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09년 8월 동광원 수양회때 김준호선생 말씀입니다.
동광원의 사명
김준호
성경
고후 11:1-3, 요일 3:1-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하시는 것은 깨끗함이요 거룩한 생활입니다.(밷전1:13)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막8:38) 갈대같이 흔들리는 인심에 속고 절망하여 울던 사람에게는 절대순결하신 예수님을 나의 정배라고 불러질 수 있는 자기 참회와 새 출발의 희망을 그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 성 프랜시스, 파스칼,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사랑에 안심하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늦게야 후회 통회함보다는 아이 때부터 순결을 절대시하여 성인의 반열에 서도록 몸과 영을 깨끗이 하라고 성경은 간곡히 외치십니다. (마5:27-30,마18:8,고후7:1)
고후 11:1-3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시는 것처럼 나도 염려한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정배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는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요17:14-16, 요15:18-19, 요8:23,요일 4:5)
만일 어떤 처녀가 예수님을 정혼한 애인으로 서원했다면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애인 격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것인데 다른 피조물, 남자, 자아를 사랑한다면 더러운 여자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뜻으로 절조 없는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약4:4)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면 음부(淫婦)라고 못 박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는 영혼의 순수성을 잃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영혼의 순결성을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허허해도 빚이 천 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 보기에는 가장 세상 밖에서 사는 듯 정절이 굳은 동정녀, 동정자이더라도 참 애정이 남아있고 세상만물에 대한 애착이 숨어있다면 그는 빛 좋은 개살구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세상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기도는 듣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사랑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깨끗지 못한 이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 밖에 있다,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곧 계명인 진리의 성신께 충성하여 그리스도의 성령이신 순결한 마음에 평화의 안정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곧 세속에 대한 집착의 해탈이요 사람에 대한 애정의 정화를 받아 자유를 얻은 영혼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곧 세속에 대한 허영과 욕망을 이기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이긴 사람 마음속에 작은 천국이 건국되기 때문입니다.(눅17:20-21, 갈2:20, 요일2:15-16)
그렇다면 지옥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세상의 허영을 이기지 못하고(엡2:25) 자기 육정을 이기지 못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의 행복도 낙원도 천국도 다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산제물이 되며 정과 욕을 못 박는 사람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는 절대의 정절을 성스러운 임께 봉헌한 절대의 처녀의 체험은 곧 자기의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한 제물이 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체험되는 사랑의 낙원 속에서 성스러운 임께 대한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움이 돋아납니다.
동광원의 신앙 감정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바친 순결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 감정이 생활화 되었으며 인격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신앙양심은 곧 절대 순결, 절대 정절, 절대 동정에다 주춧돌을 놓은 것입니다. (요일3:1-3) 신앙의 표준을 예수님의 순결성에다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떠한 윤리 관계로 맺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주관이 서게 될 것입니다.
신앙중심사상이 경제생활을 생명화한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화복의 왕으로 보고 축복이니 십일조 같은 의식을 절대화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경우는 순결이 절대 생명인 만큼 자기 순결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재산이 없는 것이 더 축복이요 몸에 병듦이 축복입니다.(고후4:6-15)
자기의 영혼이 밝아져서 순결하게 사는 것이 옳다고 깨닫게 된다면 흥망성쇠의 모든 것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됩니다.(로8:28) 그래서 여기에 청빈(淸貧)사상이 제창되고 순결(純潔)과 순종(順從)사상이 깃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급자족(自給自足), 희생(犧牲) 봉사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순결을 절대시하는 신앙은 자연히 선악과를(따먹었다는 것은) 처녀(處女)성 상실이요, 동정(童貞) 상실이며 순결성(純潔性) 상실로 봅니다. 선악과의 신비를 어떻게 말했든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절대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칩니다. 곧 동광원에 모여든 적은 무리들에게는 정절사상을 맡기신 것이요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神秘)입니다. 너희들은 순결로써 이 혼탁하고 음란한 세상을 비추라고 등불로 택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주 예수님의 성심(聖心)의 발현입니다. 맡은 이는 충성이 제일입니다.(고전4:1-2, 롬 16:25-26)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은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번민하는 현대인의 상징을 든다면 마치 삼손이 드릴라 에게 홀린 상태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삼손이 드릴라에게 지극히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하나만 있는 목숨과 같은 그 숨은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조물의 대표적 미인, 땅과 흙인 얼굴의 유혹에 흘리어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의 사랑을 헌 신짝 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육의 사랑을 위하여 영의 사랑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에로스의 사랑을 갖기 위하여 아가페의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창조주의 사랑을 피조물의 사랑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람의 저주로 바꾸며 하늘의 빛과 힘을 땅의 빛과 힘으로 바꾸고 심령의 행복을 육정의 행복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과로 삼손은 눈이 빠지고 구리줄로 몸이 묶이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으니(삿16:21) 그는 곧 육이라는 옥중에서 번뇌하는 영을 가진 현대인의 심령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믿어서는 안 될 거짓이요, 함정이요, 불완전한 사람인 상대자를 절대자로 바꾸어서 믿었습니다. 마치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듯이 말입니다. 아담도 역시 믿지 말라고 주신 불완전한 상대자를, 믿어서는 안 될 하와를 절대자의 대상으로 신임했을 때 그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마에서 땀이 흐르도록 땅을 파야만 했으니 몸 안의 감옥에서 흙인 지구라는 맷돌을 돌려야만 했던 영적 장님이 되었던 것입니다.(창 3:19)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는 절대자인 아버지의 하나님만 믿고 사람인 불완전한 것, 흙의 아름다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을 이를 바로 믿고 못 믿을 이를 믿지 않음으로 참 길을 바로 간 것입니다.(요 2:23-25)
현대인은 영보다 육을, 덕보다 돈을, 정신보다 물질을 바꾸어 믿고, 오히려 믿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선후를 바꾼 것이요 천리를 반역한 것이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사를 부정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제자들도 현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 보다 미인을, 영적 정신적인 평안보다 육의 안일을 바꾸어 믿음으로, 마치 영원한 정신적인 축복을 한 끼니의 팥죽으로 바꾸어 삶의 쾌락을 누린 에서와 같이 그 결과는 번뇌에 빠질 것이 필연적 법칙입니다.
그 번뇌하는 마음 상태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눈을 뺏기고 맷돌질하는 옥중의 삼손을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며 땅을 파는 아담을 그릴 수 있고, 입가에 팥죽이 마르지도 않은 채 슬피 우는 에서를 그려봄이 마땅할 것입니다.(창26:8)
그리고 현대화를 그린다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미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청년을 그릴 것이며, 바벨탑을 오르려고 허공을 바라보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꿈 많은 어린 학생을 그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린다면 감투를 쓰려고 경주하는 해골같이 무서운 종교인과 정치인을 그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서 하늘가는 사람들은 그 같은 미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드릴라식의 미의 향연에서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의 미궁에서 벗어나 영의 낙원으로 탈출하는 그 마음의 상징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깊은 밤중에 바로의 왕궁을 탈출하는 그 비장한 모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출 2:15 히 11:24-26)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는 현대의 청춘들은 삼손의 눈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그림에서 비참한 자기를 발견하고 또 모세의 미디안 골짜기를 비추던 밤중에 움직이는 등불을 보고 자기의 갈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대는 눈 빠진 삼손으로 살기 위하여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모세로 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번민하는 현대의 청춘들이여, 과연 그대는 어느 줄에 서겠습니까? 삼손입니까? 아니면 모세입니까? 삼손과 같이 한 때 황홀한 맛을 보자고 불속에 덤비는 불나비처럼 타죽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영원할 안식을 위하여 잠깐인 현세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겠습니다.
동관원의 시대적 사명
순결의 등불은 이 시대의 시대적 사명입니다. 전 세계와 동족이 살의 향락과 음란의 홍수에 떠내려가는 이때 절대 순결의 등불은 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음란의 홍수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방주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해골같이 병든 약한 몸을 이끄시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신 이유는 종로 사거리에서 ‘음란과 사치로 이 세상이 망할 것이니 회개하라.’고 외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음란이 충천할 때 당시 하나님은 노아 홍수로 벌하셨고 음란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는 불로 벌하셨습니다. 음란한 이 시대의 말세를 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벧후 3:8-15 사도는 거룩한 생활과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정절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둘째는 지도자를 바로 만남이요 셋째는 자기가 자원하고 믿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결생활은 첫째, 자기의 완성이요 둘째, 이 세상의 정화입니다. 정절은 이 시대를 구원하는 질서요 생명이요 길입니다. 순결은 세속주의의 홍수에 휘말려 들어가는 종교계의 소금입니다. 절대 순결의 가르침은 미신화 되어가며 혼음종교로 전락해 가는 종교계를 정화하는 소금입니다. 순결의 거울은 곧 인격의 표준을 잃고 금수(禽獸)화 되어 방황하는 인류를 참된 인격으로 회복하는 비밀이 감추어진 진리요 씨며 신비한 약입니다. 순결의 가치관은 여기에 있으니 절대 완전한 인격이신 성인 성녀의 벗이 됨에 있고 자기 영혼의 평화요 나아가 전 인류의 평화요 천국으로 가는 깃입니다. 거룩하신 임과 친교하는 수단입니다. 절대 순결의 완성은 곧 에덴의 회복이요 천국의 회복입니다.
동광원의 사명은 겸손히 정절을 지킴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는 길에 소망이 있습니다. 소금이 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길로는 다 실격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신부도, 목사도, 부흥사도, 기적도, 돈도 없는 작은 무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절을 봉헌으로써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할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선생님은 적은 것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은 곧, 정신적인 순결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과 몸을 제물로 맡겨버리고 남은 여생을 지극히 작은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름도 없이 소리도 없이 고요히 소금과 같이 녹아져서 순결한 제물이 되어 아담 하와의 역사에 이바지할 유일한 길이 열려있습니다. 이 신비한 소금의 비밀은 고요히 녹을 때 만물이 썩지 않습니다. 바로 이 소금은 순결한 인격입니다. 이 순결한 소금이 녹을 때 민족의 멸망을 막고 전 인류의 멸망을 막습니다. 이 순결의 근본정신이 설 때 그 민족과 인류는 질서가 서고 종교가 서고 양심이 서고 인격이 서고 평화가 옵니다. 참 사랑은 순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조 강한 성인 성녀들이 꼭 학자이며 건강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무식한 마리아 코리띠 아네스 세시리라 등이 배움이 없었고 순수한 자연인이었으나 성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무학하고 병약한 이세종, 이현필 스승의 뒤를 이어서 정절의 씨를 가꾸어 방방곡곡에 뿌려서 예수님의 깨끗한 사랑의 길을 냅시다. 남녀가 다 같이 천사처럼 깨끗이 살 수 있는 복된 소식을 전합시다.
무학하고 약해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 씨를 뿌릴 수 있다는 이 소망은 안심을 줍니다. 정절은 세상 학문이나 육체의 건강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성령의 은총으로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절은 은총을 믿으면 섭니다. 정절은 가장 거룩하신 인격 예수님을 빼앗을 비밀입니다. 우리는 정절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를 위한 절대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타락했던 막달라 마리아도 은총을 믿는 그 시간부터 새 출발의 소망이 약동했습니다. 중생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라아, 성 어거스틴의 모범을 따라 일어섭시다.
[특집]한국의 기인·괴짜 10인 열전
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맨발로 밥을 빌어먹으면서 걸인들의 친구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김준호씨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다. 그가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걸어온 삶은 쾌락과 안락과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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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 ||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더라’ ‘농사 지으며 길쌈을 하는 등 먹거리와 입을 것을 자급자족한다더라’ ‘평생을 채식하면서 독신으로 살고 쥐나 이도 죽이지 않는다더라’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다더라.’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1월10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이한 삶’의 주인공을 만난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은 넘어보이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큰절을 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닌 오북환 장로(吳北煥·92)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金俊鎬·75)이었다. 이 두 노인의 현직을 구태여 따지자면 오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선생은 귀일원의 이사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사는 공동체다. 지난해 최우수 정신요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두 노인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자선사업가들인가? 귀일원이 생긴 독특한 내력을 살펴보면 두 노인이 단순한 의미의 자선사업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엄두섭 목사가 쓴 ‘맨발의 성자(聖者)’란 책에는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이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현필씨는 직후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수도자들과 이들이 돌보는 과부, 노인, 고아, 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는데 동광원이 이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동광원이 바로 귀일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종교계에서는 귀일원보다 동광원으로 불린다. 64년에 타계한 이현필씨의 제자는 전국에 50명 정도 되는데 경기도 벽제, 전북 전주·남원·장수, 광주광역시, 전남 화순·함평·진도·비금도·보길도 등지에서 순결 청빈 순명 정신에 입각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구도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자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독신으로 살며 살생을 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약 대신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오북환 장로는 이현필씨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김준호씨는 이현필씨가 가장 아끼던 수제자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준호씨가 스승인 이현필씨의 인품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던 중 밤에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씨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 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이현필씨를 만나러 무작정 광주에 갔지만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이현필씨를 만날 수 없었다. 김씨는 광주에서 거지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광주 YMCA에서 이현필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준호씨는 그때부터 이현필씨의 문하생이 됐다. 입문식은 밥을 빌어 오는 일이었다. “6·25전쟁이 나기 전이었을 겁니다. 비가 장대처럼 죽죽 내리는 날 아침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보고 밥을 빌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맨발로 근처에서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부잣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어요. 한참 뒤에 새댁이 나와 밥을 주기에 빈손을 벌였더니 놋그릇째 가져가라고 해요.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새댁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밥을 들고 선생님께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맨발로 나와 저를 맞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때 선생님이 밥 먹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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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밑의 물고기를 건져라’ | ||
이현필씨는 김준호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제자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이현필씨와 김준호씨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어보면 마치 옛 선승들이 선문답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김준호씨가 광주 시내의 다리 밑에서 10여년간 거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이현필씨가 던진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동광원의 단조로운 공동체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나가버린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 선생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됐는지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라며 독백하듯이 말씀해요. 저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부랑아들과 함께 살라는 말로 들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동광원을 나와 광주 시내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동냥도 하고 이들이 병에 걸리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던 김준호씨는, 마치 가톨릭의 데미안 성인이 나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처럼 폐결핵에 걸렸다. 이현필씨는 김준호씨를 동광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스승은 제자를 직접 간호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는 데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니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동광원 공동체가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었다.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순회강연을 다니고 틈나는 대로 제자를 간병하던 이현필씨도 마침내 후두결핵염에 걸렸다. 서울의 아현동 굴다리 밑에서 사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희망해 서울에 올라온 이현필씨는 어느날 김준호씨를 서울로 불렀다. “아현동 굴다리 밑 걸인을 시켜서 굴비를 사오게 하더니 물에 넣어 끓이게 해요. 그리고 그 국물을 당신의 입속에 넣게 하셨어요. 제자 앞에서 파계를 선언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으로 아픈 제자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스스로 파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갔더니 저도 함께 입원을 시키더군요. 그리고 한달 뒤 선생님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다시 육식을 금하고 수도생활과 강연활동을 하시다가 6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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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폐병환자들과 살다 | ||
병원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씨는 광주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한 폐결핵 환자들은 이승의 마지막 쉼터로 무등산을 찾았다. 김준호씨는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임종을 지켜봤다. “움막은 계곡물이 흐르는 근처에 여러개 지었어요. 이들이 마지막 소원인 물을 실컷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이 된다면서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극진히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을 마시다 보니 병이 완쾌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무등산에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무등산에 있는 움막은 무등원이라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까지 20년간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동광원 공동체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며 보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가끔씩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들을 만나러 나온다. 스스로 새처럼 산다는 김준호씨는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스승인 이현필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준호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현필씨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그라고 입을 모은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연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독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냐’ ‘자식이나 손주가 없어 노년에 쓸쓸하지 않으냐’는 우문에 김준호씨는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돈은 한푼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생활했던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고 손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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