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독교동광원수도회 계화도유적지 답사기

mamuli0 2025. 9. 4. 07:21

 을사년 광복절 부안 계화도 동광원유적지에 다녀왔다. 광주에 사는 이영우씨가 작성한 답사보고서를 올린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 계화도 유적지 답사 보고서


답사지역 : 계화도(거처(수녀원)와 논)
참 가 자 : 방순녀 원장, 김종북 장로, 복태경 집사, 류미자 수녀, 이영우 
이    동 : 김종북 장로 차량 1대(운전: 이영우)
일    정 : 2025년 8월 15일(금) 10:00~17:00
   10:00  동광원 출발
   11:50  계화초등학교 도착(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233)
           계화리 거처 찾기(계화리 510-1․3․5․7 / 계화1길 29․27․25․23)
   12:30  계화리 논 찾기(계화리 2153-1, 2154-1, 2155-1, 2156-1)
   13:10  점심(계화농협하나로마트에서 빵, 우유 등을 사서 차에서 먹음) 
   13:30  계화농협하나로마트 출발(지지리 ‘바위목피정의집’으로)
   15:30  바위목피정의집 도착(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19)
   16:00  바위목피정의집 출발
   17:00  동광원 도착


 계화도 공동체

 계화도 간척지는 1965년 섬진강 댐이 완공되어 발생한 2,786세대의 수몰민을 위해 조성된 간척지다. 계화도는 본래 섬이었으나 계화도와 육지인 부안군 동진면을 잇는 제1방조제(9,254m)가 1966년, 제2방조제(3,556m)가 1968년에 완공되면서 육지가 되었다. 그 결과 방조제 안쪽의 간석지(干潟地)가 2,741ha에 이르는 광활한 농경지로 바뀌었다. 계화도 간척지는 완공 당시 광복 후에 조성된 최대의 간척지로 우리나라의 식량 증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섬진강 댐은 전북 임실군에 있는 다목적 댐이다. 댐은 당시 극심했던 호남지방의 전력난 해소를 위해 수력발전을 하고, 섬진강 물을 동진강 하류 지역인 김제·정읍·부안·계화도 및 임실군 하류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댐 건설로 전북 정읍시·임실군의 5개면 28개 리의 92.95㎢가 수몰되었으며, 운암저수지·옥정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갈담 저수지가 조성되었다.

 계화도 유적지는 노동으로 자립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동광원 공동체가 있었던 터전의 한 곳이다. 1972년에 계명산에서 양성반이 조직되고 오북환 장로님이 지도하는 성경 공부가 5차례 진행되고, 1978년 6회 성경공부반은 정규주 어머니께서 계시는 진도분원에서 진행되었다. 1979년 3월에 6회 성경공부반에서 공부한 이들이 오북환 장로님을 따라 계화도로 들어갔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갈월에서 살던 이재갑 장로님이 계화도 간척지를 매입하여 들어갈 때 오북환 장로님과 성경공부반이 함께 한 것이다. 초기 계화도 공동체 가족은 홍미숙, 노종순, 김순예, 옥과모, 복단모, 방순녀, 조사연, 박정순, 이영희(엠마누얼라 수녀), 류미자, 이재갑, 이분쇄(이재갑 장로 누님)(존칭 생략)으로 이분들이 계화도에서 공부한 7회 성경공부반이다. 이후에 계명산에서 박마리아 수녀를 비롯한 여러 여성 수도자가 들어왔고, 최경애도 합류하는 등 많은 수행자가 거쳐 갔다.

 공동체의 거처는 계화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이어져 지어진 4채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재갑 장로가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잿간은 오북환 장로와 류미자 수녀가 지었고, 담장은 하사문 언이 쌓았는데 그 브로크는 공동체 가족들이 만들었다. 창고도 지었다.

 공동체의 경작지인 간척지 논은 총 6,000여 평인데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 1/4은 방순녀의 모친인 지당 어머니(조경신)께서 구입하였다. 인천에서 살고 계시던 분인데, 계화도 공동체에서 잠시 사시다가 시댁이 있는 남원 주생면 지당리으로 가셨다.
 2/4는 이재갑 장로님이 구입하였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서 살던 이재갑 장로는 누님 이분쇄님으로부터 오북환 장로님을 소개받아 만난 후 세속적인 삶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오장로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배움과 실천을 하였다. 계화도 공동체에서도 오장로님의 지도하에 이재갑 장로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출가 전에 이재갑 장로는 빌딩을 한 채 갖고 있었다. 아들들이 이 빌딩을 팔아 그 판매 대금의 일부를 십일조 식으로 아버지(이재갑)에게 주었다. 이 돈이 계화도 간척지 구입비 등의 원천이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한국일보 국장(부인은 목사)을 지내는 등 살림이 풍족하였으나 둘째 아들(목사)은 가난하였다. 그리하여 가난한 둘째 아들의 아이(이재갑의 손자)를 계화도 공동체에서 돌보기도 하였다. 딸은 약사였고, 사위는 경북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4은 오북환 장로님 몫으로 되어있는데 구입비는 이재갑 장로님이 내셨다. 오장로님은 재물의 소유를 떠난 분이어서 그 땅의 등기는 수종하던 최경애 수녀의 이름으로 하였다. 오장로님은 동광원과 삶을 일치시킨 분이어서 이 필지는 동광원 몫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계화도 공동체가 해체될 때 팔아서 ‘부활의 동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소재) 터를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척 후 몇 해 되지 않은 간척지에서의 농사일은 만만치 않았다. 갈대 뿌리와 잡초도 많고, 논도 고르지 않았고, 염기도 많아 무척 힘들게 일해야 했고 소출도 적었다. 거처에서 논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경운기를 타고 함께 이동하였다. 경운기는 이재갑 장로가 운전하거나 이영희(엠마누엘라 소화수녀원 총원장)가 운전하였다. 한차례 경운기 사고가 있었는데, 다행히 사람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식사는 식사 당번을 두어 공동으로 했는데, 싸래기나 보릿가루 등으로 쑨 맑은 죽을 먹고 살았다.
 논농사 외에 토끼와 유산양 한 마리도 길렀다고 하며, 김준호 선생이 밀짚모자를 선물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계화도 공동체는 시나브로 해체된 것 같다. 일부는 1983년에 경북 영주 안정면으로 갔고, 일부는 남원 동광원으로 간 후 귀일원이나 지지리로 가기도 하였고, 환속하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까지 남아있던 방순녀(현 동광원 원장님)가 광주 남반으로 나오면서 계화도 공동체는 막을 내렸다.
 해체된 이유가 궁금하여 방순녀 원장님께 여쭸다.
 “현진이 교육 문제도 있고, 모시고 있던 노인들 아프면 병원이 멀어 불편하기도 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현진이는 고아였는데 당시 10세였다. 동광원 공동체에서 자랐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현재는 광주광역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모시고 있던 노인들이란 성경공부반의 노종순, 옥과모, 복단모 등을 말한다. 


 계화도 거처(집, 수녀원) 찾기
  
 계화초등학교 앞을 지나 기억을 더듬어가며 동광원 가족들이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들추신다. 
 “집 뒤편으로 차가 다녔어.”(방순녀 원장)
 “집 4채가 이어져 있었고, 담장을 우리가 쌓았어요. 잿간도 오장로님과 내가 쌓았고요.”(류미자 수녀)
 “앞으로는 바다가 보였어.”(방순녀 원장)
 “저 다리가 모양은 바뀌었지만, 내가 논에 갈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건너다니던 그 다리에요.”(류미자 수녀) 등등
 기억을 길잡이 삼아 골목을 돌아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옛 거처를 찾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어서 조금 낯설다. 단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 마을 여성분이 지나시기에 여쭸다. “예, 그 집이 수녀들 살던 집 맞아요.”
 계화도 동광원 공동체 거처, 수녀원을 찾은 것이다. 네 채의 집이 이어져 있고, 오장로님과 류미자 수녀가 지은 잿간, 직접 지은 창고, 브로크를 만들어 이어 쌓은 담장, 그 시절의 조립식 판넬집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겨울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어요.”(류미자 수녀)
수녀원을 찾아서 2

 “태풍이 불어 마을의 집들이 많이 망가졌는데, 우리가 지은 잿간은 어찌나 튼튼하게 지었던지 멀쩡했어요.”(류미자 수녀)

▪ 계화도 수녀원 주소 :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510-1․3․5․7

지번 주소
계화리 510-1
계화리 510-3
계화리 510-5
계화리 510-7
도로명 주소
계화1길 29
계화1길 27
계화1길 25
계화1길 23


▪ 사진 - 계화도 수녀원 찾기

수녀원을 찾아서 1
  
수녀원을 찾아서 3
 
수녀원을 찾아서 4


수녀원)집 네채 앞을 이어서 쌓은 담장
 
수녀원)잿간을 둘러보는 류수녀
 
수녀원)원형 그대로인 조립식 판넬집
 
옛집 앞에 선 류미자 수녀


 계화도 간척지 논(공동체 경작지) 찾기

 “논 옆에 시멘트로 만든 정자가 있었어요. 옆에 큰 수로도 있었고요. 영희 언니(이영희 엠마누엘라 수녀)가 우리를 경운기에 태우고 일하러 오다가 실수하여 그 수로에 경운기가 빠져버렸어요. 우리 논은 서로 이어져 있어서 제법 길었어요.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하면서 새를 봤어요. 영희 언니와 번갈아 가면서.”(류미자 수녀)

 말씀에 의지하여 간척지 사이사이로 난 길 따라 차를 천천히 운전하였다. 그 논배미를 찾았다. 집에서 약 3.4km 떨어져 있는데, 지번은 계화리 2153-1, 2154-1, 2155-1, 2156-1 총 4필지(필지당 1,500평)로 추정된다. 김종북 장로님이 걸어서 52분, 자전거로 13분, 차로는 4분 거리라고 하셨다.
 어언 40여 년이 흘렀어도 피땀과 정성으로 일궜던 터여서인지 그 논이라는 것을 그냥 알아보신다. 논을 둘러보고, 바라보기도 하면서 묵혀둔 인사를 나누시는 지도 모르겠다. 동광원 계화도 공동체 수녀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높고 귀한 뜻과 삶을 표현하는 듯 들판의 벼들이 조용히 일렁이고 높고 푸른 하늘로 하얀 뭉게구름이 평화롭다.

논을 바라보는 복태경 집사님
 
왼쪽부터)류미자, 방순녀, 복태경

 
 
 지지리 ‘바위목 피정의 집’ 그리고 마무리

 남원 동광원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아침밥을 먹어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방순녀 원장님이 주신 돈으로 류미자 수녀님이 빵, 우유, 아이스크림을 사오셨다. 차에 앉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지지리 바위목 피정의 집에 들르기로 하였다. 류미자 수녀님이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하고 차를 돌려 지지리를 향했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달렸으나 교차로에서 길 선택을 잘못하여 2시간이나 걸려 지지리 바위목 피정의 집에 도착하였다. 

바위목 피정의 집
 원장 수녀님과 마리아 수녀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계곡으로 가서 발을담구니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시렸다. 원장 수녀님이 오래 삭힌 야채효소를 내주셔서 마시고, 피정의 집 내부도 구경하고, 주변도 둘러보았다. 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지금은 시원하여 좋은데 겨울에는 어떠시냐고 여쭸더니 너무 추워서 피정의 집 운영을 중단한다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피정의 집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개방하여 운영하는데, 와 본 사람들은 꼭 다시 찾는다고 한다.
 원장 수녀님과 마리아 수녀님께 환대에 감사드리고 동광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마리아 수녀님께서 상추, 고추, 호박 등을 따서 싸주셨다. 
 “고맙습니다.”


 동광원에 도착하니 오후 5시였다. 오늘 답사 일정이 끝났다. 방순녀 원장님, 복태경 집사님, 류미자 수녀님, 그리고 김종북 장로님께 인사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