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 집안의 여인들
민족의 심장에 뜨겁게 새겨진 이름 유관순, 그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언니고 누나다.
이화학당 시절 단짝 친구였던 보각스님은 유 열사가 “명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끝내 한 방 친구들이 배를 잡고 웃다가 단체로 벌 받던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친구 집에서 부쳐준 명태 반찬을 맛있게 먹고 저녁 기도시간에 장난치다가 사감 선생님께 들켰던 것이다.
그 천진난만한 소녀가 고향의 3ㆍ1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옥에 갇히고, 옥중에서도 밤마다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18살, 부모는 만세운동 현장에서 일경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오빠는 투옥되고, 두 어린 남동생은 마을을 헤매고 있었다
유관순 가(家) 종부인 김정애(69)씨가 전하는 그의 시어머니 조화벽 여사의 이야기는 특히 감동적이었다.
강원도 양양의 부잣집 외딸로 태어나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한 조씨는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가게 됐고, 그곳에서 오갈데 없는 두 소년을 돌보게 되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동생들(인석, 관석)이었다.
감옥에서 6개월을 복역하고 영명학교 학생으로 돌아온 유 열사의 오빠(준석, 나중에 우석으로 개명)는 세 살 위인 조씨를 누이라고 부르며 따르다가 “결혼을 안 해주면 죽어버리겠다”며 열렬하게 청혼했다. 그들은 두 동생을 데리고 양양으로 가 살았다. 그곳엔 조씨의 부모가 세운 교회와 정명학교가 있었는데 조씨는 정명학교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그들은 세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제충)만 남고 둘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제충씨와 결혼한 김정애씨는 경기여고와 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국제조직을 전공하여 중앙여고 교사로 34년 근속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독립노농당에 가입한 아나키스트였다. 당국은 독립노농당을 공산당보다 더 위험한 당으로 백안시하고 탄압했다. 일제시대에 감옥을 이웃집 드나들 듯 하던 유 열사의 오빠는 해방 후에도 ‘위험인물’ 이었다.
3ㆍ1 만세사건 때 조화벽씨가 버선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공주에서 양양까지 들고 가서 교회 청년들에게 전함으로써 그곳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어머님은 한평생 시아버님으로부터 저고리 한 벌 못 얻어 입었다고 여자다운 불평도 하셨어요. 저도 남편에게서 저고리 한 벌 못 얻어 입었어요”
유관순열사 집안의 여인들 올케와 조카며느리가 이처럼 든든하게 집안을 지켜왔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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