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태풍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곡성과 사천의 9월 5일 날씨는 좋았다. 시내 복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케이블카를 타고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삼천포대교 옆으로 있는 사천바다케이블카에 올라 아름다운 사천 남해 절경을 보고 봉화대가 있는 각산 정상에 올라 사천 앞 바다의 다도해와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1982.01.17. 정인세 원장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8절서부터 읽겠습니다.
감사기도. 먼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셨고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칭송이 온 세상에 자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을 찾아갈 기회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내가 그분의 아들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있는 바로 그 분이십니다. 나는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서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고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에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여러분을 찾아갈 계획을 여러 번 세웠다는 것을 꼭 알아주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은 전도의 성과를 여러분에게서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문명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는 그 기쁜 소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쁜 소식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7절까지 읽었습니다.
오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전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박국 2장 4절 말씀이지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홀로 의로우시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주셔서 희생의 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서 모든 죄인들의 죄가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 여기도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다고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그 올바르다는 말이 그전 성경에는 의롭다. 이런 말로 나와 있지요. 이 모든 사실을 믿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그래서 바울사도는 지금 읽은 성경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인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셨고 로마 교인들이지요. 또 그 로마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믿음에 대한 칭송이 잘 믿는다는 칭송이 자자하다. 그랬어요. 로마교회 속한 교인들은 믿음이 좋다고 잘 믿는다고 그런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고 감사한다고 8절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 다시 그 로마 교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바울사도는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복음을 전할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하면 복음 이지요. 아까 그 우리가 믿는 내용이 복음이 되는 것 이지요. 예수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그것이 복음이지요. 그 복음을 전할 책임을 바울사도는 통절히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이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져다준다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여기가 중요한 데입니다. 우리가 명심하고 이 시간에 생각하려고 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인간 사이는 올바르게 될 수가 없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삐뚤어졌다고 인제 나중에 우리가 찾아보지만 로마서에는 그렇게 또 로마서뿐 아니지요. 성경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삐뚤어졌다. 혹은 막혀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나 사이가 올바르게 되어 진다. 그것을 여기 역설하고 계세요. 저는 요새 서울지방을 다녀오면서 어떤 형제하고 하루저녁을 같이 자면서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믿음은 참 귀한 것이다. 성경에 가르친 말씀대로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이 세상에 믿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하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인생 일생을 살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 밖에 느껴지는 것이 없고 하나 남는 것이 있으면 예수님을 알 게 된 것 믿게 된 것 그거 하나만이 유일한 재산으로 남는다는 것을 아마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일찍부터 그런 걸 깨닫는 사람은 참 큰 은혜지요.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믿음은 귀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쓰는 말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명예도 지위도 부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상대적인 겁니다. 있다가 없어지고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절대적이라는 말들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올바르게 된다는 것은 우리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해주는 길을 가르쳐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또 귀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짧게 살던 길게 살던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같이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돈을 많이 번다 학문을 많이 한다. 그 외 이세상서 어떤 이름을 날린다. 그런 것 보다 단 하루를 살다 죽어도 인간 노릇을 하고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짐승같이 살아서는 안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답게 사는 길을 올바르게 산다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거든요. 그 올바르게 살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인은 다 믿는 사람들이라. 그러고 믿음이 귀한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참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지요.
또 어떻게 하면 잘 믿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 세상 철학이나 과학이나 어떠한 학문을 갖고는 절대로 알아지지 않는 분야입니다. 그것도 아마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왜 믿음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건 잘 아시지요. 에베소서 2장 7절 8절 말씀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하신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나타내시려고 그리스도예수를 통하여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해서 된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구원은 여러분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걸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다.
그러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을 위해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어떻게 하려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은 나와서 하나님이 믿음을 북돋아 주셔서 그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한 방편이셔 방법이셔 하나님의, 그러기 때문에 인생은 아무도 알지 못해. 또 할 수가 없어 우리가 그건 경험으로 압니다. 우리는 누구를 내 마음대로 믿게 할 수도 없고 심지어 내 믿음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 믿음 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형체는 설명할 수 있어도 본바탕을 파헤칠 수는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좀 말이 까다로워지지만 믿음은 내가 믿어보고 나서야 믿음 맛이 조금씩 알아지는 것이지, 내가 믿어보지 않고는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 별나게 설명을 해줘도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지, 내가 그 믿음 맛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꿀을 먹어본 사람이 꿀맛을 알지, 꿀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꿀이 달다 하는 것도 꿀이 어떻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그 자신이 사실로 꿀맛은 모르는 거와 같이 모든 것이 그렇지요? 이 세상 경험이라는 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지 특별히 믿음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면 우리는 예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기는 우리가 조금도 무엇을 보탤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시는데 거기 뭐 신학이니 뭐니 철학이니 하고 인간의 지식을 가미시키면 도리어 그 믿음은 순수함을 잃어버려요. 믿음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것이 현대교회를 크게 타락시키고 세속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다 모아놔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인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인간의 슬픔이 있고 오늘 우리들이 못 믿는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베드로전서 1장에는 그 믿음에는 많은 쓰라린 눈물 고통을 겪어서 연단을 받은 뒤에 순수해 진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건 우리 쪽에서 하는 거지요. 우리 쪽 에서는 많은 연단을 받아야 순수해져요.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순수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히 불순해졌다는 것을 여기는 암시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순수한 신앙을 불순하게 만들어 버렸어. 그래서 그 믿음은 많은 연단을 받아야 된다. 그런 뜻도 있고 또 하나는 우리들 자신이 너무도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연단을 받아야 그 순수한 믿음을 우리는 비로소 가질 수 있다. 그런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이라고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으로 남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가서 가장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고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이 믿음인데 그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라야 된다. 그 믿음이 순수하지 못할 때는 우리가 일생동안 애쓰고 고생해서 예수 믿은 것이 보람 없이 되고 만다.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그런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그걸 누구나가 얼른 받아들이지 못 하는가? 믿으라고 해도 그 믿으라는 말을 또 그 믿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또 내가 믿으려고 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잘 되어 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
거기 가서 걸리거든요. 대개, 믿어보려고 해도 믿어야 쓰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믿지를 못하고 있거든요 또 믿어지지가 않거든. 그걸 바로 말하면 죄지요. 쉽게 말하면 죄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은 그 예수님도 그러시고 베드로 사도나 모든 그 사도바울께서나 꼭 전도하실 때는 믿으라는 말을 직접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회개해라. 그리고 믿어라. 꼭 이렇게 말씀했어요. 회개를 언제든지 앞세웠습니다. 군중들이 베드로에게 자기들의 그 죄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면 우리가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그리고 물으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주신 성신을 받으리니 이 세 가지 요소가 신앙생활에 아주 기둥과 같은 것인데 회개를 먼저 해.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 대목을 조금 생각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죄가 가리어져서 그럽니다. 죄라는 장막이 죄라는 이 흑암이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려주시는 그 믿음을 방해하고 있어 받아들이지 못해.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하면 내게 있는 이 아주 절은 죄 짙은 죄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되어가지고 있어서 내가 믿으려고 하는 것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시려고 하는데 담이 되어가지고 방해가 되고 있어. 이래서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죄를 그대로 두고 믿으려고 할 적에는 요새 우스운 말로 쓰자면 우회작전을 합니다. 돈도 갖고 명예도 그대로 갖고 세상 재미도 좀 봐가면서 믿어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이 죄의 담은 그대로 놔두고 이렇게 돌아가요. 돌아서 믿어보려고 그러는 그런 신자들이 오늘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과 철학까지 거기에 협조들을 하고 있어요.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데 그냥 받아들이면 죄의 담이 무너지니까 나라는 것이 무너져버리니까 그것을 안 하려고 그대로 죄는 품고 그리고 이렇게 돌아가서 믿음 아닌 것을 가지고 믿음인줄 알고 이렇게 믿으려고 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의식을 못할지언정 그렇게 되어 지고 말아요. 그러니까 믿는 것이 아니야.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양이 차지 않지요. 영적 양이 영혼에 만족이 없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영혼이 만족 하기는 커녕 도리어 괴롭지요. 차라리 믿음을 모르고 그냥 살적에는 세상 재미나 톡톡히 보았는데 믿어야 쓰겠다. 하는데 믿어지지는 않고 세상 재미도 봐야겠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자꾸 방해를 하고 그러니까 도리어 더 괴롭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런 상태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자라고 이렇게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믿는다는 것을 그 행위가 우리 안에 성립되려면 먼저 죄를 버려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가 절실히 느낍니다. 그것은 아마 이럴 때 많이 우리가 깨달아질 것입니다.
믿어보려고 애를 쓴 사람 애를 써보지도 않은 사람은 그것조차도 몰라요. 그래도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항상 죄 가운데 그대로 있지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밤낮 죄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 그럼 대단히 괴롭고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니 어째서 내가 이렇게 못 믿어질까? 왜 내 믿음이 이렇게 약할까? 또 내가 정말로 믿는 것인가? 그런 회의에 빠지게 되요. 이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도달해야 되는 거야. 자기가 잘 믿는 줄 아는 것이 큰 병이고 사람이 굉장히 망치거든요. 자기의 믿음이 약하다는 것 못 믿는 다는 것 그것을 자꾸 깨닫게 돼. 그럼 그 다음에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니 내 믿음이 순수하지가 못 했구나. 내 믿음에는 더러운 세상 찌꺼기가 많이 섞여져 있구나. 그걸 알게 돼. 다른 말로 하면 내 죄가 남아있구나. 아직도 내가 회개할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믿어지지를 않는 것이로구나. 그걸 알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자기의 죄를 찾아내고 회개하는 일은 그 귀한 믿음을 우리가 소유하는데 절대적인 동시에 대단히 중요하고 일생을 걸리는 일입니다. 일생을, 아마 이 세상일이 바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보다 더 크고 바쁜 일은 없습니다.
내가 믿는데 방해되는 그 방해물을 제거하는 일 이것보다 더 큰 한 국가에서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인의 무슨 먹고사는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그것보다 몇 백배 천배 더 중요한 것은 이 내가 금보다 더 귀한 구원의 요건이 되는 믿음을 받아들이는데 방해되는 것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 이것보다 더 큰일은 없는 거야. 이거 수양회 때도 한 시간 얻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또 아마 이번 강사 선생님들은 거의 그런 종목을 많이 이야기 하신 것 같아요. 한국의 기독교인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800만 명인데 아마 공산주의자들이 800만 명이 있다면 한국은 벌써 공산국가가 됐을 거라고, 그런데 왜 기독교인은 800만 명이나 되면서 요 꼬락서니냐? 아무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고 세상이 그대로 있냐? 그런 탄식을 하셨지요? 전 세계의 기독교인이 10억인데 인구에 50억을 잡고도 5분의 1이 되는 기독교인이 지구덩어리에 있는데 왜 지구 덩어리위에는 비참과 전쟁과 모든 불의와 흑암이 이렇게 엄청나게 가득 차 있느냐?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빛을 발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걸 강조들을 했습니다.
이번에, 그러니까 그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빛을 발하고 참으로 소금의 역할을 하고 참으로 신앙의 힘을 발휘한다면 이 지구 덩어리나 이 민족은 확 달라질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이치로 봐서는, 잘 믿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예루살렘성이 망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그러셨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들은 죽은 믿음이 아니냐? 이거야. 800만 명이니 10억이니 그러지만 참 믿음이 아니다. 병든 믿음이 아니냐? 힘을 잃어버린 믿음이 아니냐?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걸 아마 오늘 아침에 교회연합 신문을 읽다가 나왔지만 모두 그렇게 강조하고 있어요. 이제 깨닫는 거지요. 대단히 귀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여기서 이제 큰 힘을 얻어야 하는데 큰 힘을 얻어야하는데 대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다. 그런 말씀을 이렇게 여러 군데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지요. 예수님이 그 몇 번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더러 옮겨서 바다로 가라고 해도 간다. 할 수만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건 변화 산에서 내려와서 간질병 환자를 만났을 적에 하신 이야기지요. ‘할 수만 있으면’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그런 말씀을 했지요?
또 사도바울을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했지요? 그 믿음 말이지요? 그 믿음 산도 옮기는 믿음 능치 못한 것이 없는 그 믿음 바울사도는 그걸 어떤 때 이야기 했는고 하니 내가 배고플 줄도 알고 배불러도 타락하지 않고 부함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함에 처할 줄도 아는 그 비결을 배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경제 제일주의 시대에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 이것은 꼭 한번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지요. 빌립보서 4장 12절 이하에 비천하게 나는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불편을 느끼지 않아. 가난해도 괜찮다. 그 대신 풍족하게 살줄도 안다. 나는 돈이 많아도 돈이 많아 그것 때문에 거기 마음이 빼앗기거나 그것 때문에 죄를 짓거나 뭐 더 좋아하거나 그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야 어디 그럽니까? 주머니에 돈푼이 없으면 뭐라고 자기 코가 석자가 돼서 죽은 송장같이 기어 다니고 그것이 요새 세상 꼴인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적응할 수 있다. 오늘 아침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어요. 어떤 부자인데 장로야, 그래 실업인 협회의 아마 간부인 것 같아. 그이가 신문기자하고 인터뷰를 했습디다. 만나서 신년 대화를 대답을 했어. 그 자리에서 그 부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 교회가 너무 부하다. 이것 때문에 인제 크게 미움을 받고 그런데 그 부를 잘못쓰기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리 실업 인들도 그렇다. 우리가 큰 공장을 운영을 하고 기업체를 운영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인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으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자기가 지금 거느리고 있는 종업원이 3천명이라. 3천명이라는 사람의 복지를 나와함께 같이 동행해야 한다. 여기서 그래도 이윤이 난다면 그것은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 그이가 그렇게 하는지는 몰라도 어떻든지 그걸 아주 강조하고 있어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 그러면 그 사람은 부함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그대로 한다면 말이지요. 그대로 한다면 그는 부함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가령 그래서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그 비결 이게 신앙이에요. 그러면서 자기는 그런 믿음을 통해서 모든 생활에 기초를 삼고 있다고 그렇게 말을 했더군요. 모르겠어요.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했어요. 13절에 내게 힘을 주신 분을 통해서 나는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다. 내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서 나는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적에 무엇이 생각납니까? 나나 여러분은 잘 몰라도 얼마나 무능을 느낍니까? 뭐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여기는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다. 어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힘을 주시면 그렇지요? 이 우주를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 그러면서도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의 생명까지도 간섭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도 하나님처럼 살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은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지혜로우시고 능력 있으신 그 하나님을 내 안에 살게 하는 그것이 믿음인데 그것이 믿음이에요. 이 믿음은 나를 비우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무조건 받아. 그것은 이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약하고 타락되어있어서 못쓰게 되어버렸으니까 이것은 까딱하면 생각만 해도 말만해도 손가락만 놀려도 죄 짓는 재주밖에 없거든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전부 삐뚤어졌어. 그러니까 나는 못 쓰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맡기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이라는 말은 그 원어가 자체가 그 안에서 산다. 하는 뜻이 있어 산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산다. 하나님 안에서 사니까 내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그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사상과 내 생활을 지배하는데 하나님 같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 인제 그 점을 강조해. 다시 말하면 믿음은 우리를 크게 변화시키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에베소 5장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으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또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을 그렇게 말해요. 그것이 우리를 참 구제하는 길이니까 사람을 사람노릇하게 만드는 길이니까 그래 이렇게 되는 것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믿었다면 우리 결과 쪽에서 봅시다. 대개 믿음을 이야기 할 적에 보면 무조건 믿는다. 하는 그 믿음에만 매달리다보면 그 믿음의 결과 쪽을 등한히 할 적이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과 쪽을 이렇게 봐. 만일 참으로 믿었다면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데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으니까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 좁아진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같이 넓어져야 할 것 아닙니까? 또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던 그런 악질적인 성격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처럼 자비스럽게 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믿었다면 믿는다고 하면 그렇게 변화가 있어야 그것이 믿는 사람이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직 믿은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되지 않아요? 강팍하던 사람이 온유해지고 욕심쟁이가 욕심이 없어져버리고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말이지요.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성품이 내 안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해야 그것이 이제 내 안에 믿음이 들어왔다 하는 증거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변화가 일어나 그래가지고 인생이 변해져가지고 세상 쪽만 건너다보던 것이 이제 하늘을 쳐다볼 줄 알게 되고 저런 개라는 동물은 발로 기어 다니면서 맨 땅바닥 내려다보고 똥이라도 아무 거라도 있으면 주워 먹기만 하는 것이 짐승의 본성, 짐승들이야. 그런데 사람도 맨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돈이 어디 떨어졌나? 먹을 게 어디 없나? 그러면 무엇이 달라? 짐승과 무엇이 달라? 그전에 우리에게 와서 말씀 많이 하시던 유 영모 선생은 왜 사람을 이렇게 꼿꼿하게 만들어 놨는지 아냐고? 하늘 쳐다보고 살라고 그러셨다고. 왜 그런 사람이 하늘을 쳐다 볼 줄 모르고 위를 좀 쳐다보고 살줄 모르고 어떻게 이야기가 어저께 저녁인가 전화를 하다가 아무개는 요새 어째 아주 먹기 살기에 정신이 없어요. 사실은 아주 안타까워요. 이거 이야기가 이 시간은 다 되었는데 너무 옆으로 나가. 참 요즘 살기가 어렵습니다.
아주 그냥 이번에 서울 갔다가 어떤 청년 하나를 만났는데 평생 살림걱정을 안 해. 이 사람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살림 걱정을 안 하는 사람인데 나 참 그래 낙관주의라고 그럴까? 그런 사람인데 ‘아이 죽겠습니다.’ 그래 그 사람 입에서 죽겠습니다. 그런 말이 나오는 것 보니까 죽겠나봐. 직장이 사람을 자꾸 내모니까 일들이 없어져. 자꾸 내모니까 제발 좀 붙여달라고 그러면 너희들 이렇게 하겠느냐? 서른 명을 가령, 가령 서른 명 주던 월급을 가지고 경영을 했는데 서른 명 줄 월급이 없어. 스무 명 밖에 내가 줄 월급이 없어. 그럼 너희 서른 명이 스무 명 가지고 나눠먹겠느냐? 이렇게 나온다는 거야. 지금 그런 기업들이 많아요. 중소기업 그럼 어쩔 거야? 그래도 좋으니 밀어내지만 마시오. 그럴 거 아니요? 그러면 서른 명이 스무 명 것을 먹고 살아야 한다니까 이 세상과 역행이 되지요. 세상 물건 값은 자꾸 올라가는데 지금 월급 깎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그러니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겠소? 그런 것 예를 들자면 끝이 없고 말이요. 이러니 그런데 어떻게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는 말이요? 그럴 거야. 그런데 당장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할 거야? 실제 문제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까 우리가 교독문을 읽었어요. 마태복음 6장 그 예수님이 그걸 모르시겠소? 40일 밥을 굶어보신 양반이 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양반이 그거 모르겠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셨어. 그런 사람들에게다 대. 그뿐 아니지, 지난번 여러분들도 들었겠지만 인도라든지 특별히 방글라데시 같은데 가보면 그냥 길거리에 굶어죽은 송장이 이렇게 뼈다귀만 남아가지고 늘비하다고 그런 사람들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면 어떻겠소? 요새 아이들 말로하면 ‘웃기 네’ 그럴 거야. ‘웃기 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야.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니까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야기 하는 거야. 사람의 힘으로 이걸 어떻게 해결을 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는 먼저 그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해라. 그러지 않습니까? 믿어라. 그 말이야. 먼저 믿어라. 그 말이야. 그래도 믿어라. 그 말이야. 그래도 믿어라.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는 것은 꼭 필요한데 실제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야.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야. 그렇게 죽고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래서 나라는 것을 완전히 비운다는 것은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 죽을 각오를 하는 문제야. 실제에 있어서 그것이 무서워서 믿지들 못하는 거야. 그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조금 몇 군데 읽어보고 그 문제를 대답해 봅시다. 갈라디아서 아 에베소서를 먼저 볼까요? 에베소서 5장 에베소서 4장 20절서부터 봅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배웠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의 가르침을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속아서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여기 있는 거예요. 오늘 인류의 비참은 이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이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옛사람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오늘 그것을 초래한 거지요. 그렇다고 우리는 그걸 모른 척 한다 던지 흉보는 게 아니야. 또 우리라면 이미 새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것도 합당치 않는 말이 되려는지 몰라도 오늘 인류의 문제가 여기 있었으니 여기서부터 풀어나가야지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거기서부터 우리 생활을 개조해 나가는 거지. 그것을 자꾸 갖다가 구제 해야지요. 우선 급한 문제 해결해 나가야지,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사람은 올바른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사도는 자기가 생활로서 모범을 항상 보여주시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잘했지요?
바울사도는 바울사도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계실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요, 이제는 이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 이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야 그것이 믿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야. 이것이 올바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 하시오. 현재 자기의 생활과 이것이 너무 동떨어질 때는 아마 졸음이 올 거예요. 그거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리지가 않으니까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실감들이 나지 않는 것이 문제야.
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감격이 없는 것이 문제야. 그것이 모두 문제가 되요.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또 고린도후서 4장에서 우리 조금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자기가 굉장히 어려움을 당한 것을 이야기한 끝머리에 10절에 보면 있지요? 그 위에 가보면 궁지에 몰려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고 자기 체험을 말했어요. 무엇이 그렇게 하는가? 믿음이라. 그 말이지요? 이렇게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이건 결론도 되어요. 우리들이 예수의 죽음을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자꾸 체험을 해야 되는 거야. 체험해야.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버릴 때는 그 살이 썩어버리지. 우리 옛 생활 그 전에 가졌던 사상 습관 모든 내 주위의 친구들 까지도 내 생활환경을 자꾸 죽여 버려야 하는 거야. 내 안에서 죽여 버려. 심지어 가족관계도 모든 관계도 여기서 이 성훈 선생 강연하셨지요? 그 녹음테이프를 이번에 서울 갈 때 갖고 가서 어떤 집에 가서 앉아서 그 가정을 여섯 식구가 대학생이 셋이고 젊은 남자들하고 전부 젊은 사람들이야. 부모도 아직 젊고 거기서 틀었어. 거기서 자 내 시시한 말 하 는 것 보다 어디 이 양반의 성명을 들으시오. 아홉시부터 하는 것을 열한시가 넘도록 그런데 잘 듣고 앉았어. 듣고 앉아있는데 자꾸 버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버려라. 무엇도 버려라. 무엇도 버려라. 버려야한다. 이걸 꽉 쥐고 있으면 안 된다. 다 버려야 한다. 아 이것 참 큰일 났거든. 이것 참 큰일 한마디도 없이 한마디도 없어. 그래도 열한시가 넘었을 거예요. 그래도 듣고들 앉아있습디다. 나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 결과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어.
이것이 문제야. 마음이 아 그렇게 된다면 다 버려야겠는데 이대로 하려면 다 버려야 돼. 그거 어쩔 거야. 그럼 그거 다 가지고 살다가 지옥으로 가던지 결단을 내려야지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은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왜 이 어차피 죽을 생명 썩어질 생명 그것의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새싹이 새 생명이 내 안에서 움트게 하기 위해서 나를 자꾸 죽음에다 내어준다.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마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만으로도 대강들은 알아들으셨고 또 이미 알고 계실 줄 압니다.
무엇이 우리를 못 믿게 하는가? 하는 것도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더 읽고 그만두지요. 그런데 이 믿음이 우리에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아요. 요한1서 5장에 보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 이렇게 나와 있지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믿음을 연결시켰지요?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 나타날 적에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우리 생활 가운데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겨낸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이겨내는 세상을 이겨내는 승리의 길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이깁니다.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마귀의 것 아닙니까? 피조물은 다 결국은 없어지고 망할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많은 반대가 일어나고 토론을 해야 하는 말이지만 지금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다. 그거 뭐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적에 세상 영광을 다 보여주고 이게 내 것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거 내가 다 네게 줄 테니 내게 절하라. 이렇지 않았습니까? 세상을 이긴다. 나를 이기고 누구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니까 이 믿음 이라는 것은 세상을 이기고 세상 위로 걸어가고 날아가는 것이 믿음이에요. 갈릴리바다 물위를 걸어가시던 것은 예수님이에요. 제자들은 믿음이 없으니까 바다에 빠졌듯이 우리들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에 빠져서 허덕거리고 그냥 꼴깍꼴깍 하다가 같이 망해버려요.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 바다 물결에서 위로 솟구쳐 올라와서 예수를 붙들고 세상을 걸어가는 거지요.
위로 걸어가는 것 세상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당장 굶어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요? 그런 말이 나와요. 어떻게 되요? 찬송 부릅시다. 3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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