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무 이야기

무 말랭이 작업 :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

mamuli0 2022. 1. 19. 09:26

 대한 하루전 월동무는 건재하다. 일손과 채산성으로 수확하지 못한 월동무 포장과 말랭이 생산 작업장을 돌아보았다.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  

1982.06.20 정인세 원장 

 요한복음 14장 1절서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 하셨다. 당신들은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시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이미 그런 말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갑니다. 내가 가서 당신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돌아와서 당신들을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에 당신들도 있게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알았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각부터 당신들은 그분을 알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10절까지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몇 절 더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 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도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져 있는데도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고 당신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시오. 또 당신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 합니다. 하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29절까지, 

 


 여기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 그 거리가 얼마나 되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나?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가? 믿고 있는 줄 아는데 사실은 하나도 믿지 않는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열두 사도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의 행적을 통해서 간단히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그 동안에 제가 이 자리에서 베드로 사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두어 번 한 기억이 나고 사도요한에 대한 말씀을 했지요. 그리고 그 외에 사도들에 대한 건 별로 말씀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기회에 사도 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그럽니다. 도마는 보통으로 의심 많은 도마로 이렇게 알려져 있으나 사실 도마의 행적을 도마전이라는 전기도 있지만 도마의 행적을 우리가 볼 때는 그 도마의 의심은 어떤 의미로 정당한 것이고 또 끝끝내 의심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마는 대단히 용기도 있고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우리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요한복음 11장, 거기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상경을 하고 계시는 대목입니다. 그때 벌써 예루살렘에서는 그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뒤입니다. 예수를 죽여야겠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이번에 과연 예수가 오려는가? 오면 잡혀가서 죽을 텐데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특별히 열두제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 에게는 마음에 불안이 꽉 차 있었습니다. 자 우리 선생님이 잡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제자들 생각에는 이번에 선생님이 예루살렘에는 안가셨으면 그런 생각이 깊어요. 그런데 그때 소식이 오기를 나사로에 대한 병 위급에 대한 소식이 왔지요. 예수님이 가신다고 그럽니다. 그때 이야기지요. 그때 이야기에요. 11장에서 13절서부터 보십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 하셨는데도 제자들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로 갑시다. 번연히 잡아 죽이기로 하고 또 주위가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죽을 곳으로 가자. 그러시는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아마 좀 머뭇거렸던 모양이에요. 심지어 그 전기를 쓴 사람 말에는 흐트러지려고 하는 징조도 있었다는 거지요. 아휴 이번에 선생님 따라가면 잡혀 죽을 텐데 미리 도망가자. 그런 기미도 있었던 것 같아요. 16절에 그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도마가 자기 동료인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했다. 

 

 

대단한 용기 아닙니까? 형제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자기 결심을 고백한 것이지요. 그럼 도마는 단순히 의심 많은 사람으로만 지탄할 것이 아니라 대단히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 나타나있지 않아요? 우리도 함께 가서 그전 성경에 보면 죽자. 그렇게 말했어요. 죽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선생님하고 같이 죽자. 그러면 그 도마라는 사람의 성격이 여기에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아까 두 군데를 읽어드렸는데 거기 14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참 배울 것이 많아요. 이 세상에는 의심이 없으면 과학이고 문명이 발달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그렇지요? 한번 의심하는데 의심을 풀려고 하는 것이 진보라든지 문명의 어머니라고도 하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의심이 덮어놓고 나쁜 것은 아니야.  의심하고 말아버리는 것은 나쁘고 의심을 해결하는 것은 도리어 의심이 유익이 되는 때가 있어요. 여기도 그런 때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 지금도 여기도 제자들이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던 때야, 선생님이 자꾸 내가 죽겠다. 내가 죽겠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던 때야. 그래 먼저 안심을 시키신 거지요. 당신들은 불안해하지 마시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시오. 나를 믿는다면 무엇 때문에 불안할 것이냐? 또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 때문에 불안할 것이냐? 이렇게 안심을 시켜놓으시고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 내가 먼저 가겠다. 그런데 간다는 말도 제자들은 이해가 안 되었지요. 그런데 내가 가서  너희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고 다시 와서 너희들을 데려가겠다. 

 

 

이거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거든. 이때 당최 무슨 연유로 지금 여러분들이나 우리는 짐작을 해요. 또 다 아니까 그런데 그들은 못 알아들었어. 그래서 내가 있는 곳에 당신들도 있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끝머리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어디로 가든지 그 길을 너희들은 알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들은 알고 있다. 그랬는데 뭐 여기 도마가 대답했지만 도마 뿐 아니지요. 아마 베드로이하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도마만이 이렇게 나섰을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자 도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솔직하게 말 했어. 이것은 도마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마 열두 제자들이 다 똑같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쁩니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그러는데 예수님 가시는 길을 모르니까 모르다고 그랬는데 솔직하지요. 그런데 이런 것을 보고 도마는 맨 의심만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가시는 길을 알겠습니까? 지금 여기 요점이 두 가지가 나왔어요. 어디로 가시는가? 그 어디라는데도 모르고 또 하나는 어디로 가는 길도 모른다. 그것을 말 했어요. 그런데 이거 보시오. 여기서 도마가 이런 말씀을 드릴 적에 예수님이 어째서 너는 믿지 않고 의심만 하느냐? 하고 꾸짖지도 않으시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해주셨어. 몰라 이때 이 도마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유명한 말씀이 나왔을까?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다. 아주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이 말은 알아들었을까? 아마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은 대강 짐작 하실 거야. 그러나 그걸 믿는 사람은 드물지요. 

 

 

내가 곧 길이다. 길을 모른다고 그러니까 내가 길이야. 나 따라오면 된다. 그러시는 거야. 또 내가 곧 진리이다. 내가 곧 생명이다. 이렇게 유명한 말씀 아주 이건 참 역사이래로 동서고금에 들어보기 어려운 희귀한 말씀 아닙니까? 내가 곧 길이다. 내가 진리이다. 내가 곧 생명이다. 그러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이렇게 끊어서 말씀 했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것이 유명한 말씀인데 그러면 인제 이것에 대해서 첫째 생각해 보십시다. 몇 가지지요. 도마만이 이런 의심을 한 것이 아니고 그때 제자들도 다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했지요. 그러면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신 곳이 어디인가? 그러면 하늘나라 가셨다. 이렇게 쉽게 말하지요. 또 좀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골고다의 길이라고 그렇게 말들 할 거예요. 예수님 가시는 곳은 골고다라고 이렇게 말 할 거예요. 또 좀 더 자세히 말하라고 하면 예수님이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길이라고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이걸 배우고 있습니다. 또 명상을 하고 또 수도를 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그것만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하면 그것이 신자들 아닙니까? 신자들인데 그런데 그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느냐? 이것이 오늘 문제가 되고 있어요. 예수님이 따라 가시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아 이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로구나. 이렇게 조금씩 알아지지요. 조금씩 알아지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 백이면 아마 구 할이 더 넘을 거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 물어보면 다 예수님 따라가기를 소원이라고 그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가시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 백 명을 모아놓고 검토해 보면 아흔아홉 명은 아닐 런지도 몰라. 다른 길로 가고 있어. 제 멋대로 가고 있어. 심지어는 마귀를 따라가고 있어. 그러면서도 예수님 가신 길을 간다고 그래. 

 

 

그러면 그거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이야. 날마다 듣고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래서 그중에 백 명에 하나가 될 런지 열이 될지 그것은 우리가 알바가 아니고 또 알 수도 없지만 참으로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소위 선지자 성인들 순교자들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이제 요새 수도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길을 간다고 하는데 수도자가 다 따라간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길을 모르고는 ‘그 길을 모르겠는데요.’ 한 것은 거의가 이 말을 했어야 한다니까요. 우리가 지금 아는 척 하고 그러고 있는 것이 병이야. 그러면 도마는 훨씬 훌륭해요. 솔직하고 훌륭한 사람이야. 우리도 차라리 주님 제가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겠으니 참 밝히 알려주십시오. 이런 성의만 있었으면 이런 솔직성만 있었으면 예수를 더 좀 잘 믿었을 텐데 아는 척하고 지금 예수를 따라가고 배우는척하고 있는 이것이 변통들이라니까요. 그럼 여기서 볼 적에 도마는 성공한 사람이고 훌륭하지 않았소? 우리가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라고 감히 이런 말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로 봐서 이런 의심을 의문을 내 놓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말이지요. 길을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그래야지 솔직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다른 길을 가면서 체면을 지키고 모두 적어도 이거 내가 말을 잘못하는지 몰라도 저런 목사라든지 신부라든지 선생이라든지 지도자라든지 모두 이런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주님 가신 길을 제가 몰라서 못 따라가겠습니다. 이런 소리하면 창피하거든. 모든 사람이 저 여태 그것도 몰랐는가? 이럴 테니까 모른다는 소리도 못한다니까 차라리 도마처럼 그 길을 어쩝니까? 이랬으면 좋을 텐데 십년 이십년쯤 믿은 사람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주님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아 이런다면 창피스러워서 체면 때문에 또 대개는 관심도 없어요. 아예 주님 가신 길이고 뭐고 상관이 있느냐? 

 

 

밥 먹고 돈 벌고 하면 그만이지 그것이 신자들이야. 예배당에나 찬송가 책 끼고 왔다갔다하면 되고 꾀꼬리 모양으로 노래만 부르면 되고 그러면 신자지요. 세례 받고 영세나 받고 교리 문답이나 하고 그러면 되지 주님 가신길이 어딘가? 그거 알 필요가 뭐야? 말로는 그렇게 안 해도 마음으로, 마음으로 필요조차도 안 느끼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신자들이에요. 그러면 이 도마는 거기다 대면 구도자 아니요? 길을 찾는 사람이야. 길을 찾는 사람 이 태도가 우리에게 지금 아쉽다. 그겁니다. 도마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겠어. 이것을 배워야겠어. 그래서 도마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인류를 대표해서 아주 가장 큰 대답을 받지 않았습니까? 내가 곧 길이다. 나만 따라오면 된다. 내가 가는 길을 봐라. 그거 예수님이 그 길을 지금 어떤 길을 가요? 지금 물론 여기는 예루살렘 길을 상경하시는 길인데 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 거기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곳으로 간다. 또 예수님의 그 다음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시고 빌라도 가야바 안나스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나중에 그 십자가를 지고 강도 틈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야. 그런데 그것이 무섭지 않고 그 길을 가야 나 가는 곳에 너희들도 올 수 있다. 또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로 내가 너희를 데리러 오고 데리고 갈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던 그 길로 예수님이 가시던 그 길로 우리도 오고가야 한다니까요. 옆으로 비킬 수가 없어. 골고다를 지나가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갈수가 없어.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는 부활을 우리가 받을 수가 없고 이 길이라는 거야. 이 길, 그런데 이것이 무서우니까 피해가는 거 아니야? 옆으로 들 피해가는 거 아니야? 그 십자가가 무섭고 제가 요새 어떤 친구 한분이 서울에서 와서 남원 산에 가서 며칠 계셨는데 다니러 가셨어요. 아주 참 열심입니다. 그분은 그분도 제 나이 살이나 동갑이나 제 나이 살이나 아마 내가 생각한대도 쉬 가실 것 같아요. 혈압도 높고 아주 열심이야. 자기 말마따나 자기같이 팔자 좋은 사람인데 다 버리고 저 산 중에 와서 고생을 하고 계셔. 그런데 그분이 요새 그런 신앙 있지 않소?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면 네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야만 구원 받는다는 거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 산에 있는 사람을 막 족칩니다. 구원 받았소? 남원 산에 있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 얼른 대답이 나와야지. 벌써 당신의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씻어 주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소리 하지 마시오. 

 

 

한날은 한나 집사님 한 테도 따져. 집사님 죄인이요? 아니요? 아 한나 집사님은 그러셨다 던가? 제가 죄인이 아니면 예수님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랬다던가? 모두 그렇게 대답을 해. 전부 낙제를 해버렸어. 아 이제 동광원 사람들이 큰일이 났어. 이양반이 큰일 이라고 낮 시간 저녁시간 막 몽둥이질을 하면서 주입을 합니다. 남반으로 여반으로 다니면서 이제 죄인이라고 그러지 마시오. 예수님이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여러분은 대답해 보시오. 대답해 봐요. 죄인이요? 죄인 아니요?  
 ‘죄인입니다.’
 죄인이에요? 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없어졌는데 내가 다 담당하고 내가 죽는다고 그랬는데 죄 없어지지 않았소? 아 이러니까 이거 곤란해 졌거든. 제가 가니까 모두 그 문제를 내 놓습디다. 말씀 한분도 내놓고 들은 분도 내놓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나 길게 하고 싶지 않은데 여기 조금 상관있으니까 이야기해요. 큰 애기는 한 큰 애기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구원 얻었다. 이렇게 말은 하는데 실제 행동은 구원 얻은 것 같지 않아. 구원 얻은 사람의 행동 같지가 않아. 믿는 사람의 행동 같이 되지를 않아. 그렇다면 그 바리새교인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더라니까. 그러니까 항복을 안 한쪽이지. 또 한 큰 애기는 이렇게 말합디다. 그전에 오 장로님이 오북환 장로님이 공부 시킬 때 일차구원이라고 그랬다던가? 이차구원이라고 그랬다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원죄는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나면서부터 지은 죄는 믿음으로 없어지는 것인데 그 예수님의 피로 내 죄로 씻었다는 믿음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런 뜻으로 말했는데 오 장로님이 말씀 하시는 건 반쪽만 말씀하시는 것 같습디다. 또 그래요. 아주 인제 상당이들 그래 인제 자꾸 물어봤더니 한 사람도 항복한 사람은 없어. 

 

 

아 참 그렇습디다. 우리가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어. 아 이 양반이 답답해졌지. 여러분들은 어때요? 그런 시험을 받으면 이것이 문제라니까요. 내가 아까 뭐랬소? 신앙과 불신앙 사이, 그건 믿음에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건너가는 곳이야. 징검다리가 끊어져 있다니까. 오늘 우리 생활에서 징검다리가 끊어졌어. 이것이 큰 문제야.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미 우리 죄는 다 2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담당 하셨으니까 나는 십자가 질 필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야. 그 교단이 있어요. 십자가 비켜버렸어. 싫거든. 그렇게 되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십자가 기피현상이야. 십자가에 대한 항거의식이라고, 우리 속에 다 있거든. 그렇지요?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 말로는 다 십자가 진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십자가를 안 져. 십자가를 피해요. 왜 그런가 하니 자기 육적 향락이나 모두 안일이나 이런 것을 탐하는 생각이 있어. 그것을 좋아하는 또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거짓이 있고 모두 그런 타락 성 죄악성이 내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반항을 한다니까. 그래서 그 길이 안 가지는 거야. 그래서 그 길이 또 그 길은 그런 길입니다. 제가 그전에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냥 지도만 놓고 처음으로 가는 길을 막 돌아다녔어요. 팔도강산을, 그런데 언제인가 한번 진해 저 뒷산을 가는데 캄캄한 밤중에 길을 잃어버렸어, 그러니까 지도를 놓고 아주 세부지도지요. 지도를 놓고 회중전등으로 그것을 보면서 길을 찾아갑니다. 처음 가는 길이니까 알 수가 없어. 알듯하면서 그러다가 엉뚱한 데로 가서 죽을 번 하지 않았소? 해군사령부로 쑥 들어 가버려서 총에 맞아 죽을 뻔 했거든. 그 길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가야지, 그 예수님 따라가는 길이 다 알듯 하면서도 어려워요. 그러니까 도마가 길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걸 흉들 보지 말라. 그 말이에요. 아느냐? 그 말이에요. 

 

 

길이라는 것은 가본사람만이 아는 거야. 원은, 그래서 우리가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애를 쓰지요. 성인들의 가신 길을 따라가면 테레사 성녀라든지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그런 양반들이 가신 길을 따라가, 또 심지어는 가까이 이 현필 선생이라든지 그런 그런데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분만이 아는 길이야. 우리 길은 또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고대로 이 현필 선생 흉내만 낸다고 이 현필 씨 같이 되는 거 아니야. 여러분이 24시간 죽어라하고 프란치스 성인의 흉내를 내보시오. 그런다고 프란치스성인이 되는 거 아니야. 다 사람마다 자기가 보고 깨닫고 체험하고 가야하는 길이 있어요. 그것은 다 달라요. 그러니까 지금 도마가 그 길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도 똑같은 의문을 한번 품어야 되요. 내가 과연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 길은 바로 가는 길인가 옳게 가는 길인가?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찾아봐야지요. 성인전도 읽어보고 지도자의 말도 들어보고 그런 성인전도 들어보고 자꾸 검토를 받고 비판을 받고 그것이 절대로 필요한 거예요. 무조건 믿어보라고 그것도 좋은 거예요. 여기 조건이 없어요. 무조건 믿어져요. 그러나 이런 의문을 던졌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그 길이 내게서 보여 지고 발견되는 대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성령을 의지해서 겸손하게 걸어가는 거예요. 그 길을 걸어가면 걸어가 봐야 정말 알아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처음 서울을 가는데 내가 여기서 암만 이리로 가고 요리로 가고 고속버스에 가서 무엇을 타고들을 적에는 알송달송 알송달송 해요. 그러나 광주에 가서 서울 버스표를 사고 딱 올라앉아서 그래서 그 버스가 움직여봐야 내가 지금 서울을 가는 구나 실감이 나는 거예요. 천국 길도 그런 거예요. 그 실감 없이 가는 사람들은 엉뚱한 데로 갈수가 있어. 아까 그 말한 그런 과오를 범할 수가 있는 거야. 그 중에 그 대표적인 것이 아까 그 바리새파 형제가 말했듯이 바리새교인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가 천국에 아랫목에 앉을 줄을 알았거든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틀림없이 하늘나라에 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기에 낙제 아니요? 전부 낙제하지 않았소? 여러분이 만일 그렇게 되면 어쩔 거예요? 지금 틀림없이 하늘나라 간다고 그러는데 나중에 목숨이 딱 끊어졌는데 지옥에 가서 까만데 퐁 떨어져있으면 어떻게 될 거야? 작은 일이 아니지 않소? 남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서 여기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길이며 진리며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거 하나를 이 시간 이 자리에서는 이 대목에서는 기억을 하는데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그걸 기억을 합시다. 둘째 번으로 그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일어났던 거지요. 요한복음 20장에서 제가 읽은 대목은 그겁니다. 그런데 도마가 이때 어디를 갔을까? 그런데 도마 행전을 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디다. 도마라는 사람은 도리어 (끊김)

 

 


도마는 밖에 어디 놀러갔다든지 다른 짓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제자들이 다 상처를 입었거든. 그런데 한 자리에 앉아서 어물 쩡하기 싫어서 혼자 가서 자기 상처를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을 했어. 그거 짐작이지, 짐작이지 어찌되었든지 그때 없었거든요. 예수님이 그 다락방에 왔을 적에 없었는데 갔다 오니까 그 형제들이 선생님 봤어. 선생님이 오셨었다. 그러니까 이 도마가 대답한 거  보시오. 우리가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고 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소? 얼마나 확실합니까? 똑똑한 사람 아니요? 그러면 내가 여기서 묻겠는데 여러분 그렇게 하고 믿어요?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 만져본 사람 여기 있어요? 그러지 않고 믿지 다 믿는지 안 믿는지 나는 모르겠소만 어찌되었든지 그런다고  그런데 이걸 나쁘다는 거지. 요새 그렇게 비판들을 하거든. 도마를, 그렇게 의심 많은 도마라고는 하나 이런 것을 놓고 그래 그런데 예수님은 꾸짖으셨어.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도 그것에 대해서 물론 믿지 않느냐고 말씀은 하셨지만 이것 보시오. 예수님이 둘째 번에 다시 나타나서 도마에게 당신의 손가락으로 도마가 말 한대로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시오. 자 내 손에 못에 찔린 이거 만져봐라. 만지게 해 주신 거예요. 또 당신의 손을 내 옆구리 넣어보시오. 여기 좀 여기 창 자국 구멍 난 데 이쪽을 손가락을 넣어봐라. 얼마나 그 친절하셔? 얼마나 그 믿게 하시려고 아주 애쓰는 그런 태도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은요,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이 확실한 신앙이야. 그런데 성경에 보면 전부 그걸 가르쳤어요. 

 

 

그 지난번에 한번 다 읽었으니까 자세히 이야기 할 필요 없지만 그 요한 1서 첫머리가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그 말씀은 우리가 듣고 사도요한도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 말씀을 진리를 예수를 그러고 믿는다는 거예요. 사도요한도 그럼 그것이 무엇이 나빠요? 요한도 나쁘게 도마를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듣고 그러고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을 너희에게 전한다. 너희들도 우리와 똑같은 교제가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런다. 이것이 기독교가 아주 단합할 수 있는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하는 거야. 예수교가 오늘 8백만이 되어도 어물정한 것은 이것이 이 확실한 증거 없이 단합이 안 된다. 우리가 여기 있는 사람이 똑같이 다 이 사람도 이 사람도 여기 있는 사람이 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고 그러고, 그러고 예수를 믿는 사람끼리 모여 있다면 그것은 도저히 무엇이 와서 흔들 수도 없고 분리시킬 수 없어요. 동광원은 신앙적인 단체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요. 그러나 신앙은 원체가 개인의 신앙도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어요.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위에 세우는 자와 같다. 암만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쳐도 절대로 흔들리거나 쓸려내려가는 법이 없다. 그런 신앙 그런 신앙은 이런 신앙이야 확실한 증거 히브리서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증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에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신앙 가령으로 지식으로 입으로나 믿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야. 아까 그 말한 거기에 빠져있는 거야. 구원 받았다. 하는 거 생각을 못해. 실제로 생활이 구원 받았다하는 사람의 생활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참 구원받은 증거가 있다면 우리 생활이 천사 보다 훌륭해야 되요. 그렇지 않소?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모두 성경에 많이 나와 있거든.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거룩하고 아주 그런 생활 그렇게 됐어요. 되지 않은 것은 구원의 과정들을 밟고 있는 거지. 밟고 있는 것들이야.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고 우리가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다른 이야기지만 어찌되었든지 이 여기 도마가 지금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는 아주 우리에게 시원하고 좋은 것을 보여줬어요. 우리도 예수님에게 좀 그렇게 한번 요구해 보는 거야. 프란치스 성인 같은 이가 왜 성흔을 받기를 원했겠소? 젬마수녀 같은 이는 그렇게 모두 손바닥에 발에 옆구리에 찔린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아서 가시관에서 흘리는 피를 자기한테 흘려지기를 원했다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소? 그들은 전부 그렇게 했거든. 그러면 그들도 도마처럼 의심 많은 사람들이라고 그럽니까? 물론 그들의 동기는 조금 달라요. 사랑에서 나왔으니까 처음부터 그러니까 이 도마가 내가 그렇게 해봐야만 믿겠다. 하는 그 마음은 나쁜 거는 아니라니까요. 나빠요? 나쁘지 않아요. 우리는 그것을 두루 뭉실 쳐놓고 믿기 때문에 그 체험을 갖지를 못해. 도마는 성공을 하지 않았소? 도마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만져보고 또 그 옆구리에다가 손가락을 넣어보고 했던 모양이지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완전히 항복을 한 거지요. 우리가 이런 신앙에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니요? 우리들이, 아이고 주님 과연 주님이십니다. 정말 우리가 그 옆구리에다가 손가락을 넣어보고 손바닥에 못 자국에다가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러고 아이고 주님 그리고 우리가 통곡을 하고 슬퍼하고 감격을 하고 그까짓 거 걸레조각 같은 재산 살림 그냥 다 사도바울과 같이 똥과 같이 내어버릴 거야. 그렇지 않아 그러지 않겠어요? 정말 예수님의 그 옆구리의 창 자리나 그 손바닥에 못자리 속에다가 손을 만졌다면 우리 생활이 확 변해질것 아니요?

 

 

 얼마나 우리가 씩씩하고 용기 있게 또 더 적극적으로는 사랑이 넘치는 훌륭한 신자들이 될 겁니다. 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그 무엇을 갖다가 우리가 주저할 겁니까? 그러니까 도마는 확실한 신앙으로 들어간 사람이야. 그래서 이건 전설이라는 것은 함부로 하는 소리가 아니지만 조금 꼬리를 달아야겠어요. 도마가 인도까지 와서 전도했다는 것은 아마 정설이 되어있어. 전설 같지만 그런데 도마는 인도뿐 아니랍디다. 소아시아 일대 동부 유럽지대까지 다니면서 전도를 많이 했대요. 그런데 인도 와서 전도했던 이야기가 한토막이 있어요. 이거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요. 인도에 와서 지금도 인도에 가면 도마교회라는 것이 있답디다. 그런데 인제 모두 거기가면 이런 전설이 있대 도마가 처음에 인도로 전도하러 올적에 어떻게 왔는가 하니 안 가려고 그랬대요. 빼빼거리고 안 가려고 그랬는데 예수님이 도마를 인도로 전도하러 가도록 꼬이셨다는 거야. 그때 인도 어떤 임금이 대궐을 짓는데 그 팔레스틴 까지 왔던지 목수 이런 철공 이런 것을 구해갔대. 그러니까 그때 예수님이 도마를 인도로 보내고 싶으신데 그 사람을 모집하러 온 사람한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좋은 목수를 하나 소개하겠다. 계시를 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은 계약, 요새말로 하면 삯을 받고 예수님이 그러고서는 이렇게 도마한테 내가 너를 그리 종처럼 팔았어. 일꾼으로, 그러니 너는 갈수밖에 없다. 그렇게 갔다고 그래요. 그건 이제 이야기로 된 거지 그래서 갔어요. 그 인도로 갔는데 임금님 앞에 가서 너는 무엇을 잘하느냐? 네, 저는 사실은 도마가 그런 기술이 있었는지 몰라. 목수일도 잘하고 철공일도 잘합니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대궐이라 던지 성당이라 던지 지금 기억이 희미해요. 어찌되었던지 이번 건축일은 네게 맡긴다. 하고 돈을 임금이 많이 줬다는 거예요. 도마에게 그런데 자꾸 이렇게 돈을 주면서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도마가 집은 하나도 짓지 않고 기초공사도 하지 않고 목수질도 안하고 맨 돌아다니면서 구제사업만 했다는 거야. 그저 굶는 사람이 있으면 뭘 하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약을 주고 이러고 그것만 하고 다니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하겠지, 하겠지 그랬는데 암만 기다려 봐도 안하거든요. 그래 이상해서 불러다가 물어봤더니 하나도 안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도마가 말하는 교회 성당이 되었던 대궐은 다른 거야. 하늘나라 성전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 아 그러니 말이 통할거야? 그러니까 이제 제일 분개 한 게 임금의 동생이었대. 임금의 동생이 그 말을 듣고서 저런 놈은 그냥 가죽을 벗겨 죽이라고 그래서 감옥에 가두어놓고 그러기로 했는데 임금의 동생이 죽었어요. 먼저 죽어서 하늘나라를 가봤어요. 하늘나라 가봤더니 굉장히 크고 좋은 집이 하나 있더래. 저거를 사자고 그랬더니 그건 못 판다고 그건 도마라는 사람이 임금을 위해서 지어놓은 집인데 이건 다른 사람에게 팔수가 없다고 아 그때 깨달았거든. 아 이거 참 도마는 정말 우리 형님을 위해서 더 좋은 일을 했구나. 이걸 어떻게 알릴까? 이러고 어서 형님에게 가서 죽이지 말라고 해야 할 텐데 어떻게 알릴까? 그래서 사정을 해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왔대. 와서 제 형님에게 형님 거기에 가보니까 굉장히 좋은 집을 형님을 위해서 지어 놨습디다. 그런 이야기에요. 긴 이야기를 내가 줄여서 했는데 도마에 대한 그런 전설도 그런 전설을 우리가 들을 적에 이야기 화 했는지 그것은 몰라도 전설을 들을 적에 좋은 일을 많이 한 거 그리고 요새 말하는 어설픈 커다란 예배당만 짓거나 엄숙한 모든 예식만 하는 거보다 불쌍한 사람에게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에게 약을 주고 그런 일로 많이 복음이 전파되어서 무엇인가 연고가 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남아있는 것 아니요? 그렇게 된 거 아니요? 그런 도마는 나중에 순교를 당했지요. 죽임을 당했지만 확실히 마지막에는 성스럽게 사셨다 또 신앙으로 성공한 분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아까 맨 먼저 제목을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라고 그랬어. 불신앙이라는 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서 생기는 것이고 또 그 길이 라는 건 살지 않으면 밤낮 들어도 모르는 길이고 그 길은 살아봐야 그 길로 가는 것이고 믿어지는 거야. 믿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도마는 예수님께 그 길을 물어봄으로서 우리도 항상 주님과 대화하면서 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 예수님하고 계속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치던지 적은 일이던지 큰일이던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있던지 그러면 항상 주님하고 대화를 하면서 나가라는 거야 나가면서 그저 그 길은 대단히 어렵다고 여러분들은 많이 들었지요. 그대로 하고 사는 거야 맨 먼저 이야기 했지요. 우리도 가자. 죽자. 선생님과 같이 한번 죽어보자. 그런 결심을 하고 따라나선 도마와 같이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믿어지시기를 빕니다. 찬송가 3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