똘똘 뭉쳐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줄여서 이야기해봅시다. 사랑 한가지로 이야기 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이신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를 위해서 사랑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은총을 우리가 가장 많이 받은 게 신자들입니다. 그래 그걸 깨달았지요? 그렇다면 요한1서 4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니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기회에 아끼지 않고 참 이렇게 수고라 던지 뭐 물질이라 던지 정신이라 던지 모든 걸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을 몽땅 예수님처럼 바칠 수 있는 그것이 이제 주는 거예요. 그것이 내가 받은 은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자세고 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계속적으로 주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내 생명을 계속적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만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에게 은혜를 나누어 줄줄 모르고 밤낮 받아먹을 궁리만 하고 누가 나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사해 바다와 같이 인간이 썩어진다니까요. 아주 냄새가나고 좁아지고 추한 인간이 보기 싫은 인간이 되요. 자기는 보기 싫은 줄도 모를 겁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본인도 없는데 해야 하는가 몰라도 요새 심각한 체험을 하나 하고 있어요. 아마 이것은 한번은 여러분들도 아셔야 좋을 것 같아요. 여기 저 자는 방 뒤에 묘 등이 있지요? 이 묘 등 여러 개 있는 가운데 하나 임자가 지금 교육실이 있는 땅 백 평을 우리에게 기부했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그이가 거기다가 이 선생님이나 오 장로님이나 저 보고 여기 와서 막치고 살라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 끌려 들어왔어요.
처음에 그런데 그이 아들이 셋인 거 같아요. 잘 몰라요, 그런데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여기를 들어 다녔지요. 그 묘 등 임자가 아주 참 열렬한 신자입니다. 부산에 가서 북을 치고 노방전도를 하고 그러면 그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따라다니면서 노방전도를 하고 그러던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뒤에 신학대학을 들어가서 대학원을 마쳤나 어찌되었던지 아주 일류대학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졸업을 했다고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되나 그랬더니 목사가 안 되고 신문사로 들어갔다고 그럽디다. 참 이상하다. 그랬어요. 이제 그 다음에는 장가를 갔다고 그럽디다. 그런데 여자대학교 교수하고 혼인을 했어요. 세상 적으로 봐서 양쪽이 다 일류대학을 최고학부를 마치고 또 부인도 그렇고 그러니까 아 저 사람은 계속 예수를 믿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얼마동안 소식이 딱 끊어졌어. 그런데 중간에 조금씩, 조금씩 듣기는 했지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여기를 왔어요. 그 사람이 왔는데 어떤 꼴로 하고 왔는가 하니 두 눈이 한눈은 아주 멀어버리고 못보고 한눈은 희미해서 제 얼굴을 보고 선생님 옛날 모습만 생각이 나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희미해졌어. 이거 아주 멀어지기 전에 레이저 광선 치료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그리고 당뇨병이 한 20년 됐답디다. 20년 되고 그리고 또 폐가 나빠지고 그러고 다리가 그 당뇨병이 심하면 다리까지 그렇게 된답디다. 내가 이번에 의과대학 학장을 만났더니 그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수도 있다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아마 틀림없는 말인 것 같아. 그런데 다리를 처음에 요만큼 잘랐다가 그래도 또 안 되니까 요만큼 잘랐다가 세 번 수술을 해서 아주 여기가지 보니까 여기가지 없어졌습디다. 그래가지고 고무다리 그래라지고 왔더라니까요. 와가지고 저 동광원에 살라고 왔습니다. 제가 젊어서 들어왔더라면 좋을 걸 제가 그때 끌었어요. 청년 때 신학교 졸업하고 동광원에 와서 목사노릇하지 그 말도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때 들어왔더라면 좋은걸 그동안에 묵을 동안에 제게는 이야기 안 해요.
그런데 남반에서 거기 사람들에게 밤 11시가 되도록 자기 죄 지은 것을 전부 내놓더랍니다. 자기가 얼마나 방탕하고 여자에게 술에 그냥 그 신학교 졸업한 이가 그렇게 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벌을 내리기 시작을 하니까 아주 소나기같이 내리더래요. 은혜도 내려 쌓인다고 그러는데 그래가지고 앞이 못 보게 되고 다리를 잘라버리게 되고 폐가 썩어져 들어가고 뭐 그러니까 좀 그래도 이상하게 생명이 붙어있었거든요. 그래가지고 여기까지 와졌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가 이 시간에 다 할 수 없지요. 그래가지고 와서는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그래도 요상하게 예수님은 붙들고 있습디다. 원만 하면 나는 자살을 하고 비관하고 어떻게 해 버릴 줄 알았더니 그래 지금은요, 그 사람 앉아있으면요. 푸 이러고 앉아있어요. 그래 뭐하고 있냐고 하면 기도한다고 그럽디다. 기도 이제 아주 예수님 놓치면 큰일 났다. 아주 그 생각이 난다는 거야. 그래 예수님 놓치고 나면 예수님 놓치고 나면 뭐예요? 육은 망했으니까 그런데 자기가 육을 너무 믿었다는 거야. 아주 인물도 잘났습니다. 미남자지요. 그리고 건장하고 그러니까 그런데 또 거기에 대해 보충을 해야겠어. 이야기가 옆길로 나가지만 그 부인한테서 며칠 전에 편지가 왔습디다. 그 사람은 편지를 못 읽으니까 제가 다 봤지요. 편지를 자디잔 글씨로 여덟 장을 썼습디다. 이혼한 부인이야. 부인도 내버리고 가버렸어요. 술 먹지 말고 방탕하지 말라고 그래도 듣지를 않으니까 아주 그냥 이 남자는 놔둬야겠다. 그런데 그뿐 아닙디다. 그 편지를 보니까 당신이 그때 얼마나 나를 가라고 쫓았냐고 그냥 나하고 혼인할 여자가 수두룩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좀 떠나달라고 이래서 보내버렸어요. 그 대학교수나 되고 가만히 보니까 여자도 상당한 여자인 것 같습디다. 무엇으로 보던지 그렇게 쫓지 않았냐고 핑계가 써 있더라니까요. 그래서 알았지요. 그 내용을 그렇게 했는데 그 편지 가운데도 그 말이 있고 마지막에 가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니 본인 말도 그렇고 자기도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여기다가 몰아넣어서 내 생명을 건지려고 하신다는 그걸 깨달았다는 거야. 아 내 생명 하나를 이렇게 아끼셔서 눈도 멀게 하고 다리도 하나 없게 하고 폐도 썩어지게 그냥 인간으로 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내게다가 이렇게 몰아 넣으셔가지고 나로 하여금 영혼이 구원 얻게 하시는 그걸 하나 깨달았다는 거야.
이제 와서 그런데 그 부인 편지도 그렇더라니까요. 나하고 당신하고는 벌써 몇 해 전에 이혼을 했으니 상관없는 사람이오. 그러나 그렇게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안달을 하고 당신을 붙들려고 애를 써도 안 듣더니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시군요. 당신의 육신을 전부 폐하고 기어이 당신이 회개하고 여기서 아마 여기 와서 편지를 했나 봅디다. 그 동안에 기어이 이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그러니 참 감사합니다. 아 그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니야. 아무리 이혼을 했더라도 자식을 낳고 살던 여자인데 아이하나 데리고 대구 어떤 대학에 가서 강사 노릇을 하고 있나 보더라고요. 부인은 인제 그런 편지야. 그것을 볼 때 남는 게 뭐요? 예수 하나밖에 안남아 가만 보니까 저 쪽에서도 그걸 아주 절실히 느낀 편지야. 편지를 보니까 아참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지 그렇게까지 해가지고도 기어이 그 영혼을 건지시려고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지 그렇게까지 해가지고 기어이 그 영혼을 건지시려고 다리도 잘라버리시고 눈도 멀게 하시고 이걸 왜 이 이야기 하는 줄 아시오? 우리도 말 안 들으면 그렇게 된다니까요. 까불고 끝끝내 고집을 부리고 말 안 듣고 그러면 눈도 멀게 하고 팔도 끊어버리시고 다리도 잘라버리시고 아 그런 사람 나 여럿 봤거든요. 이번에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기어이 그 가운데다 예수님 하나만 남기셔. 왜냐하면 예수님 하나가 가장 큰 보배고 최고의 은총이거든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두 다리가 성하고 두 팔이 성하고 몸둥어리가 건강하니까 아직도 예수 외에 다른 것을 많이 붙들고 있거든, 이것이 병이거든. 이것이 병입디다.
그런데 제가 아까 그 카버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만 카버 박사는 현명하더라니까 어려서부터 굉장하게 물질적 유혹 아주 그 사람이 머리가 비상합디다. 재주가, 흑인인데 흑인이라고 대학에서 교수도로 안 쓰려고 그러고 박대를 하고 그러지만 원체 재주가 좋으니까 쓰고 그래. 그리고 나중에는 그이가 자꾸 연구를 해서 굉장하게 혜택을 주니까 그 에디슨 무슨 에디슨회가 있지요. 또 미국에 큰 재벌들에서 한 달에 그냥 뭐 얼마씩 줄 테니까 오너라. 얼마씩 줄 테니 오너라. 하고 굉장하게 돈을 많이 줘도 전부 거절 하더라니까요. 전부 거절해. 그래가지고 그때 그이가 처음에 대학교 교수로 카버 박사가 들어갈 적에 29불 받았대요. 그것이 얼마인지는 나중 생각할 필요도 없어. 29불 받았는데 나중에 그이가 밀리고, 밀리고 밀려서 대학학장까지 되었지요. 들어가 학장까지 되고 굉장한데 그때 까지도 그 학교에서 월급을 올려 주려고 올려주려고 수없이 해도 절대로 안올려요. 혼인도 안하고 혼자 살다가 죽었어요. 카버 박사는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하냐? 그러고 그이가 그 강냉이를 땅콩 그래 땅콩박사라고도 그래 그 땅콩을 연구했는데 땅콩으로 만든 요리, 자기 손으로 이제 학생들하고 농사를 지어가지고 땅콩으로 만든 음식으로다 빵도 만들고 버터도 만들고 별거를 다 만듭디다. 땅콩을 가지고 그이가 음식만 만든 게 127가지를 만들었다고 그러니까 땅콩을 가지고 그리고 약품을 만든 게 200가지야. 그걸 했는데 그것가지고 혼자 생활을 해. 그러면서 나는 월급도 소용없다고 월급도 꼭 현금으로 받지를 않고 수표로 받았다니까요. 수표로 받아서 인제 그 회계가 학교 회계가 월급을 주면 아무데나 놔뒀다가 책상에도 놔뒀다가 서랍에다 넣어뒀다가 책속에 꽃아 놨다가 학생들이든지 친구 간에 돈 좀 빌리라고 그러면 아무소리 안하고 줘버려. 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더라니까요. 그러면서 일생을 살아요. 그 명예도 박사도 뭐니 자꾸 가져다 뒤집어 씌워줬지. 뭐 별 데서 다 해서 뭘 해? 그이가 마지막까지 언제까지 항상 하는 소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거였거든요. 그래서 어떤 큰 공장에서 유명한 가령 이야기가 끝없이 길어집니다만 이제 그 땅콩 농사를 장사를 해서 미국 남부에 지금 땅콩 재배가 굉장하답디다. 그래가지고 수백 억 톤 씩 나온대요. 땅콩 생산이 그 카버 박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어떤 공장에서 땅콩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땅콩이 다 썩게 생겼어. 병이 들어서 그러니까 깜짝 놀라서 사장이 카버 박사에게 샘플 견본을 조금 보내가지고 이거 무슨 병인가 알아달라고 그러니까 며칠 연구해서 단박 병명을 지적해가지고 고쳐줬어.
그러니 그 회사로서는 큰 은혜 아니요? 그렇게 되서 이제 거기서 막 사장이 돈을 가져와서 모셔가려고 하고 돈을 드리니까 하나님이 내게 그런 지혜를 주셔서 했고 또 당신들은 그것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유익하게 쓰면 되고 그러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돈을 가지고 선사품을 가지고 고맙다고 왔다 갔다 하느냐? 감사할 것 있으면 하나님께 하라고 자기가 요만큼도 거기 개입을 안 하드라니까요. 뭐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칭찬도 아주 칭찬도 그 사람은 안 들으려고 해 그것이 원 신앙이야. 그래 원 은혜는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점점 더 풍성해 지더라니까 명예도 더 풍성해지고 물질도 그냥 피해 다니고 도망을 다니고 그래도 물질이 따라와, 그럴 것 아니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큰 이익들이 생기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깨끗하게 자기가 쓰지를 않아요. 돈도 쓰지 않고 물건도 쓰지 않고 이것이 정말 은혜 받은 사람의 생활이야. 그 다음은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사실은 어떤 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생활이냐? 또 어떤 것이 정말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냐? 그 사람의 이건 딱 아주 정해져있어.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모든 것을 지혜도 주시고 총명도 주시고 모두 이렇게 다 주셨으니 그것 남에게 그냥 주는 건데 뭘 내가 칭찬들을 것이 어디 있고 삯 받을 것이 어디 있냐는 거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게 그 사람의 인생 모토였던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살아요. 그런 사람은 풍성해져 갈릴리 바다가 자꾸 물을 받아들이고 흘러내리니까 자꾸 그렇게 유명한 오늘까지도 세계적으로 참 아름다운 호수로 이름이 나듯이 그렇게 되는 거야. 인간도 그렇게 되요.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받아. 자꾸 은혜를 받고 은혜를 자꾸 깨닫고 일생동안 그렇게 살면 점점 더 풍성해 지고 생명이 풍성해지고 은혜가 풍성해지고 그리고 또 그걸 자꾸 주는 거야. 흘려버리는 거야. 자꾸 흘려 그놈을 사해바다 모양으로 꽉 가둬놓지 말고 그냥 욕심만 부리지 말고 자꾸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야. 그리고 또 그것을 내게서 쓰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마련하신거야.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보면 전부 그렇게 되어있어요. 달란트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나 교훈을 보면 있는 자에게는 더 주어서 풍성하게 되는 거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도 빼앗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그렇게 살도록 마련을 하셨어.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조금 생각 할 적에 이렇게 몇 가지 생각을 해. 은혜의 기원은 하나님이야. 하나님 외에는 우리에게 줄 수 있다면 나쁜 것이나 주지 좋은 것 못줘. 정말로 선하고 착하고 지극 한건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쪽으로만 신앙을 그 다음에 우리가 믿음에 대한 할 시간이 없지만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 쪽으로 내 영혼의 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 받기 시작을 하면 무한하게 주실 수 있는 것 나는 카버 박사 전을 읽어보고 사람의 머리빡은 발달을 하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구나. 그 사람은 뭐든지 잘해 뭐든지 음악을 갖다 대면 음악을 잘해서 연주회를 하게 되고 그림을 한번만 보게 되면 그림을 잘 그려서 전시회를 하게 되고 아 그냥 뭐든지 잘해 길거리에 가다가 푸성귀 하나를 보면 그걸 가지고 들어가서 현미경에 놓고 며칠만 연구하면 그 병명 알아내고 병 그저 풀에 대한 병까지 죄 알아내고 그걸 이 풀을 어떻게 이용을 하면 우리에게 어떻게 좋다는 걸 아주 희한하게 뚫어버린다고, 그러니까 참 만물박사야. 원은 농학박사지만 말이야. 그렇게 하는 거야. 그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해요. 우리가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쳐서 선하게 쓰면 무한히 할 수 있고 그걸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그걸 유 영모 선생님이나 이 선생님도 그런 인줄 알아요. 이 공 어른도 그런 이로 보고 어디서 그렇게 많은 지혜가 나고 그 양반들 아는 거 여러분 몇 푼어치 모를 거야. 저는 다 모르지만 또 우리 저 일본만 하더라도 우찌무라 간조라는 이라든지 또 가가와 도요코 라든지 전부 그런 말을 했어요. 성신 받으면 총명이 무한해진다는 거야.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같이 총명해 진다고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원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드셨거든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들이 요 꼬락서니같이 살아요. 구대기 같이 벌레같이 짐승같이 살다가 죽으라고 만드셨어요. 그럴 리가 없거든. 왜 그러냐?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또 은혜를 활용을 못해. 내가 받은 은혜를 쓰지를 않아요. 그리고 맨 그저 다오, 다오, 다오. 그냥 먹을 궁리만하고 욕심만 부리고 자기 살집만 구하고 자기 정욕이나 만족시키려고 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요렇게 병신이 된 거 아이야. 그렇지 않아요. 그거 알아야 해요. 우리 지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인간이 은혜를 떠나서 살기 때문에 이렇게 병신들이 되고 무능력자들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조그만 것 하나만 부닥쳐도 그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는 이런 병신들이 된 거야.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 이라면 하나님 답 게 뭐 사는 게 있지 않소?
그러니까 성경에도 있지 않아요? 너희가 하나님처럼 살아야한다. 하나님을 닮아야한다. 에베소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닮아야한다. 또 예수님을 닮아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있는 것 아니요? 이것이 은혜아래 사는 사람의 상태이다. 그것이 그러니까 여기 지금 바울사도의 빌립보 사건 뿐 아니라 꼭 이 성경에 보면요. 전부 편지는 그렇게 되어있지요. 에베소서에도 그렇고 골로새서에도 믿는 교우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그때 히브리 사람들이 편지 쓰는 습관이 되지만 바울사도는 이 말을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이야. 그 아래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도 보면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을 지어다. 데살로니까 후서에 가 봐도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빕니다. 전부 은총과 평화를 빌었어요. 디모데전서에도 예수께서 자비와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 그대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믿음도 은총이라고 그랬지요. 사랑도 은총이라고 그랬지요. 소망도 은총이야. 우리가 믿음으로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건 에베소서 2장 8 절에 있지요. 또 사랑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모든 것이 은혜야.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을 넓이고 하나님께서 무한히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풍성하게 마련해주신 그 은혜를 받고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둘째 번으로 생각할 문제야. 그 다음 문제는 아마 시간이 없어서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찬송 부르시지요. 405장 찬송 부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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