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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금 생강이 자라다

mamuli0 2020. 6. 25. 11:24

6.25 70주년 남북화해 분위기가 다시 경색 중이다. 장마철이라 날씨가 우중충하다. 은행 배 열매가 커지고 자두가 익기 시작한다. 울금 생강이 모두 올라와 잘 자라고 있다. 또아리 호박 단호박 열매가 커지고 양배추 바트가 다 자랐다.

 

예수의 길

다석에 따르면 예수의 길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환하게 되는 길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환빛(영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삶이라 보고, 하느님과 하나로 되는 환한 삶을 위해서 위로 올라갔다. 환빛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며, 예수의 길이다. 다석은 1956년 4월 29일의 글에서 예수의 길에 대해서 비교적 길게 썼다. 예수의 길은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왔다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그 길을 환하게 걸어감이 ‘참’이고, 그 참이 ‘길이길이 삶(영생)’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 보는 것이 ‘환(빛){영광}이며, 참된 생명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함께 하나로 있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빛이고 생명이다.

 


다석에게는 이 길만이 살 길이며 이 길로 나가려면 “허물(잘못,過)을 벗겨내는 것밖에는···· ·없다.” 여기서 다석은 허물과 과거를 일치시킴으로써 삶은 과거의 허물, 잘못(죄)을 벗어 버리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시(時)는 과거로 지나가는 것(過去)이며, 생(生)은 떠나가는 것(逝去)이다.” 그리고 하늘의 지극한 선에 머물러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 것이 하늘이 내린 사명이다. ·인생이란 “신체, 가산(家産), 사회란 물(物)을 통과하여 탈피, 성장하는 무엇의 일부 과정이다.··· ·늘 곧히어 벗겨 냄(改革이래도 新陳代謝래도)을 일삼게 되었다.”

 


인생이란 영속 개혁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일시 개혁으로 부귀영달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삶은 “들어 박히는 것이 아니라 박힌데서 트고 나감이며...인간을 크게 열어서 참 살길을 걷는 것”이다. 일시적. 일회적 개혁으로는 삶이 바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일회적으로 세상을 구속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들이 “세상에서 밥을 알맞게 먹고 옷을 알맞게 입고 자미 보고 놀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다. 인생은 “머리카락 발톱 끝까지 개혁(改革)-영속개혁(永永改革)-에 들어가는 길이다.”

 


다석에게 영속개혁의 길은 삶이 죽음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에 삼켜지는 길이다. 어떻게 죽음을 삼키는가? 말씀을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삼키고 살 수 있다. 말씀만이 ‘나’를 시간과 공간의 물질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되게 한다. 집을 짓고 나라를 세워도 물질은 생각과 말씀을 일으키는 한에서 의미가 있다. 이 길은 남이 대신 갈 수 없고 오직 ‘내’가 가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잘라 말했다.”(1956.5.1.) 이것은 개혁의 주체가 물질이나 제도가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나‘는 물질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에 근거한다. 개혁은 생각을 새롭게 하여 허물(물질)을 벗겨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말씀이다. 허물을 벗겨 나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참‘이다, ’삶‘이다.”

 


“내가 곧 길이다.”라고 선언한 예수는 그 길을 믿고 그 길을 갔다. 다석은 <우리 아는 예수>라는 신앙 시에서 예수를 “믿은 이”라고 했다. 예수는 믿음의 전에 믿은 이였다는 것이다. 이 시는 다석의 예수 이해를 잘 드러낸다.

 

 

예수는 믿은이 압·아들. 얼김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높·낮, 잘·못, 살.죽-가온대로-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참을 믿은 이 말씀을 믿은 이 한 뜻 계심 믿은 이
예수는 믿은이 없이 계심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다석은 예수를 믿은 이로 보았다. 이 짧은 글에 ‘(예수는) 믿은 이’라는 말이 열한 번 나온다.“높·낮, 잘·못,살·죽 가온대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라는 글귀에서 예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있다.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는 물질과 현상의 세계에 속한 일이다. 물질적. 현상적 현실 논리에서는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 밖에 없다. 물질과 현실의 세계에서 영과 믿음의 세계가 열리면 다른 차원, 다른 길의 생명 세계가 열린다. 높고 낮은 구별이 없어지고, 잘하고 못하고의 분별이 사라지고 살고 죽고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생과 평화의세계가 열린다. 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인 하느님을 다석은 ‘없이 계심’으로 표현했다. 있음(有)과 없음(無)의 경계를 넘어서 있음과 없음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이며,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의 구별이 없이 서로 살리고 함께 올라가는 하나됨의 세계이다. 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믿음뿐이며 사랑과 정의를 위한 겸허와 희생의 십자가뿐이다.

 


다석은 예수를 신앙의 기조로 삼았으나 역사의 인물로서의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하지 않았다. 유영모는 “예수의 혈육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혈육”이라고 했다. 예수는 믿은 이고 길 가는 이다. 다석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따라 생명의 길을 가려고 한다. 인생길을 가는 다석에게 예수는 길의 스승이다. 다석의 신앙은 스승 예수를 따라 예수와 함께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다. 다석에게 예수는 “내가 잘못 할 때 잘하자고 책망을 내리는 분”이다. 다석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설명한다. 제자는 스승의 뒤만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 다석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수와 함께 “묵은 것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온고지신)” 했다.

<다석 유영모> p273-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