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무 이야기

추분 3일전 월동무 : 사회복지 귀일원

mamuli0 2023. 9. 20. 14:21

 구웡 장마가 이직 끝나지 않았다. 포장은 젖어있는 상태다. 낮 기온은 30도 가까이 이른다.  어린 무 포장에 친환경 농약을 살포해 준다.  이현필 선생 탄생 100주년에 귀일원에서 기념식 에 올린 자료를 올려본다.

 

 

사회복지법인 귀 일 원

설 립 정 신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돌보는 정신.

 

설 립 배 경

1944년 이현필 선생이 남원 지리산 자락 서리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작은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여순사건으로 인한 1949년 전남 화순 도암 청소골에서 고아 8명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1950년 광주를 중심으로 뜻있는 인사 70명이 설립한 동광원의 고아 600여 명을 공동체 가족이 주축이 되어 돌보고, 광주 시내를 배회하는 고아, 걸인, 환자들을 돌보면서 ‘하룻밤씩 재워 보내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 오늘의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이 되었다.

 

 

歸 一 園 의 뜻

귀일원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 되어 사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알고 들어와 하룻밤이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돌보는 공동체, 한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자는 뜻이다.

동광원의 이웃 사랑 실행

1. 전남 화순 도암 고아원 운영

수도공동체가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내 몸 같이 돌보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이다. 1948년 여순 사건으로 고아들이 늘어나자 1949년 김상욱 의사가 이현필 선생의 말씀을 듣고 8만원을 희사하게 되었다. 이 기금으로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초가삼간을 매입하고 고아 8명을 김준호 선생과 정귀주 자매가 돌보기 시작하였다.

 

2. 광주 고아원 동광원(東光園) 운영

○ 1948년 여순사건으로 인해 고아들이 늘어나자 1950년 1월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선생의 제안으로 광주를 중심으로 뜻있는 인사 70명이 모여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 운영키로 합의했다.

○ 당시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 선생에게 원장 직을 맡아 운영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정인세 선생이 처음에는 망설였다.

○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현필 선생으로부터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느니라」라고 적은 쪽지를 받아보고 비로소 원장 직을 수락했다.

○ 동광원 고아들을 처음에는 광주 황금동 적산가옥에서 수도공동체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돌보았으며, 6․25 전쟁 후에는 남자들은 지산동에서, 여자들은 양림동에서 정부와 외국 원조단체의 지원과 상무대 미군의 도움을 받아 무려 600여 명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 수용 인원이 많아지면서 교육, 식생활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방침에 따라 1954년 8월 도내 각 시설로 고아들을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 이때 일부 고아들이 수도공동체 가족의 지극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방림동 밤나무골로 되돌아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 수도공동체는 동광원에서 고아들이 행복하게 생활하는 모습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름 없던 수도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동광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 고아들이 자라서 ‘귀일원’의 장애인을 돌보게 되었다.

 

 

 

3. 걸인, 고아, 환자들을 돌봄

○ 1949년 광주 밤나무골에 터를 잡은 수도공동체는 1951년 화순 도암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생활을 하던 이현필 선생으로부터 ‘귀일원’이란 이름과 함께 “곧 나가서 광주역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라고 적어준 필답 가르침을 실천하기로 했다.

○ 그때부터 수도공동체는 오갈 데 없이 광주 시내를 배회하며 광주역, 광주공원, 광주천 다리 밑에서 사는 고아, 과부, 걸인,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면서 방림동 밤나무골로 데려와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 일부 공동체 가족들은 광주천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였으며 이 일은 주로 김준호 선생이 맡아 하였다.

 

4. 결핵환자 수용보호 시설 송등원(松登園) 운영

○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폐결핵은 불치병으로 경원시 되어 환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제중병원에서 6개월 간 치료한 후 퇴원시킴으로써 오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현필 선생은 무의무탁 환자들에 대하여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 1956년 서울 YMCA 현동완 총무가 동광원 하계수양회 강사로 왔다가 이현필 선생으로부터 폐결핵 환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을 만나 300만원의 후원금을 마련해 주게 되었다.

○ 광주 무등산으로 올라가는 산수동 골짝에 폐결핵 환자 수용시설인 송등원을 설립, 제중병원에서 퇴원하고 오갈 곳이 없었던 환자 30여 명을 집단 수용하고 무등산장 삼밭실을 중심으로 은거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을 제중병원 원장 고허번(H.A.Codington) 선교사의 도움으로 보살폈다.

○ 운영은 제자 김준호 선생에게 맡겼으며 후일 김준호 선생이 ‘무등원’으로 명칭을 변경, 독립 운영하였다.

 

5. 사회복지법인 귀일원 설립 운영

○ 1948년부터 공동체가 남원에서 광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듬해인 1949년에는 공동체 가족 모두가 광주 남구 방림동에 터를 잡게 되었다.

○ 이때부터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하나님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일을 보다 내실 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법인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동광원이 공식적으로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설립하게 된 것은 1965년 2월 24일이다.

○ 현재 법인 산하에 정신장애인 생활 시설 ‘귀일정신요양원’과 지적장애인 생활 시설 ‘귀일민들레집’, 장애인 직업재활 시설 ‘귀일향기일굼터’ 3개 시설이 있으며, 여기에는 모두 장애인 240여 명과 직원 60여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