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우수 지나고 : 부활하신 예수

mamuli0 2020. 2. 21. 08:29

 우수 무렵 꽃샘 추위가 지나고 날씨가 게었다. 산지을 두고 농장을 담았다. 수섢화가 꽃망울이 맻히고 돋아나고 있어 잡초를 제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2007.08.19. 방순녀 총무


 이 시간에는 장로님 원장님께서 광주로 가셨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에서부터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의 행동.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로 만나러 가야되는가 생각하면서 같이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바로 그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최근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그 이야기를 하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함께 걸어가셨다. 그들은 예수를 보고도 어떻게 된 셈인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대체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들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띤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사람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나서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모르는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그래도 예수께서는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지요.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일과 말씀에 있어서 큰 능력을 나타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관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원에게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우리는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 난지가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들 중 몇 여자 몇 사람이 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그들에게 일러주었다는 말까지 그들이 돌아와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더니 그 여자들의 말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어리석기도 합니다. 예언자 들이 말한 그 모든 것을 믿기가 그다지도 어렵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겪어야 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로부터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 나타나시기 전에 예수가 이미 같이 계셨지만 예수를 본 일이 없다고 그랬지요? 그분을 우리 곁에도 이 시간 예수께서 같이 계시지만 우리 심령이 어둡고 나 자신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 제자들에게 이미 나타나셨지만 예수를 몰랐지요? 우리는 우리도 예수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부활해야 예수를 만날 텐데 우리의 삶이 어떤 때에 예수를 만날 수 있을런가? 예수를 내가 살아생전에 예수를 만나야 할 텐데 우리의 태도, 내 마음의 태도가 어떤 때에 만날 수 있을런가?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겪어야 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목적하고 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예수를 붙잡으며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이제 하루해도 다 지나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묶으시려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드시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 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뜨거운 감동을 느끼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시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 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어른들 성경말씀 해석을 들어보면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거, 예수고난을 체험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를 만날 수 없답니다. 예수의 고난을 체험으로 부활이 있고 예수를 보고, 그 떡을 먹는 순간 예수의 고난을 체험하고 그 살을 먹고 그 십자가상을 육신으로는 십자가상의 달리지 않았을 지언 정 예수가 겪으신 십자가에 가게 될 때에 우리 시야에 예수가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뜨거운 감동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고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일과 예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예수께서 떼어주신 빵을 우리가 맛을 보았던가? 예수님의 만찬에 참석을 했던가? 그걸 통하지 않고는 예수의 주신 빵을 먹기 전에 예수를  전혀 몰랐어요. 우리가 믿는 해수는 몇 십 년이 되고 몇 년이 인지 우리 시야에 예수님을 뵙지 못 했어요. 그 원인이 여기 있지요. 예수가 떼어주신 빵을 받아먹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주신 고난을 달게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의 마지막 분부. 그들이 아직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그들 시야에  사이에 서시고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안절부절 못하고 있소? 왜 그렇게 의심을 품고 있고 내 손과 발을 보시오. 틀림없이 나요. 자 나를 직접 만져보시오. 유령이 어디 뼈와 살이 있소? 그러나 보다시피 내게는 뼈와 살이 있지 않소? 하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의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으려들지 않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 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여기 뭐 먹을 것이 좀 없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더니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당신들과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내게 관한 일들이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는데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신 다음 말씀하셨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 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 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당신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 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우리는 참 믿고 시작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해수로 말하면 강산도 몇 번이 변하고 산천이 변한시기에 믿고 나왔지만 영안으로 보는 예수기 때문에 육안으로 예수를 뵙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했어요. 부활을 하고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핵심이 부활 아닙니까? 우리는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를 못 만난 것이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조급하니 생각할 필요는 없고 너희는 내가 주는 성령 보혜사를 받을 때까지 어디 있으라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러면 예루살렘에 물론 그 장소도 중요 하겠지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거, 자기 꽤나 자기 지식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는 뜻인 거 같습니다. 다른데 가지 말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성령을 받을 때 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성령을 받지 못했고 거듭나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만날 때 까지 기다리는 그 신앙.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 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전에 말씀 하실 적에 현 동완 선생님이 참 여기 계신분도 뵈 온 분들이 많습니다. 현 동완 선생님이 세계 일주를 열세 번 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세계 일주를 하실 때마다 성현들이 사신 곳 수녀원을 꼭 잊지 않고 찾아가신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수녀원을 찾아가셨는데 아주 어렵게 찾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수녀원은 갔을 때는 어렵게, 어렵게 모르는 데를 안내자 있어 가셨지만 너무 밤이 오래 되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인제 면회를 신청하니까 절대 남자는 신청이 안 된다고 면회를 안 시켜 주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여기까지 수녀님들의 삶을 보려고 왔습니다. 간청을 하니까 늦게야 수녀 한분이 노인 한분이 나왔어요. 원장님인지 누군지 모르지만 나와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 수녀님은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수녀 하는 말이 아직 뵈옵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수십 년을  이 나이 되도록 늙도록 사셨는데 아직 뵈옵지 못했다면 우리가 하늘나라를 어떻게 있다고 증명 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 말씀이 ‘나를 데려가는 그 순간 깜빡하는 그 순간이라도 나를  변화해 주실 것을 믿고 나는 삽니다.’ 이 현 동완 선생님이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어요. 아 그 신앙 내가 현재는 거듭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나를 거듭나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그 신앙, 그 수녀를 다시 한 번 우러러보고 참 너무 깊은 감명을 언젠가는  변화시켜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삽니다. 그 말씀이 너무 감화를 받으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감화를 받고 밤은 오래되었는데 인적도 없고 아주 산속에 찾아갔는데 쉬어야 하는데 쉬지를 못해. 수녀가 절대 용납을 안 해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길을 밤중에 돌아서면서도 그 한 말씀에 힘을 얻어서 돌아왔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참 제 자신을 볼 때도 내가 예수 믿고 사는 것인가? 어떤 때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성질이 나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표현은 안하지만 마음으로 불평이 되고 하는데 너무 한심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거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어디 가서 구하려고도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랬어요. 성령을 받기까지, 우리의 삶은 인내가 참 인내를 요구하시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부활에 대해서 조금 생각이 되어서 예수님만 부활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을 해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데 내가 부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물론 하기 쉬운 말로 내가 죽어야 되고 고쳐야 되고 거듭나야 되는데 그 거듭나는 과정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려고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특별히 당신들은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증인들, 증언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에요. 다니면서 믿으시오. 복음을 받으시오. 이 전도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람 자체가 증거 하는 우리 삶이 아닙니까?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 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성령을 주실 때까지 예수를 볼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어디가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 예수가 계신 곳 거기에 머물러 네 생각대로 네 지혜대로 네 꾀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맡기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그 말씀이 새삼스럽게 보여서 여기를 봤습니다.
 그 예수의 능력을 받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 때에 예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성경을 먼저 찾아보고 싶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무슨 약속을 받았어요? 부활해서 너희를 너희에게 성령 보혜사를 보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보내주신 보혜사를 받을 수 있는 준비기간이 있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우리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저는 빌립보서에 보면 너희가 두렵고 떨림으로 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살라는 것은 항상 공포에 시달리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내 곁에는 현재 내 시야에는 예수님이 안보이지만 예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 그런 것을 느낀다면 우리가 말 한마디도 참 함부로 못하겠지요? 우리가 살면서 많이 느껴진 것은 아닌 습관, 못된 습관은 한 나이라도 어려서 고치지 않으면 나이 먹을수록 고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런 것을 고치자는 것은 두렵고 떨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받기 위한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보혜사를 받을 때까지 조심하고 형식이 들라는지 몰라요. 형식이라도, 조심하고 형제에게 말 한마디 할 때에도 내 이 말이 저 형제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내 함부로 생각 없이 하는 말로 인해서 저에게 가시가 되지 않을까? 이런 걸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성령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로마서 15장 16절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제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지요. 제물 이라는 것이 산채로 바치는 제물은 없지요? 살아서 꿈틀거리는 제물을 바치는 것은 없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바라는 목적이 너희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러면 제물로 바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살아있으나 죽어지내는 것 내가 살아있으나, 오늘 아침에 이 선생님 필담을 조금 읽어보니까 그런 말씀이 있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나는 살아서 죽고 싶습니다. 죽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죽고 싶습니다.’ 내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내 것은 다 죽고 싶다는 그 말씀입니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대제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제물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 제물이 되어야 성령을 받을 수 있고 또 나만 제물이 되는 것인가? 저 형제도 내가 볼 때는 저 형제 아무것도 아니야. 저렇게 살아서 예수 믿을까? 참 너무한다. 왜 저렇게 억울한 말을 할까?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부활을 목적한다면 죽어야 부활하지 않아요?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 우리의 사는 목적이 제물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인데 그 제물 되기까지 우리의 과정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본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 가만히 있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제물 되는 과정 이지요. 제물 되어서 성령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을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복종 시킨 분은 그리스도시고 나는 다만 그분의 일꾼 노릇을 했을 따름 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뭣 좀 하면 내가 드러나고 싶지요? 내가 애썼고 내가 일했고 나는 무엇을 했고 그런데 사도바울 선생은 내가 하는 것 없다고 그랬지 않아요? ‘나는 다만 그분의 일꾼 노릇을 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가 혹시 선한 일을 했다고 내가 좀 착한 일을 했다고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거 그것이 부활할 수 있는 과정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까 본 끝에 요절말씀 우리 한번 다시 읽겠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주겠습니다.’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보혜사 성령이지요.)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러면 이 현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받는 과정을 어떻게 일러 주셨는가? 해서 좀 봤습니다. 너무 이 말씀 보면서 제가 ‘초월의 길’에서 조금 읽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런 말씀을 보면 비웃습니다. 또 바보라고 합니다. 세상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지요. ‘가난을 감사 하나이다. 가난을 감사 하나이다.’ 세상은 지금 부자가 못되어서 아등바등 하는데 이 선생님께서는 가난을 감사 한다고 하셨어요. ‘가난을 감사 하나이다. 가난의 자유여 아 얼마나 가벼운 짐 인고? 헛된 기쁨을 누리지 않게 되는 이 자유로운 시간, 헛된 인사를 주고받지 않는 이 행복, 깊이깊이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치를 들추어볼 수 있는 이 가난함의 복이여, 참말 복 되도다. 천국이 가난한 이의 것이라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이의 입으로 축복하신 가난이여, 영원히 제게서 머물러 물러가지 마사이다. 자나 깨나 가난이시여 저를 앞뒤로 둘러 계시옵나이다. 아버지 자비하신 아버지요. 오래 참으시는 주님이여 참 사랑하시는 성령이시여 온전히 위로의 하나님이로소이다. 주님이 이 땅에 자비로 가뭄을 주시 사, 사람들이 교만치 못하게 해 주소서.’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가뭄을 주어서라도 사람들이 겸손하게 해 주시라고. ‘인심은 바야흐로 험하고 극에 이르렀나이다. 얼마만한 재앙을 받고서야 뉘우침이 오려는지요? 너무나 완악하고 교만 하옵나이다. 너무나 더럽고 추악하옵나이다. 진실한 회개를 불러일으켜 주소서. 정결한 마음이 요구 되나이다. 눈보다 더 깨끗한 마음이 필요하나이다. 맑은 양심을 주소서.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의 눈을 주소서. 음란한 마음을 제거해 주소서. 혈기의 마음을 없애고 주장케 해 주소서.  참을성 없는 마음을 없애 주소서. 주님의 마음만이 저를 주장해 주소서. 정결한 마음을 주소서. 고뇌를 사랑케 해 주옵소서. 가난을 사랑케 해 주소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 되는 일 인 줄 알겠습니다. 영원무궁한 만세전부터 흑암과 광명을 품고 세차게 내려오는 천국이여, 가난한 이의 것이로소이다. 자기의 모든 행복을 주고 바꾼 가난한 이 의 말씀이 천국은 마음 가난한 이의 것이라고 외치신지 어언 이천년, 새벽 별 보다도 뚜렸한 가난함을 체험한 이 누구이시던가요? 그들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먼 하늘의 별들처럼 찬란스럽게 일생을 통해 빛들을 바라고 있지 않는가요? 가난이 지상의 복이라고 몸과 피를 다 주시고 사서 얻으신 이가 실증하신지 오래건만 그 말씀 신용하는 이 몇 몇 분이나 되던가요? 이들마다 가난한자로 소리쳐 외치는 말씀은 가난이 참 복이라고 노래를 부르셨건만 이제도 가난을 환난이라고 믿는 이는 가난이 복이라고 믿는 이의 수효보다 훨씬 더 많은 현상이 아닌가요? 주님은 거짓말 못하시는데 그 사실 믿는다는 성직자들, 말씀 증거하고 삯 받아먹는 분들까지 가난은 재앙으로 오는 것이라 증거들을 하시나이다. 축복받은 이만 아는 이 가난의 복이여, 축복받은 이만 아는 이 가난이여, 그렇지 않다하는 이 없으리로다. 가난은 천국이요. 천국은 가난한 마음의 소유입니다. 가난을 축복 하소서. 못난 저에게 가난만은 축복해 주옵소서. 가난을 싫어하는 이들에게 찾아가는 가난은 학대와 저주를 받습니다. 가난을 간구하는 이에게 오소서. 기리 떠나지 마소서. 잠시 잠깐인들 떠나서야 어떤 일이 생기겠나이까? 가난을 진리를 알고야 몸서리 안 칠 이가 있겠습니까? 잠시만 떠난다. 해도 진리일 수밖에 없지않겠는가요? 서릿발 치는 부함의 노여움이여!’
얼마나 이 세상의 삶과 참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가난이 서릿발 치게 싫은데 이 선생님 말씀은 서릿발 치는 부 라고 하셨어요. 그만치 부 라는 것은 천국과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은 천국의 소유자들이 갖는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서릿발 치는 부의 노여움이여, 견딜 수 없습니다. 가난은 저의 축복으로 오시고 부는 저를 저주하고 떠나소서. 가난해 지라고 저주 하소서. 부하게 저주를 원하고 부한 척 하는 영 되는 거 싫습니다. 좀 더 가난케 하소서. 말도 못하도록 가난케 해 주소서. 병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도록 가난케 해 주소서. 아무에게도 큰소리 못 치도록 가난케 해 주옵소서. 교만을 떨어버리고 겸손한 소망만이라도 갖게 하옵소서. 참 가난해지면 참 지혜도 따라 오겠나이다. 참 가난해지면 참 지혜도 따라 오겠나이다. 참말 좋은 행복이 따라 들겠나이다. 참 부족함이 저를 감싸주겠나이다. 참 하늘의 지식이 제게 머물겠나이다. 가난의 축복이여 병도 가난의 식구일 것입니다. 참말 병은 제 영혼의 좋은 반려자올시다. 심심하지 않게 인생행로를 같이 걸어주는 육신의 병이여, 내 일찍 그대 가치를 알았던들 왜 병을 두려워하겠나이까? 모든 소리로 도무지 모르는 소리로 그대를 노엽게 해드렸나이다. 저주인줄 알았으며 마귀의 사자인줄 알았기에 영접하고 대접할 줄을 몰랐나이다.’ 그러면 병도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인데 우리는 이런 말씀 볼 가치도 없지요. 조금 어디 아프면 그냥 어디가면 나을까? 침을 맞으면 나을까? 주사를 맞으면 나을까? 이 가난의 축복이라고 하셨어요. 이 선생님께서 결핵으로 앓으실 때 참 고기잡수시고  파계지요. 그 선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담을 허물려고 고기를 잡수시고 그다음 오신 곳이 어디냐 하면 제중병원 지금으로 말하면 기독병원입니다. 그 병원으로 찾아 오셨어요. 왜  당신도 약 썼다는걸 광포하기 위해서 나도 고기 먹고 약 썼다. 그럼 동광원이 고기 먹고 약 쓰고 선한일로 천국 갔다는 그것을 허물기 위해서, 그런데 그때 모시고 왔을 때 병원을 가까스로 입원을 차 교수님 오시고 최 목사님 저거해가지고 병원을 입원을 시켜드렸는데 병원에서 그때 한번 도 약을 안 쓰셨으니까 그 지경 되도록, 병원에서 의사들이 진찰을 해보니까  6개월만 여기서 요양을 하면 낫겠습니다.


 


 그 6개월을 안채우고 불과 한 달도 못 계시고 퇴원해 버렸어요. 병원을 고치려고 가신 것이 아니고 당신도 약 썼다는 것을 광포하기 위해서 선전하기 위해서 아 이 선생도 약 쓰고 고기 먹었다. 그 담을 허시기 위해서 가셨기 때문에 병원에서 아주 그 원장님이 사정을 했어요. 6개월만 여기 계시면 병이 낫겠습니다. 절대 그걸 사양 하셨습니다. 이 말씀 보면 우리가 이해가 가지요. 가난도 축복이고 병도 축복이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양 하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병이여 내 일찍 그대 가치를 알았던들 왜 병을 두려워하였겠나이까? 모든 소리로 도무지 모르는 소리로 그대를 노엽게 해드렸나이다. 저주인줄 알았으며 마귀의 사자인줄 알았기에 영접하고 대접할 줄을 몰랐나이다. 모멸도 가난의 식구올시다. 남에게 멸시받고 천대 받는 것도 가난의 식구올시다. 가난하면 모멸이 축복으로 오시나이다. 멸시가 싫어서 우리는 애타던 시기 참말 모멸의 행복을 몰랐었기에 모멸을 피하기 위해 거짓 얌전한 체까지 했었나이다. 거짓으로 부한 체 했습니다. 모멸의 중대함을 알았던들 일부러 모멸 받을 가난하고 무식한 처소에 가 서서 기다렸으련만 전혀 모르는 소리로 모멸이 지나가는 처소는 피해 달아났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칭찬하고 잘한다고 하는 말 듣기는 쉽지만 멸시하고 일은 기껏 했는데 뭐했냐고 당신 해놓은 것이 뭐 있냐고, 그런 소리 듣기 싫어하는 건 그건 사람의 생각입니다. 누구나 갖는 건데, ‘그것이 축복인줄 모르고 피했나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거짓 존귀와 대접받기보다는 차라리 투명한 멸시가 더 귀하나이다. 물질이 가난할 때 덕에 부하겠나이다. 가난에는 자유가 속박을 당합니다. 육체의 자유가 없어지지만 참 양심의 자유가 옵니다. 세상 사물에 가난해지면 믿음이 부해지나이다. 세상에서 가난해지면 천국에서 무한으로 부해지나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 없으리로다. 참말로 이 세상에서 멸시받도록 이 세상 지식과 지혜와 물질과 권세와 존귀와 모든 것에서 완전히 가난해 지도록 축성 하옵소서. 제가 참으로 가난해지고 주님에게서 부를 발견케 하옵소서. 세상에서는 비참하고 천국에서 영광 얻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권리가 없으나 천국을 상속함이 권위자가 되게 복을 주옵소서.’ 이번에 많은 은혜들을 받으신 줄 압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번에 심 목사님께서 목포에 계신 디아코니아 계신 여 성숙 의사 선생님의 회고록을 조금 요지만 따가지고 오셨다고 주고 가셨는데 우리가 이거 다 배부하지 못해서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 성숙 의사 그 분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결핵 환자의 어머니로서 지금은 기독병원 이지만 그때는 제중병원 부원장으로서 결핵환자를 내 자식처럼 돌보고 사랑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 의사께서 우리 동광원을 극진히 생각하시고 이 선생님께서 많은 존경을 하셨어요. 그리고 지금 소화 자매원, 무등원 결핵 환자의 요양을 하게 한 것도 물론 고 호번 원장도 하셨지만 이 어른이 많이 애를 써서 결핵환자들 요양원을 만들고 물질적인 투자는 없었다 할지라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셔서 그 분이 저거 해 놓으신 것을 책 중간에서 다 드리지 못해서 제가 좀 읽어 드리겠습니다.


 


 ‘결핵환자의 어머니같이 치료해주신 여 성숙 선생님의 회고록에서 참된 스승 참된 제자가 되어있다는 것을 적었습니다.’ 이 분이 여기가지 되기까지는 그 말씀 하실 적에 열세 살에 그런데 여기도 나왔지만 옛날에 새롭게 하소서. 에도 나오고 작은 책자가 되어서 제가 본지도 몇 십 년 되는데 열세 살 먹어서 함경북도 분인데 남의 집 민며느리로 보내려고 집에서 했어요. 아버지하고 다른 사람하고 딸을 두고 민며느리로 보내는데 그냥 보내지를 않고 얼마 받기로 하고 딸을 주기로 한 그걸 듣고는 이 분이 그때 결혼을 안 하고 그 집을 출가해 가지고 나와서 어디까지 갔냐하면 일본까지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해서 누가 도와준 것도 아니고 순 당신 스스로 하신거지요. 열세 살에 출가를 해가지고 나와서 일본에 가서 훌륭한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이렇게 되셨다는 회고록입니다.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일본말을 배우지는 못했다. 겨우 일본 가나의 뜻을 (우리말로 하면 기억니은 이요.) 뜻을 잘 모르면서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말은 두서너 말 밖에 하지를 못했다. 졸업하자. 선배 장 선생이 일부러 집에까지 와서 도쿄까지 데리고 가 주었다. (아마 그렇게 가셔가지고 초등학교를 혼자 나왔던가 봐요.) 그때 선배로서 같이 있던 선생님이 도쿄에서 얼마간 말을 배운답시고 해봤지만 잘되지 않아서 차라리 학교로 가서 직접 부닥쳐보자. 하고 장 선생과 함께 목적하고 온 그 학교로 찾아갔다. 도쿄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 걸리는 곳에 있는 군마겐 마에바시 고아이 여학교라는 사립학교인데 교장 선생은 도시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이 학교로 오신 대만 분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신 목사라는 것만 알고 갔다. 주 재식 선생님 이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여름 방학이라 텅 빈 교정이었지만 정돈된 정원에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교무실이라고 간판이 걸린 집만 문이 열려 있었다. 현관 앞에서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약간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반바지에 난방을 입고 나오신다. 학교 소사나 집지키는 관리인쯤 되나보다. 하고 교장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했더니 내가 교장이요. 해서 흠찟 놀랐다.


 


나이는 많지만 공부가 하고 싶어서 찾아왔으니 받아 주십사고 부탁했더니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몇 학년에 들어가기를 원 하냐고 대뜸 물으신다.  2학년이면 좋겠다고 했더니 한마디로 9월 2학기 개학 3일전쯤 오라는 것이다. 물론 같이 간 장 선생이 다 이야기하고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옆에 가만히 서있었다. 서있었기만 했지만 너무 쉬운 허락이어서 좀 벙벙하면서도 규정 과정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 일 듯 참 감격스러웠다. 2학기 개학 3일전에 다시 학교를 찾아갔을 때도 여전히 교정에는 아무도 없고 전에 찾아갔던 그 문만 열려있다. 교장 선생님이 똑 같은 차림으로 나오신다. 한 학기 동안은 아주머니 혼자만 사시는 집에 부탁해 놓았으니 거기가 있으라. 하시며 모퉁이에서 리아카를 끌로 나오더니 짐을 올려놓으란다. 짐을 올려놓으면서 아마 누구에게 시켜 끌어다 주겠지 했더니 자기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우리더러 리어커를 끌고 따라오라며 앞서가신다. 지금 막 택시를 타고 들어온 큰길을 멋쟁이 장 선생과 같이 리어커를 끌고 간다는 것이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지만 창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전거 뒤를 따라갔다. 그 아주머니 집에 들어간 교장 선생님은 무릎을 꿇고 정중히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는 자전거를 세워놓은 데로 나가신다. 아마 저 빈 리아카는 내일 나보고 학교로 끌고 오라고 하시겠지 하며 심난해 하는데 자전거 꽁무니에 리아카를 매달고 끌고 가버리신다. 교장 선생님 체면도 있는데 리아카를 매달고 자전거를 타고 큰길을 가신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교장선생님 하면 목에 힘을 주어 뻣뻣이 세우고 훈 견하는 걸로 인상적이었는데 리아카를 매단 채 자전거를 타고 큰길을 가시다니 잘 납득이 가지 않고 한방 얻어맞은 거 같았다. 이 학교는 메이지 유신 시절에 일본 잘되려면 일본의 어머니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고 일본 크리스챤 동지 몇 사람이 사재를 털어 모아서 세운 여학교였다. 그동안 몇 대의 교장을 거치다가 지금 있는 주 교장은 그의 친구들이 대학 교수로 있는 분을 붙들어 와서 교장으로 앉혀놓은 것이 내가 그 학교로 가기 15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 분은 이 학교에 처음 부임 했을 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고백 한다.


 


 ‘실은 내가 이 학교에 오기 전에 몰래 와서 학교 모양을 살피고 갔기 때문에 이 학교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았고 또 각오도 하고 왔지만 막상 와서 보니 내용이 너무도 빈약한데 놀라고 말았다. 오기 전에 친구들이 경제적인 걱정은 안 시킨다고 약속해 왔는데 걱정을 안 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학교 빚까지 안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 달아나 버릴까하고 몇 차례나 떠나려고 했는지 모르는데 그 해 크리스마스 새벽에 학생들이 부르는 캐롤에서 일종의 힘이 몸을 감쌈을 느끼며 너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 라는 지상명령을 듣게 되었다. 그때 나 자신의 불쌍함과 실망과 일생을 망쳐버릴 것 같은 기분에 그처럼 슬픈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울고 말았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다. 라고 하는 것 같은 위에서부터 질책소리를 느끼며 마음껏 울었다. 그렇게 하여 내 운명이라고 할까?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결정되고 말았다. 그 이래로 나는 고아이 여학교 이름에 접목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접목은 붙은데 떨어지면 말라죽어 버리는 것이기에 그 후로는 실망감이 들 때도 지겨울 때도 언제나 나는 접목이 된 것이다. 라는 소리가 마음속 깊은 속에서 강하게 들려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학교는 규모는 작지만 교육 특히 정신 교육이 알다. 학생은 입학 때 80명 이상은 받지 않는다. 3학년 때부터 상급학교 진학반과 가정으로 돌아갈 학생 두 반으로 나누어 가르친다. 봄에 입학 정원이 찼을 때 졸업생이 자기 딸을 데리고 와서 받아 주라고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몹시 괴로웠다고 충고의 말씀도 하시며 누가 선물을 가지고 오면 고스란히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학생들을 늘리면 그건 학생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지 교육하는 곳은 못된다고 하며 겉모양만 그럴듯하고 속은 빈 깡통을 만들면 움직일 때 빈 통 소리만 요란하다고 이야기 하고는 웃으신다.’


 


 전교생이 모두 30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내가 들어간 2학년 반 아이들의 나이는 평균 14세 이고 내 나이는 23살 이었다. 교회 주일학교니 찬양대에서 선생소리를 들으며 몇 해 동안 어른노릇을 해온 내가 갑자기 머리를 싹둑 자르고 세라 복을 입고 어린애들하고 벗하고 지내자니 각오는 했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 체육선생이 수업시간에 내 뛰는 모양을 보고 어찌나 웃어대는지 그만 주눅이 들려서 체육을 할 수가 없었다. 애들은 애들대로 내게 말을 걸고는 대답을 못해 끙끙대는 것을 보고 까르르 까르르 웃어댄다. 말도 못하는 나이 많은 한국 학생이 들어와서 뚱그적 거리고 다니는 꼴이 우스워 죽겠는지 구경거리인양 보고는 웃고 수군거리곤 한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일본말을 연습시켜 주었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하면 나는 그대로 받아 말하며 일본말을 익혀갔다. 담임선생이 과외로 한 시간씩 말을 가르쳐 주었고 한국인 선배 한분이 소학교 1학년 일본국어 교과서를 읽으면서 일본말을 익혀주었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내다보니 수학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기초부터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은 말을 몰라도 이해 할 수가 있는데 기초도 없이 건너뛰어 중간부터 들으려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른 과목은 말을 익히면 알아듣겠지만 수학은 중간부터 하다가는 가면 갈수록 모르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어 일본말 과외는 다 집어치우고 혼자 들어앉아 수학을 기초부터 공부했다. 한 달을 하고나니 수학 시간에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본사 과목 같은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없고 과외 공부로도 안 된다. 그 시간만 되면 읽을 수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들을 지명들이 나와서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그럭저럭 지내다 시험 때가 되었는데 일본사 시험에서 어떤 것은 문제를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도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이름만 써서 백지를 내고 말았다. 그런데 통지표를 받아보니 그 과목이 10/10점으로 나와 있었다.


 


선생님께 가서 이거 잘못된 것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건 인정점수 미코미요. (그 미코미 라는 말은 이뻐 한다는 말이 이뻐서 준다는 점수 그 말인가 봐요.) 미코미라고 한다. 지금은 말을 몰라. 그러지 말만 알게 되면 잘할 거라고 인정해주는 점수라고 한다. 이것은 정말 학생을 사람으로 키우고 있는 곳이구나. 감격하였다.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미코미 인데 라는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귀엽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는 거지요. 그럭저럭 하면서 그래도 낙제는 면하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 당시에 학제로는 상급학교에 가려면 우선 학교성적이 좋아야 한다. 웬만한 성적 가지고는 서류전형에서 다 떨어지고 만다. 서류 심사에 합격해야 구두시험 전형을 받게 된다. 그러니 성적을 올리지 않으면 상급학교에 지원서도 낼 수 없다. 낙제나 면한 성적을 졸업 때 정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막막하였지만 여간한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생각하고서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었다. 이제 목표는 정해졌다. 의사가 되는 거다. 더구나 의전에는 지원자가 많다고 함으로 합격하려면 성적이 좋아야 할 테니 실력이고 뭐고 성적을 올리는 데만 집중하자. 해서 점수 따는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3학년 때부터는 나보고 웃는 애들도 없고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 되어준다. 내 나이를 아이들이 나에게 맞추도록 많이 노력도 했지만 나이들이 순진하고 아이들이 순진하고 착해서 점점 나에게 나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주 교장선생님 같은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복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이런 분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고맙기 그지없다. 언젠가 한번은 왜 시험도 안 치루고 한국 학생들을 받아주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간단히 대답하신다. 나이를 먹고 멀리서 공부하겠다고 오는 그 열성이면 되지 않느냐? 내가 들어간 후 나이든 한국 학생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어찌나 억척이었든지 그중에서 반장이 세 명이나 되었다. 고아이 학교 풍토는 반에서 학생들끼리 철저히 무기명 투표로 반장을 뽑았는데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차별하는 법이 없었다 말도 능하지 못한 나를 4학년 때는 학생회장으로 뽑아 주어서 자리에서 서기는 했지만 어떻게 회의를 이끌어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아침마다 전 학생과 교직원이 강당에 모여 아침 예배 조회를 아침 예배로 조회를 대신하는데 주 교장 선생님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주옥같은 말씀을 애들이 알기 쉽게 하신다. 기숙사에서 드리는 저녁예배 시간에도 가끔 말씀해 주셨다. 많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말씀.(끊김)5448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학교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친구는 일생의 보배가 된다. 어른들이 되어서는 친구사귀기가 어려워진다. 어렸을 때 지금 사귀어야 한다. 사람의 의지도 단련해야 굳어진다. 가령 일주일간 왼팔을 안 쓰겠다. 하고 작정하였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왼팔은 쓰지 않는 각오를 하든가, 한쪽 눈을 보지 않겠다. 하면 보지 않고 견디는 것 같은 무엇이고 자기가 정해놓고 하고야 말겠다는 자기 의지를 스스로 훈련해 보아라. 또는 나는 밤중에 내방에 눈을 감고 들어가서도 무엇이고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물건이고 마음이고 뒤죽박죽 해놓지 말고 정리해 놓고 살아야한다. 그 밖에도 여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지금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학교의 교훈이기도하고 교장 선생님의 좌우명이기도한 다섯 기능이 있다.  1. 인격존중  2.형식보다 정신  3.자유 자치  4.노동신성  5.희생정신 이 기둥을 세우고 교육을 쌓아가셨는데 그 중에서도 인격존중을 제일 강하게 역설하셨다.  



 우리 이 선생님도 교육을 하셨는데 첫째가 인격완성이지요. 인격완성 자립정신 이 어른도 첫째가 인격존중, 형식보다 정신, 자유 자치, 노동신성, 희생정신 이 기둥을 세우고 교육을 쌓아가셨는데 그 중에서도 인격존중을 제일 강하게 역설하셨다.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나름대로의 인격이 있다. 왕은 왕대로 인격이 있고 지게꾼은 지게꾼대로 자기 인격이 있다. 누가 더 높다 낮다. 하는 것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누구의 인격이고 소홀히 본다든가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형식보다 정신을 강조 하실 때는 학생들이 일기 쉬운 예를 들어주신다. 너희들이 속으로는 저 선생 보기도 싫다. 하면서 앞에서는 꼬박꼬박 절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절하기 싫으면 절하지 마라. 그것이 미워하면서도 절하는 것 보다 낫다. 사치는 질색이셨다. 껍데기 하나 벗기면 아무것도 아닌 겉을 꾸미느라고 애쓰지 말고 속을 꾸며라. 학교의 분위기가 그분의 생각에 젖어있어서 학교 전체가 다 검소하다. 모양부리고 싶어 하는 젊은 여학생은 제물에 못 견디어 떠나버리고 말지만 다른 선생들은 보통 2-30년씩 넘겨가며 학교와 같이 사는 분이 많았다. 그 학교 어떤 교직원의 고백이다. 교장 상을 말할 때, 교장 겸 소사라고 한다면 그런 분은 주 선생 같은 이를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당초에는 좋아하는 교장상이 아니었다. 교정 안팎을 청소하고 기숙사 목욕탕에 장작불을 때고 있는 교장을 존경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힘든 일을 하고 교장에게 보고를 했는데 ‘아 그런가?’ 한마디뿐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도 한마디 없어서 화가 나서 교장에게 대들며 볼멘소리를 했다. 사람에게 일을 시켰으면 수고했다고 한마디 쯤 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주 교장은 의연한 태도로 당신은 교장을 위해 일하는 건가? 하나님 때문에 일하는 건가? 위로의 말이 듣고 싶거든 하나님한테 가서 들으시오. 나는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후로 내 근로관이 일변해 버렸다. 말없이 일하고 사람의 평가를 대가로 기대치 말고 사람이 싫어하는 일들을 맡아서 하자. 교장선생님의 신앙고백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죄에 3대 요소는 첫째 이기주의. 둘째 인격무시. 셋째 선을 행해야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인류는 이 3자에서 나오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것이 그분의 신념이었다. 내 일생의 바람은 넓은 사람이 넘치는 하나님을 좁고 좁은 교리에 가두어 놓는 일이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기적에 걸려있는 사람, 교리에 걸려있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의심하면서 신앙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다고 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 한다. 이것을 굳게 가지고 주장하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 바쁘신 교장선생님이 교내의 교회까지 세우고 맡아 운영 한다. 기숙생들과 또 누구든 오고 싶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매 주일 예배마다 직접 인도하며 설교한다. 설교는 군말 한마디 섞지 않고 설교는 군말 한마디 섞지 않고 10분을 넘기지 않는 알찬 말씀 이었다. 수신 과목은 교장선생님이 맡으시는데 교과서 몇 줄을 의무로 읽고는 다음에는 성경에 관한 이야기나 폭넓은 교양과 생활에 대한 깊은 교훈의 말씀을 해 주셨다. 어떤 수신 시험시간 이었다.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죄다. 죄가 된다는 의미에 대하여’라는 문제를 내놓고서는 나가버리신다. 이건 누구와 의논해서 쓸 수도 없고 누구의 것을 보고 베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자기의 머리들을 쥐어짜느라고 모두 다 끙끙거렸다. 나도 뜻은 알지만 정작 답을 쓰자니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없이 시원치 않는 말을 나열해서 내었는데 성적이 그리 좋을 리 없었다. 나는 그 문제를 일생을 두고 내가 답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고 살면서 대답해 보려고 해 보지만 역시 지금도 좋은 성적일수는 없다. 그러나 중간에 끝내지 말고 내가 사는 동안 계속 몸으로 써야 할 답으로 생각하며 지금도 끙끙거린다. 



그거 무슨 소리라고요? 지금까지도 끙끙대는 그 말이 사람이 선을 행해야 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는데 그 뜻이 무엇이냐? 그 해답을 지금까지도 쓸 수가 없다고.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우리도 생각해 볼 문제지요? 왜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가? 그 답을 오늘까지도 못 찾으셨다고. 한번은 한국 학생들이 주 교장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왜 일본에서 일을 하십니까? 대만에서 일하기가 힘이 든다. 일제 때 대만의 사정도 한국과 마찬가지였기에 그 말뜻을 얼른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은 너무 넓다. 그리고 일을 하는 데는 말이 문제다. 일본말은 익혀놓은 것이니까 일하기 쉽다. 어디 가서 일을 하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인데 장소가 그리 문제이겠느냐? 하는 의미로 이해했다. 어떤 조건에서 상황에 따라서 생각이 흔들리거나 편리에 따라 방향수정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살피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옹고집으로 굳어진 분도 아니다. 성경을 풀어 이야기 할 때는 그분의 자유로운 사상이 엿보였다. 한번은 또 이런 좋은 학교가 한국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더니 너희들이 가서 세우면 될 것 아니냐? 너는 교장하고 너는 소사해라. 선생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소사는 아무나 못 한다. 소사하는 일은 더 훌륭하다. 라고 하셨다. 결국 그 학교 출신인 우리가 학교는 세우지 못했지만 고아이 여학교 출신들이 각계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분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단계. 성적도 올라가고 졸업할 때는 우등상도 탔으니 내 노력이 어지간했다는 것을 자인 한다. 그리 좋은 머리도 아니 한데 이만큼 이라도 해 내었다는 것은 노력의 결과였다. 생각하며 옛 시조를 한절 읊는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조그만 한 언덕을 오른 거지만 내 깐에는 남들이 큰 산 넘기만 큼이나 힘들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만, 이분이 지금 그전에 저희들하고 같이 저희들이 제중병원에 다닐 때 그 제중병원 부원장까지 하시고 나중에는 목포에 가서 당신 개원을 하셨어요. 결핵병원 을 하시다가 사재를 병원까지 다 털어가지고 지금 디아코니아를 수녀원을 설립하신 분입니다. 그래가지고 디아코니아에 현재 살아계시지요. 그분의 회고록 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말 같은 건 기억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선을 행하지 않으면 왜 죄가 되는가? 선을 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그 의문을 지금까지도 못 풀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겠다는 게 다 이루어지지는 않지요. 무엇을 해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못하는 것이 더 많아요. 사람하고 짐승하고 다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은 언제나 의문을 갖고 왜 안 되나? 짐승은 그 당장 안 되면 그길로 끝나고 싸우고 죽이고 끝나지만 사람은 왜 안 되는가? 왜 해야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갖고 늘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 사람과 짐승의 다른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는가? 그 답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도 한번 풀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찬송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