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성자 이공 추모 모임 : 먼저 가신 분들의 추억

mamuli0 2019. 3. 16. 08:33

동백 꽃이 흐드러지고 노란 수선화가 피기 시작하면 연산은 봄 기운에 흠벅 젖는다. 춘분이 다가 오면 아버님과 장인 어른이 가신 날이기도 한다. 잊고 살다가도 이 때는 가신 분들을 다시 그리워 한다.

 내가 알기로 동광원에서는 매년 3월 15일에 먼저 가신 이들의 추모회를 합동으로 추모회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장로님이 사고로 다리 골절을 하여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집으로 오셨다 하기에 한 번 뵙고 싶어 화순 등광리를 찾앗다.

 향년 91세 이신데도 기쁨과 기력이 충만 하셨고 그래도 수종드는 형제가 있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다. 오후 2시에 모임이 있다 해서 이공 기도터에 갔는데 이공 기념사업회에서 모임을 주관하고 남원과 광주에서 동광원 회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참석해서 인사와 기념 예배를 드렸다. 예배 시간에는 천둥과 소나기가 있었으나 예식을 마친 후에는 날씨가 쾌청하게 개어 김제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이 현필 스승의 발자취


1995.02.05. 김준호 선생


 잠언 17장17절 말씀입니다. 제가 먼저 한번 읽고 한 세 번 같이 따라서 같이 읽으십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두터운 이가 동무가 아닌가? 갑자기 어려운 일 당하여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주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간 아닌가? 잠언 17장 17절 말씀.



   



 금년에 서울 어머니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실 때 저도 귀로만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녀오신 분들도 있고. 또 이 장로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때 같이 동참하신 분들도 있고 또 장례를 같이 다녀오신 분들도 있고 또 마음으로만 동참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보면 평소에는 몰랐지만 과연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식구들이니까 우린 두 번 난 사람들입니다. 한번은 각 사람은 자기 부모가 낳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이 있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믿고 새로 태어나서 영으로 한 식구가 된 동기간입니다. 그런 뜻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태어난 동기간들입니다. 동기간 아닌가? 형제자매란 말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두터운 이가 동무가 아닌가? 갑자기 어려운 일 당하여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주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간 아닌가? 그런 말씀, 그러니까 우리 한집 식구기 때문에 귀로 들었더라고 소식을 들어서 알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오 장로님 오셔서 말씀하시는 시간이었지만 여기 도착 못하신 뜻도 이 장로님이 지키시던 동산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이어서 거기 계십니다. 이 장로님 계시던 그 동산에서 오늘 지키고 계십니다. 이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자기가 죽은 다음에 돌아가신 다음에 거기 누가 와서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 계시면서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 자체가 동기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들로 태어난 사람들로서 한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요. 



 




 금년에 저는 잠언 17장 17절을 우리들 생활요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자꾸 우리가 그런 말 듣지만 우리들은 역시 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처음에 모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다시 들음으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선생님이 아주 젊은 나이에 40대에 생명이 위독했었습니다. 이 동산에 계셨고 그때는 식구들이 거의 10대 20대 아주 젊은 분들이 여기 사셨지요. 그런데 임종이 가까우실 때 말씀도 못하셨지만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임종을 기다렸지만 임종이 안 되시고 다시 돌아오셨지요. 그다음에 하신 말씀이 물론 나는 하늘나라로 가는 사람이지만 그때 이 동산에 남아있던 10대 20대 젊은 사람들이 먼저 간 죽음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도저히 나로서는 못 견디겠다. 라는 거예요 그걸 보여준다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 행복하게 사는 젊은 나이에 있는 아주 영적으로 어린사람들인데 내가 어떻게 동산에서 죽느냐? 하늘나라에 가냐? ‘나 좋 자.’고 따뜻한 방에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그렇게 결심하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리산으로 들어 가실까도 생각했지만 길이 안 열리고.



 




 거기 걸인굴이지요. 걸인들이 사는 굴속으로 들어가서 임종을 기다렸어요. 그 참 동기간의 사랑이지요. 꼭 옆에서 간호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 영혼을 사랑했으면 젊은 사람들 가슴에 그 섭섭한 아픈 상처를 주면 안 되겠다 싶어서 홀로 그 깊은 동굴 굴속에 들어가서 임종을 기다렸던 마음 그 얼마나 따습습니까? 큰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밖에 있더라도 자기 부모형제 친척 옆에서 간호 받고 죽는 것을 좋게 생각해요.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지 영적동기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육적 동기간들은 될 수 있으면 죽을 때 부모형제 사랑을 받고 싶어 할 테지요. 그러나 이 선생님의 한 핏줄이 되고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한 형제 된 우리는 영적 형제지간이기 때문에 영혼을 사랑해서 나는 먼저 하늘나라로 간다. 하지만 땅에 남아있을 사람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는 내가 이 죽음을 젊은 사람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아야 되겠다. 그 얼마나 차원 높은 사랑이겠습니까? 진정한 동기간 이지요.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꼭 무슨 유언을 한다. 또 임종을 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이방에 와계시지만 몸을 벗었어요. 이 선생님도 와계시고 서울 어머니도 와계세요. 영은 육을 벗어나 버리면 자유가 있지요. 또 이 장로님도 여기 와 계신 줄로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영이니까 안 통하는 데가 없으니까 물질세계에서도 우리가 그걸 알 수 있어요. 달에 가서 텔레비젼으로 보여줬거든요. 전기가 통하는 곳은 빛도 오거든요. 그림도 보여줄 수 있고 우주계에는 어디에든지 전기가 가기 때문에 몸은 서로 보여줄 수 있어요. 사진으로, 마음은 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요. 물질도 이 우주 안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면 영은 더 잘 통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와 계세요.



 



 자꾸 말씀드렸지만 우리들을 지도하시던 정 귀주 어머니란 분이 진도에 가서 사실 때 20년 살았다 하시지 않습니까? 그때 그 어머니도 아주 늙지도 않고 중년 40대, 그런데 선생님이 광주에 계시고 진도를 못 오시기 때문에 그 그립고 뵙고 싶은 말씀이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날마다 뵙고 싶고 선생님 계신 곳에 가고 싶은데 20년을 사시면서 항상 그리움이 있으셨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3월 18일 밤이나 되겠지요. 새벽에 그렇게 항상 그리워하며 허전하고 항상 젖 떨어진 애기같이 마음이 허전하던 마음이 딱 마음이 차면서 영혼이 사랑을 느끼고 평안했다. 그 참 기적 같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십몇 년 되었을 테지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행복할까?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사랑이 그득하게 느끼던가? 그 영문을 몰랐는데 한 일주일 후에 소식이 왔는데 이 선생님이 계명산에서 하늘나라 가셨다는 소식이 왔답니다. 그래 놀랬다 그래요. 꼭 그 시간이야. 이 선생님이 계명산에서 임종한 그 순간에 거기 찾아오셨어. 거기 진도를 찾아오셨단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따습게 하시고 그렇게 평생에 보고 싶던 그리움이 없어져 버리고 마음이 든든한 체험을 하셨다고 그 말씀을 하셨거든요.



 



 영이라고 영, 영이란 거 확실히 있어요. 옛날에는 전쟁이 있고 지금은 전쟁이 그쳤지만 어느 나라는 전쟁이 있지요. 아들을 외국에 보냈지요. 아들을, 그러니 엄마가 자기 아들이 전쟁에 있기 때문에 항상 걱정이지요. 항상 그럼 영이 통한다. 마음은 통한다. 그 말이 되겠는데 몸만 떨어져 있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사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있어요. 그래서 밤에 엄마가 잠을 잘 수 없다고요. 걱정이 되니까 총부리 앞에 있는 아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항상 기도하고 있지요. 도저히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마음이 불안해서 옛날은 전기 없는 시절이니까 등불을 켰겠지요. 호롱불 등불을 켜고 이제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지요. 철야기도, 내 아들이 전사되지 않도록 어려운 일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일선에 나갔다는 거예요. 그 총알이 왔다갔다하는 일선에 나갔는데 밤중이지요. 경비를 보고 있는데 등불이 자기 앞에 나타났어요. 밤중인데, 무슨 등불인가하고 쫒아갔지요. 자기 서있는 자리를 이탈해서 쫒아갔어요. 등불이 굴러서 없어져 버려요. 신비한 일이지요. 실제 등불이 아닌데 등불이 보였지요. 등불이 저만큼 가기 때문에 따라갔는데 그 순간에 자기가 섰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서 구덩이가 파여졌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실제에요. 영은 영으로 통하지만 몸이 있는 세상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고요.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 대한 그 지성스러운 사랑과 염려와 기도가 상달해서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들었던 등불이 그것참 신비한 일이지요. 그 아들의 바로 앞에 있었어요. 그 등불이 가요. 어머니가 산으로 가니까 신비한 일이지만 따라가다 보니까 그때 아들이 살아났다는 거 실제 그래요. 그런 이야기가 있고 그런데 몸을 입고 있을 때는 자기 있는 곳뿐이지요. 갈 수 없지요. 그러나 몸을 벗어버리면 영은 자유가 있다.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



 



 그 끝에 회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선생님이 임종이 가까워오던 밤에 약 한 하루 전이겠지요. 전부 20대에요. 선생님의 제자들이 아주 젊었거든요. 그러니까 임종이 다가선걸 알고 한 분 한분 방으로 들어오십니다. 멀리서서 들었지요. 같이 한방에 못 있고 하니까 뒷방에 서 듣고 했는데 선생님이 이번에 세상을 떠나신다면 저는 집으로 갈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니까 내가 덕이 없고 사람이 모자라서 한사람도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 그늘로 내가 이렇게 공동생활 했지만 선생님 없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서 살겠습니까? 나는 못살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나는 죽더라도 예수님이 여기의 주인이니까 이 공동체의 주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반드시 자매를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잘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실 겁니다. 그런데 뒷방에서 듣는 저는 그 말이 받아지지 않아요. 선생님 말이 위로하시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지금 보면 백발이 났거든요. 끄떡 안 해요. 그 영혼이 확실히 눈에 안보이지만 영, 영이 있다고요. 성령이 계시지요. 돌아가신 분들의 영이 있어요. 항상 도와줘요. 그런 뜻에서 우리 식구가 200이 넘지만 가까운데 이 많은 식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반드시 저는 믿습니다. 그 영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럼 정 원장님 와계시겠지요. 또 김 원장님도 가셨으니까 와계시겠지요. 몸은 벗어났지만 와계신 거예요. 그런 뜻으로 몸은 가졌기 때문에 내가 광주에 살면 서울 못가지요. 그러나 몸을 벗어버렸으니 여기에 오실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영계의 희망이고 영계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분명히 가시면서 그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절, 마태복음 성경을 쓰신 분이 그렇게 기록했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했느냐? 세상을 다 마치고 승천하실 때 약속을 하셨거든요. 28장 20절 인데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와서 계세요. 항상 성령으로 와계시거든요.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꼭 성경말씀이 아니고도 바울 선생님의 깨달음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사신다.’갈라디아 2장 20절에 그랬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는 믿음으로 하나 된 성인 성녀들 우리들의 스승 우리들의 어머니들, 대체로 동광원 초기에 계시던 어머니들이 지금 살아계시면 100살이 넘었지요. 90살 이상이지요?
 그 어른들이 한집 식구라고요. 모두 와 살림을 같이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도와주고 계세요. 그래 도와주지 않고는 아까 그 말씀한대로 선생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흩어집니다. 한사람도 마음이 안 맞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요? 그건 사람의 생각이라고 몸이 죽으면 떠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와 계신다고요. 같이 영으로 살기 때문에 이렇게 식구들이 하루하루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도움이 확실히 보여요. 누군가 몰라도 우리를 도와주고 계신다. 그걸 우리가 체험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래요. 모든 형편을 보면 사람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신기하거든요. 그걸 느낍니다. 



 



 그러면 어려운 일 당하여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주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간 아닌가? 살아있어서 도와줘야지요. 그러나 몸을 떠나서까지 라도, 영으로, 마음으로, 또 성령으로 그럼 동기간이라는 말은 어떠한 이친데 성령인데요. 확실히 이 말씀이 진리입디다. 일이 없다면 누가 친구가 와서 부모가 와서 도와줄리 없겠지만 일이 있으므로 도와주지 않아요?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세요. 태평하게 살 때야 자기혼자 잘살지만 곡절이 있을 때 어려운 일 당했을 때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줄라고 태어난 것이 예수 믿고 한 식구가 됐다는 것이 그 말이거든요. 서로 같이 울일 있으면 같이 울고 기쁜 일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그렇게 한 몸 한뜻이 되어있는 것이 동기간이다. 몸은 각각이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언 17장 17절은 우리가 예배시간이 끝나더라도 여러분들 가슴에 이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고 더러 늘 보십시오. 한번 따라 읽으십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두터운 이가 동무가 아닌가? 갑자기 어려운 일 당하여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주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간 아닌가?’잠언 17장 17절 말씀.



 



눈에 안보이니까 이렇게 해석 해야지요. 그럼 눈에 보이는 일도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그걸 영이시라고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성철 스님이 봤다는 기록이 그분 테이프를 보니까 있더라는 말 한번 드렸어요. 그분 육성으로 테이프를 해놨는데 일본시대니까 2차 전쟁시대지요. 그런데 그때는 세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가지고 싸울 때 아닙니까? 그런데 동양은 아니지요. 서양 저쪽인데 아주 젊은 수녀 한분이 일선에 뛰어들어 가지고 총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호를 해 준다는 말이에요. 죽어가는 환자들을 도와준다. 야전병원에서, 그러니까 소문이 크게 났지요. 그러면 서로 원수 저쪽 진영에도 수녀가 와서 간호한다. 그 소문이 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철 스님이 그걸 생각한 거예요. 그분도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상한 일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한쪽만 나타나야지. 아군에게만 자기나라 군대에만 나타나야 할 텐데 원수 적군에 나타나서 어떻게 도와주느냐? 그게 소위 말하면 일본시대 신문에 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수녀를 알아보는 분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아 저분이 성녀 소화 테레사다. 그래 자기는 불교신자고 스님이지만 천주교 어느 수녀가 양진영에 나타나서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를 고쳐줬다. 도와줬다. 라는 말은 영이라 이거에요. 그분생각은 무슨 종교와 관계없이 영은 몸을 벗어나면 있다. 그거에요. 그분이 테이프를 들어보니까 했습니다. 그분 테이프가 구할 수 있어요. 어디 부탁하면 한 다섯 개 있던데, 그래 어떠한 사람도 진리를 부인할 수 없지요. 사건 그건 특별한 일이고 꼭 그렇게 무슨 눈에 보이게 나타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영은 마음으로 오시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책을 좀 그 동안 같이 본 책이 있지요. ‘그와 나’라는 책에서 저는 저대로 어제 밤에도 새벽 한시에 일어나서 두시사이에 봤습니다. 저는 그전에 그 책을 병들었다는 핑계로 밤에는 불을 안 켰는데 그 책 사연이 그래요.



 



 기도하는 사람이 백 년 전 사람이니까 60년 전에 죽었고 불란서 사람이고 독신녀고 그러니까 자주 귀에 말이 들리면 자기가 공상인 즐 알았다고 내가 뭔 병들었나? 내가 왜 그럴까? 내 귀에는 쭉 하다가 나중에는 어찌할 수없이 부탁을 하니까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 써라. 그래 나중에는 그분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딱 그치시거든요. 말씀을 부르다 딱 그치시면 써봐라. 그러세요. 못쓰겠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도 자기 마음으로는 못써요. 자기 영역으로는, 그러면 내가 부탁하지만 너 보라고 이 글을 쓰는 것 아니다. 너도 봐야하고 인류가 다 봐야하겠다. 특별히 우리같이 이렇게 외로운 사람 소외당한 사람 병 든 이 그렇게 정신 고통이 많은 네 자식들 예수님은 자기 동기간 이니까 인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네가 써놓고도 네가 하루에 세 번은 보라고 그랬어요. 네가 새벽 밤중 오후 자기 전에 기도하는 시간에라도 이 책은  삼분이상 볼 필요도 없어요. 일분 이분 잠깐보지요.



 




다시 말하면 영적 교훈이니까 영적 부탁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 떠나신 다음에 70년 후에 썼거든요. 약 50명의 제자들이 그러니까 듣고 또 듣고 제자 직접 제자들이 썼으니까 글이거든요. 성경 말씀은 글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육성으로 하신 말씀을 글로 썼어요. 예수님의 말이거든요. 그렇게 믿는 사람은 그렇게 봐요. 그럼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세계 각국에 있어요. 우리 한국에는 늦게 왔지요.  몇 십 년 늦게 왔지만 많은 영적 교육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요. 저는 그걸 느껴서 여러분들이 성화를 사서 보면 꼭 문에가 이렇게 연줄이 뻗어 나온 문인데 그게 열리지 않은 문이거든요. 그 뒤에 딱 예수님이 서계세요. 그럼 요 문이 몇 년 동안 안 열렸냐? 이거에요. 와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한 십년 이십년 되었거든. 문이 안 열린지가. 그런데 그래도 문을 안 떠나시고 밖에서 서계신다. 그 그림이거든요. 그 원문이 이 책에 글이 있습니다. 성화에 있어요.



 



 벌써 이 책이 나 온지가 60년 전이니까 우리 손에 늦게 왔지요. 그러면 문간에 서서 그런 말씀이 나오더라고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에요. 문간에 서서 집안의 기척을 살피며 밖에서 기다리며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문간에 서서 집안의 기척을 살피며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말로 하지 않아요. 우리 입장에 서서 한번 생각해 봐라 이거에요. 문간에 서서 집안의 기척을 살피며 그분을 반가이 맞이할지 아니할지를 묻고 있는 분의 부름에 너희는 울 것이다. 그분이 밖에서 기다리며 서계신 것은 서계신 분이 예수에요. 이것은 대변하신 말씀이니까 내어 쫓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십년 이십년 문밖에 서서 못가고 혹시 문을 열어주지 않을라나 기다리는 예수를 한번 네가 생각해 봐라 이거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말씀이 나는 너희를 찾아와서 이렇게 되었는데 문이 안 열린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아라. 내가 밖에 와서 밖에서 기다리며 서있는 것은 난데, 내어 쫓김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그분이 기다리는 것조차 원치 않는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안 왔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로 불필요 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을 지금 이 시간 느껴요. 우리는 너무나 하늘나라 가신 다음에도 이 선생님을 (끊김)



 




 남은 몰라도 매사가 어려운 일이 부닥쳐요. 그러니까 항상 걱정이지요. 그래 이 선생님을 생각한 거지요. 직접 예수님을 본적이 없으니까 모르지요. 모르고 그럼 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결코 내 지붕 안에 들어올 수 없소.’라고 그들은 말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안 찾았으면 좋겠다. 그게 인간의 감정이에요. 오시면 참 여간 엄숙하지 않겠어요? 제안에 오시면 그들을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한 그분을 그러나 그들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라고 말하면 예수님 쪽이 불쌍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항상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 쪽에서 이 불쌍하고 외로운 나는 사람의 아비들과 함께하는 기쁨을 그때는 누린다. ‘아 예수님 황송합니다. 들어오십시오.’‘제가 너무 무정하게 했지요. 용서하세요. 들어오십시오.’마음 문을 열어드릴 때 얼마나 예수님 쪽에서 기뻐하신다. 전권 후권 있는데 이건 전권 99페이지에 있는 것이고  또 후권 121페이지 121쪽이지요. 그럼 문에 관한 말씀이 거기 있는 줄 알았어요. 한 20일 전에 어제 밤 새벽에 여기 오려니까 새벽에 깨어났거든요. 아 내일 가서 뭔 말씀을 드려야 할까? 기도하고 느꼈어요.



 



 121쪽인데 10일 나는 이 문을 두드린다. 예수님의 음성이거든요. 마음을 딱 닫고 있으니 마음이 답답하지요. 마음을 싹 열면 마음이 시원하다고 말씀하시니까 나는 이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네 자녀들을 필요로 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네 하나님의 사랑은 너희들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는 목마르다는 말을 기억하느냐? 이 말씀, 예수님이 아까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나는 목마르다. 십자가상에서 그 말씀 하시지요. 나는 목마르다. 이런 말도 많이 보면 감당이 안 되어요. 이건 같이 모였으니까 봅시다마는 나는 네 문을 두드린다. 아주 마음을 비었을 때는 눈물겹지요. 예수님이 내 문간에 오셨다. 찾아오셨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네 자녀들을 필요로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뭐 예수님이 우리가 필요할까? 우리식구들이 뭐 우리들이 특별히 우리 방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 공동체 안에 있는 식구가 방방이 있지요? 그러나 어느 방에 누가 밤잠을 못자고 아파하냐? 예수님은 거기를 찾아오시는 것 같아요. 그 방을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으신 거지요. 항상 그러신 것 같아요. 나는 오해받기 싫다. 건강하고 잠자는 사람을 내가 뭐 하러 찾아 가냐 이거에요. 내가 몸이 불편하고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하는 사람 내가 찾아가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사람 쪽에서 그걸 이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내 하나님의 사랑은 너희들이 필요로 하는 사랑이다. 나는 목마르다는 내 말을 너희들은 기억하느냐? 나는 항상 목마르다. 24시간 그러니까 예수님의 심정을 바꾸어서 이 선생님을 봐요. 가사 이제 하늘나라에 가계시지요? 정 원장님 또 김 원장님 그렇게 같이 살았던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요. 누구든지 그러니까 그러면 몸을 벗었으니까 평안히 하늘나라에 사느냐? 그렇지 않아요. 항상 못 도와 주셔서 항상 도와주시려고 뭔 말을 하셔. 어찌되었든지 그것이 일상생활에 가서 오늘이나 내일 느껴보세요. 확실히 도와주십니다. 만일 네가 이 갈증, 사람들의 갈증보다 한층 더 심한 이 갈증을 안다면 너는 그것을 갈아 앉히기 위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 내리라. 그래서 나는 네 제 때문에 또 누구한테 야속한 말 듣고 슬픔 고통 할 때 너무 무정하다. 세상에 나를 이렇게 박대하다니 박대를 당했을 때도 몸이 아플 때 아플 때 탁 문을 두드리세요. 나는 여기 있다. 문을 열어라. 나는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너는 사하라의 열기를 아느냐? 사막  비가 많이 와서 저쪽에서는 홍수가 난다지요? 날이 뜨거우면 수증기가 올라와요. 바다 물이, 그래 비가 많이 와요. 사막도 나보다는 덜 뜨거울 것이다. 사막을 우리가 맨발로 걸어간다면 우리가 발이 데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목말라 하시며 갈증 나는 거 차라리 사막도 나보다 덜 뜨거울 것이다. 너는 내 목마름을 이해하느냐? 이 선생님을 저는 봐왔기 때문에 이해가 되요. 그럼 본인도 병들어서 몸이 약하지만 또 하루 한 끼를 잡수시기로 결심한 이상 아침부터 배고파하시거든요. 뭐 배가 부르니까 안 잡수신 게 아니에요. 아침부터 뭔가 먹고 싶어 그러신다 이거에요. 그렇게 이해하세요. 그럼 잡수십시오. 그럼 내가 이걸로 배를 채워버리면 많은 사람이 배고프지 않느냐? 많은 사람이 위로가 없어져 버려요. 식구가 많으니까 내가 아침을 안 먹고 배고파도 밥이라도 기다리는 것은 많은 사람을 배불리기 위해서이다. 영적으로 말이에요. 그 말씀 하셨거든요. 그러면 목도 마르지요. 물도 먹고 싶고 그건 육체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셨는데 너는 내 목마름을 이해하느냐? 식구가 백 명이면 한사람쯤 누가 아프면 모른 척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는 아픈 사람은 없었어요. 식구들이 다 젊은 구도자들이니까 건강하거든 한사람이 마음이 시험이 들면 그날 밥 못 잡수시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저녁에 굶었단 말을 듣고 저녁에 와서 회개하거든. 그 제자가 와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요번에 집에 안가기로 했어요. 염려마시고 식사하세요. 그럼 식사를 곧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곧 또 딴사람이 들어온단 말이에요. 식사 할라는데 또 무슨 비보가 들어와 뭐가 어째서 요새 마음이 아파서 아침 굶었다고 딱 수저를 놓아 버리신다고요.



 



 그러니까 일 년 열두 달 항상 비상시에요. 그분이, 식구가 많으니까 날마다 슬픈 이야기가 들어와. 그러니 밥 잡술 마음이 없다고요. 실상은 그 변통은 정 원장님한테 또 왔어요. 정 원장님이 살림하실 때 걱정 소리를 누가 하면 밥을 못 잡수시거든. 우리가 지혜가 없었어요. 말씀 안해야 하는데 밖의 일을 말해 버린다고, 그럼 밥 못 잡수세요. 하루 이틀 열흘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밥을 먹어요? 마음이 아픈데 그만큼 목말라 하신다고요. 참사랑은 목이 마른 거예요. 이건 상식이 아니에요. 진정한 사랑은 목이 말라요. 너는 사하라의 열기를 아느냐? 사막도 나보다 덜 뜨거울 것이다. 너는 내 목마름을 이해하느냐? 너희는 나를 알기를 내 마음에 들고자 애쓰기를 내 처참한 고통들에 대해 감사하기를 게을리 한다고 생각지 않느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받았던 모든 모욕과 증오에 대해 너는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 많이 들었어요. 십자가 지기 전에 매 맞고 얼굴에 침을 받고  손으로 뺨을 때리고 갈대로 후려치고 가시관을 주께 씌우고 그걸 다 알고 있어요. 이 말씀이 참 눈물겹다. 나는 피신 할 수도 있었어. 그 꼴 안 당하려고, 한 3일전에 아데네 사람들이 왔어요. 자기 나라로 가자고 그때 시험을 많이 받으셨지요. 그때 도망갈 수 있었어요. 피신할 수 있었는데 그때 무슨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2장 34절 ‘밀알이 한 알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그때 설교하시고 피신 안 갔거든요. 그 확실해요.



 



나는 피신할 수도 있었으나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치욕을 감수하며 내 자신을 내어주었던 이 마음을 너는 알 수 있겠느냐? 내 사랑을 네가 알 수 있을까? 기꺼이 고통을 받으러 나간 것은 내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져야겠다. 결심하시고 도망간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의 사랑이다. 내 사랑이다. 사랑이 자기 몸을 죽인 것 아니에요? 사랑이 그렇지요. 너는 내가 최소한 네 의견을 가질 권리에 대해서 충분한 값을 치렀다고 생각지 않느냐? 예수님 우리사랑 받아 가셔야지요. 너는 강도가 당신의 왕국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십자가상의 옆에 오른쪽 왼쪽에 강도가 한쪽 강도가 그랬지요. 당신의 왕국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알고 있어요. 나도 네 삶에서 나를 기억하라. 그러니까 예수가 곧 죽지만 강도가 먼저 죽었는지 몰라요. 늦게 죽었는지 그때 기억해 달라. 그 심정 너도 나를 기억하라. 주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특별히 앞에 계신 분들 ... 예수님 나를 기억해 주심시오. 자꾸 그 말 하라는 거예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네 삶에서 나를 기억하라고 내게 말한다. 나를 마음의 중심에 등대처럼 두라. 그렇게 말했어요. 캄캄한 밤중에 촛불 켜놓으면 등대지요. 밤중에 복도에 불하나 켜놓으면 그것도 등대지요. 바닷가에 등대를 켜놓는 것 같이 나를 네 마음에 등대처럼 두라.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온기를 주는 등대처럼 이렇게 말씀했다고요.



 



네가 어디에 가든지 거기에는 내가있다. 제가 오늘 새벽에 여기 오기 전에요. 이 말씀을 해야 쓰겠다고 준비한 데가 많아요. 다른 말씀에서 다 포기했어요. 다 옛날 준비한 것 포기하고 이 말씀을 새벽에 주셨으니까 여기 같이 가서 읽어야겠다. 하권 122페이지 보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내가 있다. 우리가 예배 끝나면 자기 처소로 가지 않아요? 거기에 예수님 따라 가세요. 영이시니까 각사람 거기에 예수님 계시니까 네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는 내가 있다. 네가 나를 찾아 구할 때 나는 이미 거기에 있으며 네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먼저 사랑하고 있다. 우리 쪽에서 백 년 만에 하루라도 예수님 사랑한다고 합시다. 예수님 쪽은 백 년 전에 와서 사랑하고 계시니까 나는 네 원천이다. 그랬어요. 마음의 뿌리 란 말이에요. 전주에 계신 이목사 한분이 계시지요. 이 목사님이 동광원을 안다는걸 그렇게 표현해요. 동광원이 뭐냐? 적어도 이 강산의 옹달샘이다. 그분은 그렇게 아시거든요. 그분이 희망을 품었다 이거에요. 그분이 절망하고 있을 때 동광원을 알고 희망을 품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캄캄해도 옹달샘이 있다. 동광원 거기가면 막 원천 물이 시작하는 곳이 있다. 물이 나오는 곳 물이 몇 방울 안 되어 똑똑 쪼끔씩 나와요. 그게 원천이거든, 동광원이 원천이다. 그걸 발견하시고 아 이 세상을 내가 살아야겠다. 희망을 품었다. 그러시거든요. 그래서 그 목사님의 생각은 자기가 죽기 전에 이 현필 선생의 전기를 한번 자기 나름대로 써야겠다. 그 사명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 분이 있어요. 그럼 예수님으로 말하면 내가 네 원천이다. 내가 네 옹달샘이다. 이 말이지요. 내가 옹달샘이다. 누가 옹달샘을 좋아합니까? 뜻있는 사람이 좋아하지. 아주 깊은 산속에 물이 쪼금 나오는 곳은 다 없어집니다. 큰 강을 좋아하지. 기쁨과 단순함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내게 돌려달라. 그러나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너무나 적다. 그 수가 너무나 적어요. 아 예수님이 나의 원천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귀해요. 예수님의 말을 빌린다면 내가 올 때에 나를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수효가 적다는 거예요. 너무나 적다. 그러니 이제 내게 말해다오. 내가 예수님 이지요. ‘내가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린다.’라고 예수님 내 문을 열어주세요. 다른 집에 가지 말고 내 문간에 오세요. 내 집에 오세요. 이렇게 말하라고 내가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아팠을 때 혼자 아프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 도와주세요. 그렇게 하고 아파라는 거예요. 내가 반드시 그 마음에 위로를 줄 것이다. 확실히 살아계신 예수라는데 현존하시는 예수, 현재 살아계신 예수, 현존하신 예수, 현재 여기계신 예수 현재 여기 계신다, 살아계신다. 그런데 요 말씀 책을 너무 많이 봐버렸어요. 새벽이나 밤이나 잠깐 보려면 두 줄만 보면 되겠습디다. 두 줄, 그러니까 이 말씀이 원체 깨끗해서요. 그 한 줄을 가지고 글을 만들면 책 한권이 되요. 가사 ‘나는 네 원천이다.’그 말을 가지고 말을 하면 책이 몇 권 나오지요? ‘동광원은 옹달샘이다.’그럼 앞으로 그 목사님은 시작이고 물이다. 뜻이 깊지요? 나는 원천이다. 내가 문을 두드림을 기다린다고 말하라.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우릴 찾아오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고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 듣기를 좋아하신다 이거지요. 그런 말씀 그러니까 네 삶에서 나를 기억하라. 새벽이나 밤이나 잠잘 때나 깨어나 있을 때나 실지 생활에서 나를 기억하라. 그럼 이 글을 쓰신 분을 책을 보면 나와 있는 것은 기차에서 강가에서 또 극중 연극하는 배우니까 연극 중에 언제든지 예수님이 찾아오시거든. 그러니 경건하게 예배 보는 시간이 아니에요. 길가에서 누구를 만났을 때 어느 날은 얌전을 빼고 기도를 하고 있어. 기도 빨리 끝내라. 그러시거든. 그래 이해를 못해요. 기도하는데 왜 못하게 하실까? 곧 나가보면 누가 기다리고 있어.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당신을 얼마나 찾았다고 어디계신지 몰라 찾았다고. 그럼 예수님이 아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가? 속히 가야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고 나는 기도 못해서 어쩔까? 예수님 나타나세요. 좋다, 너 일하고 있는 것이 나와 대화 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 밥하고 있고 국 끓이고 있고 그 자체가 나와 있지 않느냐? 이거에요. 나 먹으라고 네가 있지 않니? 여기 이 불쌍한 식구가 바로 나다. 직접 말씀 하세요. 무슨 일을 보든지 아이고 여기는 세속 속되니까 빨리 가서 예배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지금 나는 네 옆에 있다. 네가 나를 기억하고 그 일하라. 예수님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 말 들을 때 제일 눈물겹도록 반갑다. 이거에요. 혼자하지마라.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착실하면 나를 버린다 이거에요. 자신만만해 가지고 네가 좀 실수를 해야 네가 아쉬운 시간에 나를 부르지 않느냐? 그거에요. 실수할 때도 사랑스럽다는 거예요. 실수할 때 쭈루룩 미끄러졌을 때 그런 말씀을 명상을 같이해서 감사합니다. 한번 따라 읽을 말씀입니다. ‘네 삶에서 나를 기억하라. 나를 네 마음의 중심에 등대처럼 두라. 나를 네 마음의 중심에 등대처럼 두라. 나는 네 원천이다.’우리가 이 말을 듣기에 참 황송하지요. 마음 준비가 덜 되었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사람 만나지 않고 혼자 있는 새벽에 라면 가능해요? 말씀이 아직 사람 안 만났으니까 새벽에 밤중에 그렇게 명상할 수 있는 요령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네 문을 두드린다.’그 말씀 따라해 보세요. ‘나는 네 문을 두드린다. 나는 목마르다.’이런 말씀은 그말 한자리 때문에 성녀 된 사람 있잖아요? 소화 테레사는 나는 목마르다. 그림 보다가 그 말 들었어요. 식당으로 가는 복도에 그림이 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가시관 쓰시고 죽으시면서 ‘나는 목마르다’그림을 누가 그려놨어? 복도에다가, 그런데 밥 먹으로 가다가 딱 뛰어가다 그 그림을 보고 어찌 가슴이 사무치고 아픈지 예수의 목마름을 나는 왜 몰랐던가? 그때 ‘나는 목마르다.’그걸 깨닫고 자기가 죽을 때 까지 그 음성이 마음에 남더라 그거에요. 말씀을 많은 말 필요 없어요. 한 말씀만 가슴에 들어오면 그게 원천이지요. 생명수 옹달샘 말씀의 옹달샘 얼마나 뜻이 있습니까? 동광원은 이 사회에 있어서 옹달샘이다. 그렇게 보신분이 이 병찬 목사님이십니다. 그래 성가에서 ‘아름다운 저 천국’을 불렀지만 그것도 이번에 가신 어른들을 생각해서 부르자고 했고 ‘산곡에 백합화’우리는 이제 이 장로님, 서울 어머님 우리는 그곳까지 못 가봤으니까 그런 어른들 하늘나라 가셨으니까 같이 마음을 드린다. 사랑을 드린다는 뜻으로 같이 부르십시다.  ‘산곡의 백합화’.




HTML모든 것의 모든 것


* * 모든 것의 모든 것 *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한없습니다.


1고린 13:7 현대어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현대어).



* * * * * * * * * *



- - * 소화의 기도 * - -



사랑으로 살다


사랑으로 죽는 것!


나의 희망 오직 이것뿐!


임의 사랑의 불에


내 마음 타고 싶어라


임과 함께 보고 싶어라


언제나 또 언제나


임과 함께 살고 싶어라


이는 나의 큰 기쁨!


나 사는 뜻이어라!


오! 사랑을 사는 것!



2010/04/03 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