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사랑초 뽑아내다 : 영혼문제가 급선무

mamuli0 2023. 4. 27. 16:22

 겨울에도 푸른잎을 가지고 사철내내 농장에서 함께 사는 사랑초가 꽃밭 수선화를 밀어낸다. 할수 없이 손질을 하게 되었다. 밭뚝에도 길에도 도랑에도 지천이다. 하얀색 분홍색 꽃을 피우고 크로바처럼 생긴 잎을 가졌다. 뿌리는 동그런 열매처럼 생겼는데 생명력이 모질다. 번식력이 강한편이다. 금년에 처음으로 줄여볼 생각이다.

 

 

 

영혼문제가 급선무

 

1985.3.19. 오북환 장로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범위를 넘어서 무리하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처음으로 여러분을 찾아간 사람은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범위를 넘어서 남이 한 수고를 가지고 생색을 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도 말입니다. 안 목사님과 여러분들이 지도를 받고 수고를 해왔는데 저희가 제가 여기다 무엇을 해가지고 생색을 내서는 안 되겠지요.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서 우리의 선교 사업이 여러분 사이에서 더욱 확장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범위를 넘지는 않겠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따라서 피차에 예정을 따라서 한다. 오늘 아침에 그 말씀만 조금 피차에 믿음을 통해서 하는 것이지 한쪽 믿음을 가지고는 안 된다.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도 서로 통해야 대화도 되지 안통하면 어떻게 되느냐? 소귀에다 경 읽기 아니겠어요? 서로 소용없어요. 통해야 예수님도 그리스도의 세상은 안통해도 하나님의 세상은 그때는 대화할 만큼 학자들에게도 특별한 사람들이겠지요? 그 순간만은 어느 정도 물을 말씀을 조금도 질문도 해보고 대답도 해보고 그때만은 그 시간만은 하나님이 주셨겠지요? 이 시간도 실상은 우리가 막연히 그러는 것보다도 사랑하는 거예요. 이 기회를 잘 쓰자 그거에요. 그냥 헛되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초상나는데 소리가 있거든요. 어제 녹음 들어보니까 김 선생님 여기 다 알고 있고 그럴 때는 뭔 일 다 제쳐 놓고 가야될 것 아니에요? 그러나 이것이 더 큰일이에요. 죽은 이는 누가 장사 지낼 것이니까 세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더 큰일이야. 다 제쳐놓고 가서 그러나 이것은 영혼 문제이기 때문에 큰일이다. 성공하고 승리하고 간 분이니까 거기서 남은 사람이 교훈 받을 것이 있지요. 영혼문제 육은 다 승리하고 가는 것이니까 그건 상관없고 영혼 문제 안 목사님이 그전에 김 선생님 있을 때도 같이 공부 하시고 그랬는데 이번에도 무등산 모여서 하신다니까 공부니까 공부에 욕심이 나니까 가기는 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세워놓은 것을 헐어버리면 안되거든. 그런데 진리는 헐리고 세우고 내가 진리가 아니면 나도 헐림을 받아야 하고 다시 세워야 되니까 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도 아닌 것은 헐어버려야 돼요. 그렇지 않아요? 옳은 것을 세울 것은 세워야하고 서로 겸손한 입장에서 되어야 할 텐데 내가 이 교만한 태도로 나타나서 다 세워놓은 것을 헐어버리면 어쩌나? 그것도 염려가 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자격이 없다는 증거도 되지만 말입니다.

 

 

먼저 등광리 교회에 가있는 전도사 있지요? 저번에 등광리라고 제가 심방을 가게 되었어요. 이 장로님같이 갔는데 가서 참석을 하시면 좋겠다. 그런 뜻으로 청했습니다. 뜻이 있으면 가자 강제가 아니고 내 짐작에 아마 안 받아 들일 것이라고 저번 여름에 산당에서 접촉해봤어요. 좀 너무 주장이 강해서 안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장로님이 가서 청해 놨습니다. 막 말씀을 시작을 하는데 나는 이쪽에 앉았는데 거기 않아서 끄덕끄덕 자버린단 말이야. 잠을 못자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고 성경은 보기는 보 더만. 봐요, 그런데 나는 또 내가 이제 못된 것이지요. 그때 문제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때 그걸 중심으로 역설을 말씀을 하면 할수록 그래서 실력 부족도 드러나지만 내가 능력도 안 되고 그렇게 엄한 것으로 굳어지면 안 되겠다. 안 목사님 지도를 받는 청년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가정을 갖은 사람하고 안 갖은 사람하고 오 장로님 그 말씀하고 각도가 좀 달라요. 목사님 밑에서 그 분은 청년이 아니걸랑요. 가정을 갖게 되었고 식구가 많아요. 그런 면도 그렇고 이해를 하셔야 될 것 같아요.) 가정이 있고 없고 무슨 그건 볼 것 아니고 우선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그 뭐라고 할까? 진리를 캐자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정이 있다 없다는 상관이 없고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진리를 아닌 것은 아닌 것 그것을 판단하더라도 해야지 무조건 안 들으려고 하면 들으려고 해도 그렇지만 그렇게 될 때는 너무 선입관 내가 받은 무엇이 그 이상은 안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배운 것만 옳다고 하는 배격하는 그런 것이 대개 있기 때문에 다른 분의 말을 그렇게 안하려고 하는 무엇이 될 거에요. 그렇게 안하지만 끝에 가서는 육이야. 육이라는 건 동정을 해요.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야.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 습관상 그렇게 내가 굳은 그것이 있기 때문에 참 마귀가 씌워버렸더라고 그렇게 되어버린다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 내가 옳다는 것 내가 받은 것만이 옳다는 것으로 배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안 목사님도 그렇게 저를 계명산에서부터 그렇게 대해 주셨지만 청년들 중에서 안 목사님과 승낙만 받으면 나는 개인적으로 가서 얼마든지 나는 말씀을 나누겠다. 개인적으로 가서 며칠이던지 들을 수 있겠다. 그거에요. 통용하는 것 그 가정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안 목사님이 허락을 안 해서 동의를 안 해서 한다면 허락 안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허락 한다면 개인적으로 갈수 있겠다. 한 하나이니까 복음 안에서 하나지요. 너 나 가릴 것이 없다고요. 그런데 그쪽에서 한계를 분간하니까 나는 관계없다. (저도 76년도 딱 10년 되는데요. 오늘 10년째라고요. 저도 만나본지가 76년도 4월 달부터 5월 달 6월 달까지 갈월에서) 제 공부도 되지만 제 받은 대로 사명이 있기 때문에 복음 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는 안 되지요. 어디든지 교파를 초월해요. (제대로 받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전에 계명산에 갔지요. 그 안 목사님도 거기 안 오셨거든요. 아 꼭 말씀을 들었으면 쓰겠는데 안 목사님이 허락을 안 하셔요. 한번은 또 안 목사님이 오셨어요. 계명산에 와가지고 말씀을 하시는데 듣고 허락을 안 하면 듣지도 않아 조심을 해야지. 여기도 허락을 안 해요. 사실 공부를 허락 안 하세요. 그렇게 너무 진리를 찾는 데는 염치 불구하는데요. 그런 것을 가려서 조심해야 하지만 영혼 문제 아닌가? (가린 것은 없고요. 자기들 스스로가 받지를 못하니까) 허락이 없었기 때문에 차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말을 못하겠다고 (그건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오시는 것을 막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정황이 아니라 김 선생님이 같이 가셨거든요. 제 말이 아니라도 김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할 텐데 요구를 안 하니까 쓸데없는 말인가 말하자면 한계를 두지말자. 그거야, 복음 안에서 하나다. 마음을 넓히고 (주위 환경이라는 그렇게 되어가지고 몇 번 가고 싶어도 매여가지고 못 가게 된 거지요.)우리는 때가 매여야 되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요. (경계심을 두어서 처음에는 저희들이 모두 그걸 두고두고 생각하고 갈망하고 인위적으로 간 거지요. 그러니까 그 말과 행동이 사실은 자꾸 끌리기 시작한 거지요. 다시 돌이키고 그것이 그것이다. 그걸 가지고 경계 목사님 경계에 절대 안하시지만 스스로가 받을 처지가 그 당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간다는 말이 아니고 그만큼 간격이 없어야 된다. 그 말이야. 사실은 김 목사님의 계통 그 교훈을 받는 편으로서는 지금 네 번째 안 목사님이 네 번째 거기서 갈려나온 셈인데 그분이 제일 지금 그 통하는 데는 안 목사님이거든. 또 계명산 생활이나 두 번째 나간 세 번째인가? 이 한영 세 번째 거기는 신교 교회하고는 잘 안통해요. 그쪽은 그쪽대로 경건하지만 다른 사람하고는 융통이 안 돼. 이쪽사람 있을 때 계명산 에 와서 며칠 기도하시는데 그렇게 (조금 크게 해주세요. 그냥 듣고 있는데) 녹음도 되요. 하지 말라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나중에 봐서 안 되어요. 녹음은 그것만 그때 한번 오신 뒤로는 제가 한번 집회에 갔었지요. 그런 것보다도 뜻으로 서로 통해야 너무 그 내가 받아있는 것만 옳다고 하니까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이 밖의 세계를 안 받아 들이려고 자기 하나 지키는 데는 좋은 점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터놓고 널리 하려면 그것은 안 돼요. 다 받아들이고 취사선택에 없지요. 아닌 것을 버리고 넓게,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서부터 제가 보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만한 때에 내 말을 들으셨고 때가 있단 말이야. 자비를 베풀만한 때에 내 말을 들으셨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구원해주었다.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의 비위를 화하게 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일군으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내었고 매질과 감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내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내었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고통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갖은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이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갖은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몸 하나인데 몸도 바쳤으니 자기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영적인 것은 모두 자기 것이야. 하나님도 자기 하나님 세상 우주만물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 되어요.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가 자기 것이 되어버려.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니까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야. 상속권이 그래 아무것도 없어야 모두 갖지요. 다 버린 사람은 다 차지해요. 자기를 버리면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갖은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 고린도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마음을 열어놓아야 해. 활짝 열고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어, 자기가 안받아들이려고 하나님의 것도 안 받아 들인다고요.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개역에는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그랬지요? 구역에는 나의 사랑을 갚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바울사도가 펼쳐놓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끼쳐놓은 사랑을 갚아줌으로서 마음이 넓어진다. 그래 내가 자꾸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할 때 마음이 넓어져요. 내 욕심을 채우면 채울수록 좁아져요. 나만 옳다고 하면 할수록 좁아져 그러면 자기가 설 곳이 없어요. 너무 좁아서 발하나 들여놓을 곳이 없어요. 남의 죄만 비판하고 나만 옳다고 할 때는 자기하나 설 곳이 없으니까 다 용서하고 넓게 널어놓으면 어디가 다 들어가도 모자라니까 좁기는 마음같이 좁은 곳이 없고 마음같이 넓은 곳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또 인생이 마음같이 더러운 곳이 없고 인생이 마음같이 깨끗한 곳이 없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 이상 깨끗한 곳이 없고 악마를 모시면 그 이상 더러운 곳이 없어요. 악마를 모시면 만물보다도 부정하고 더러운 것은 인간이야.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마음이 좁아지는 것은 자꾸 내 의욕에서 좁아져요. 나만 옳다. 그러니까 마음은,

 

 

마태복음 6장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 1절서부터 보지요. 자선에 대한 가르침, 남에게 줄때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어째 왼손도 자기 손이고 오른손도 자기 손인데 어찌 한손이 한 것을 한손이 모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왼손이 하는데 오른손이 어떻게 몰라요? 자기 몸인데 한 머리에 지체에 따라서 하는데 왜 몰라요? 그것이 무슨 말이야? 소화 테레사 성녀 자서전에 보면 깨달음에 보면 내 것이 아닌 것으로 하라고, 내 것이라 하고 주는 것은 욕심이야. 자기 것이라고 그러니까 깨달아집니다. 내 것, 내 것을 줘요. 내 것을 무엇 하러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멸시가 되지요. 내 것을 너에게 주마. 그게 교만이야. 자선은 참 버리기보다 어렵단말이야. 제대로 쓰려면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하라. 몸도 하나님의 것 몸도 하나님의 것 자기 몸도 자기 몸이 아니지 않아요? 하나님께 바쳐. 그 어째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겠습니까? 내 것이라고 내 것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그 자선은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 기도하는 가르침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의 모퉁이에서서 기도하는 일을 좋아한다. 남이 보기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아 저사람 기도 잘한다. 경건하다. 칭찬 다 받았다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는 것이야. 그러면 네 아버지를 뵈올 때는 마음을 탁 열어놔라. 하나님의 것을 취해,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지 너무 침범 할 때는 이렇게 가둘 수도 있어. 그렇지만 자라면 한문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 배우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번에 잘 못 구하는데 대개 임금이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상대를 안 하고 백성도 자기편이 되지 않을 때는 사귀지 않아버려. 그래 자기만 챙긴다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나무뿌리만 먹다가 그대로 죽었다. 그런데 그 덕은 그대로 있지요. 하지만 널리 전파는 못해. 그런데 이 뭐라는 사람 또 하나있다고 그 사람은 백성이고 임금이고 아무리 불의했더라도 하나님이 내신 것이지 또 하나님께서 내신 백성이다. 내가 먼저 깨달았으면 그런 사람을 깨우칠 사람이 있지 않냐? 속에 들어왔다. 마음이 넓지 않아 다 한 몸같이 복음하고 똑같아. 그 영으로 하나님이 다 역사하신다고 진리는 다 하나님이니까 다 한 몸 같이 사랑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교훈대로 아니요 내 백성 내 임금 하나님이 내린 임금이다. 똑같이 생각해, 그만큼만 봐야지.

 

 

창세기 1장 1절에 가서 다 들었다. 그렇게 말합니다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2절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태초 들어가고 하나님 들어가고 하늘과 땅이 창조 다섯 종목 이지요. 처음 하나님의 역사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창조했다. 그것이 다 들어갔는데 이것이 우리 영과 육을 하나님이 내셨다. 우리 몸이지만 그런데 여기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에는 죄와 복음이 다 들어있어, 2절에 가서 3절까지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3절이 간 데가 어딘가 하면 고린도후서 4장 6절이 되어있거든. 그 다음에는 태초 욥기 38절 4절서 7절 쭉 나오지요. 요한복음 1장 1절서 3절하고 사도행전 14장 15-17절 24절 이하 고린도전서 1장 16절부터 17절 히브리 1장 10절 묵시 4장 16절, 태초에 천지창조에 대해서 쭉 나오는데 여기 혼돈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4장 23절에 나오지요. 그리고 혼돈이 한절 또 빛에 대해서 그리고 창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2절은 땅이 땅은 우리 몸이에요. 몸과 정신 그러니까 혼돈이라면 정신이 섞여 있어요. 혼잡해요. 그래서 분별이 안선다고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정신상태가 혼돈상태 이럴까? 저럴까? 갈 바도 모르고 길도 못 찾고 그런 상태를 말하고 또 공허는 비었다는 말인데 빌 공(空)자 비었다는 말은 진리가 없어, 참이 없어, 생명이 없어, 있을 것이 없다고 무슨 죄만 있어. 뭐냐 하면 흑암이 있어. 흑암 깊은 죄, 죄의 깊음 이것이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그러면 죄가 폭로된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거든. 2절 안에 성경이 전부 다 들어있다고 2절 3절 안에 빛은 예수이고 말씀이고 요한복음 1장 맨 처음 태초란 말이야.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나님인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 삼위가 말씀이에요. 말씀은 처음 맨 처음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도(道)라 말씀이라 로고스라 예수란 말이지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 말씀에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의 빛이라. 예수가 참 빛이라. 그 말이지요.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과 같이 생명의 빛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어두움을 깨닫지 못한다. 어두움이 빛을 용납하지 않더라. 그전 성경에는 용납하지 않더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용납은 조금 가능성이 있지요. 용납, 내가 빛을 받아 모셔 들이고 싶은 마음은 있지 않냐? 그 있으면 가령 여기 말씀하고 로마서 1장에 말씀하고 같지요. 1장 19절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해서 알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과 같은 특성을 나타내고 있어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있게 하셨어. 그러니 깨달을 수 있게 하셨는데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섬기지 않았다고 알면서 양심은 있어. 그렇지만 가책을 느끼면서도 무시해버려. 알만하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을 찾으면 찾게 되어있는데도 욕심 따라서 살려니까 안 된다고 그래. 사람은 자꾸 핑계를 대요. 핑계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두움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겨버려 용납하지 않아, 용납하면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찾게 되었는데 안 찾아요. 용납 안하려고 그래, 왜 그러냐? 빛을 맞아들이면 자기 어두운 생활이 좋은데 죄의 생활이 좋은데 그 생활을 못하게 되지 않아요? 어두움은 자꾸 빛을 자꾸 가려요. 빛의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빛의 목적 어디다 쓰냐? 빛을, 빛을 어두운데 비추는 것이 목적 아니에요. 그런데 어두움이 빛을 어두운 데를 비추는 것이 목적이니까 빛은 그러지 않아요? 복음은 한계가 없어요. 어디든지 가서 비추고자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래 율법적인 행위가 빛을 막아요. 복음을 싫어해요.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고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자기가 허물어 질까봐서 그것이 문제에요. 그래 당파 자체가 벌써 불건전 해. 없앨 수는 없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줄을 알고 파는 초월해야지. 다 한 지체에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생각해야지, 나만 옳다고 하면 자기가 그 옳다고 하는데 갇혀버려요. 자기가 자유가 없지, 스스로 자기가 감옥을 만들어 가지고 갇히는 거지. 6절,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다. 말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삼위가 곧 빛이에요.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 교육으로나 무슨 수양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이런 제목입니다.

 

 

아담 시조부터 인간은 타락 성을 지니고 있다. 얼마든지 범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요. 타락 성 그런데 3장에 가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류가 타락하다. 3장에서 부터인데 1장에서부터 있어요. 그것이 흑암 자체가 범죄의 상징이고 또 로마서 3장에 3장이 아니라 1장 18절 이하가 인간의 타락상 그랬다고, 공동번역은 제목이 붙어있어요. 인간의 타락상 로마서 1장 그러니까 여기하나 볼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행함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해서 알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움으로 흑암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24절이요.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이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24절이요.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는데 사람은 어떻게 교육으로 바로 잡아줄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는데 대답해 보십시오. 사람은 바로 잡아줄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을 모두 교육으로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는가 말이에요. 하나님은 내버리셨는데 사람은 할 수 있어요? 못하겠지요? 못하는데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 같이 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자기가 교육 시켜야 하는데 자기가 못시키니까 차라리 학교에 갖다가 맡겨버린다고 암만 대학 총장이나 대학 교수라도 자기 아들은 자기가 직접 안 가르쳐, 집에서 못하고 다 학교에 갖다가 맡겨버려. 이제 자기가 못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래 남에게 다 맡겨버려요. 그러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내버려 두는데 사람이 어떻게 하냐? 26절입니다. 25절 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이십니다. 아멘. 26절, 인간은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끄러운 욕정 정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어떻게 욕정이 안 빠지게 정욕에 안 빠지게 어떻게 되겠어요? 하겠는가? 안하겠는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내버려 두셨는데 사람은 욕정에 안 빠지게 정욕에 안 빠지게 하겠어요? 자기 자신도 정욕에 안 빠질 수 없지요. 빠지지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자기 결심만으로는 안 된다. 그거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것을 사람이 어떻게 교육이 안 된다. 27절 볼까요? 여기 놔두고 28절,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보려고 하면 되겠는데 그걸 알아보려고도 안 해.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4절 26절 28절 하나님이 이렇게 타락하도록 자유를 주셨는데 사람들은 타락 안 되도록 하겠냐? 그거에요. 뱀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뱀이 뱀이지 사람 되겠어요? 안되지요.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짐승이면 어디까지 짐승이고 원숭이를 아무리 변화를 시켜도 원숭이가 변화해가지고 사람이 되었다고 그러는데 지금까지 그런 증거가 없지 않아요? 사람 모양이 비슷하니까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데 어떻게 원숭이는 원숭이지 사람이 되겠냐? 그렇게 변화된 과정은 없거든요.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잘하고 할지언정 말입니다. 개도 훈련시키니까 산수 계산도 다 합디다. 숫자를 쭉 늘어놓고 몇에서 몇을 빼면 몇이냐? 답만 딱 물어 와요. 수십 개 무대에다 탁 꽂아놨어. 아라비아 숫자를 사람들이 입으로 누구든지 해도 다 알아 맞춰요. 강아지도 가감승제 하는 것 보태는 것 또 승하는 것 제법 빼는 것 다 하고 몇에서 몇을 나누면 얼마냐? 그래 딱 답을 물어와.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그렇게는 훈련을 시켜서 될 수는 있을지언정 사람은 아니라고. 창세기 1장으로 가서 범죄의 가능성이 벌써 창세기 1장 2절부터 있어요. 흑암 깊음 그러나 그것이 죄를 회개하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이 그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그 말은 어디를 보냐 하면 로마서 5장 현대인의 성경 아주 그건 잘되어 있거든요. 14절이에요. 12절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한 사람이 한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것이 죽음을 가져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세상에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으나 그 때문에 율법이 없어서 그때는 율법이 없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4절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이 지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 까지도 지배하여 왔습니다. 아담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모형 공동번역에는 원형이라고 그랬고 거기는 뭐라고 그랬지요. 표상, 표상이다. 그러니 아담은 범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스도의 그림자니까 본체가 아니니까 아담은 그리스도가 아니야. 그리스도의 둘째 아담이 이렇게 나타난다 하는 모형뿐이야. 비행기 모형가지고 날수는 없지 않아요? 사용은 못하지요. 모형이지 비행기 모형만 만들어 졌지, 비행기는 아니지 않아요? 쓸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마찬가지에요. 얼마든지 범죄의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창세기 1장 2절에도 있지만 2장에도 있단 말이야. 7절 흙으로 지었어. 흙 땅에 속해 있어요. 그런데 타락한 성품이 있어요. 땅에 것이니까 땅에 것 섭취해야 보존되지 않아요? 거기도 가능성이 있고 또 16절 17절에 그 법을 낸 자체부터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니에요? 법이 있는 것을 법을 뭐하려고 냈냐? 그거에요. 법을 낸 동기가 무엇이냐? 얼마든지 가능성이, 범죄 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을 내었다. 그 말이야. 저기 봐요. 디모데전서 1장 6절 이하 5절서부터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법대로 쓰면 선한 것이에요. 우리는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한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그러면 10절까지 법을 왜 내었어요? 어디다 쓰려고? 읽어도 얼른 답을 못해? 어디다 쓰려고 조목조목 많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하나만 해도 어디다 쓰려고 냈냐? 우리가 아는 대로 사람이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범죄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법을 냈어요. 법을 어기거나 반항하는 사람이나 불신자나 악한 사람이나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나 세속적인 사람이나 부모를 거역하는 사람이나 살인한자나 음행 또는 음행하는 사람이나 동성연애 하는 사람이나 유혹 꾀인다고 유혹하는 사람이나 거짓말쟁이나 거짓증언을 하는 사람이나 그밖에 다른 교훈을 어기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다시 어기는 사람들 그 밖에 여러 가지 교훈을 어기는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있어요. 선한 사람을 위해서 법을 낸 것이 아니에요. 그건 필요 없어요. 말씀대로만 살면 법이 필요 없다고 성경이 필요 없지 않아요? 나쁘게 사니까 양심대로 안사니까 그렇게 도적이 심하고 다른 사람들 침범 못하게 약자를 침범 못하게 하는 것 아니에요? 가둬놓은 것은 못하게 할 뿐이지 마음은 고치지 못하는 것 아니에요. 거기서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니까 법을 낸 것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동산 각종 나무 실과는 임으로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히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랬다고요.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그런데 이것이 어디 있냐 하면 이 나무는 어디가 세워져 있는 나무에요. 9절에 있지요.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더라. 중앙 가운데 있지요. 중앙이란 말이야. 그래 우리 몸에다 대면 어디에요? 허리 하체지요. 하체,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탐심의 우상인데 음란은 탐심의 우상인데 또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 골로새 3장 5절 땅에 있는 지체, 땅에 속한 지체, 그 중앙에 있는 거라고 그 지체 그것이 곧 우상이라. 골로새 3장 5절 읽어봐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욕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 악한 정욕 탐심이란 말이야. 음란한 마음이란 말이야. 그걸 징계하라 말이야. 그러니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것 아닙니까? 형상 만들지 마라. 그래도 거기서 사람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니까 정욕 따라 가지 말라는 말이에요. 과실나무를 하나 떡 만들어 놓고 그 과실은 쳐다보지도 말고 따먹지도 말라는 것 아니고 자기 지체 안에 있는 땅에 속한 지체란 말이에요. 그것 따라가지 말라. 그 영혼 따라가지 말라. 그 말이에요. 그런 법이 있는 것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법을 내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법으로 안 따라갈 수 있냐? 그러니까 내 놓았어. 그러나 이제는 안 따라 가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다니까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어요. 예수는 그런 은총을 받아야 된다. 그 말이에요. 특별한 은혜지요. 또 그 세 번째 가능성 창세기 1장 2절서부터 첫째 흑암 깊음 죄가 있으니까 물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있어요. 그것과 또 두 번째는 2장 7절에 흙이란 말이야. 흙이고 또 16절 17절에 금단 금령을 내렸단 말이야. 따먹지 말라는 그 법이 생긴 것은 벌써 가능성이 있기에 낸 것이에요. 그래야 나중에 심판할 수 있으니까 죄를 깨달을 수 있고.

 

 

또 3장에 가서 봅시다. 인류가 타락하다. 야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뱀이라하면 땅에 다니는 뱀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악이에요.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너희더러 그 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거기까지는 맞아요. 마음대로 따먹되 무엇은 말라는 건데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럼 여기 가감이 있어요. 가감 보태고 빼었단 말이야.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말씀이 글자를 보태고 빼는 것 아니고 그러면 여기 무엇을 개역대로 보면 3장에 무엇을 보태고 무엇을 뺐습니까? 여자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3절에만 해도 무엇을 보태고 무엇을 빼었습니까? 동산에 있는 나무 실과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보탰지요? 안 보탰어요? 또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뺐지요? 아까 창세기 2장 17절 보면 보태고 뺐단 말이야. 만지지도 말라는 말이 있어요? 없지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말하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없단 말이야. 그것 넣었고 보탰고 너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랬는데 여기는 죽을까 하노라. 빼버렸단 말이야. 무엇 뺐어요? 정녕 반드시 죽는다는 말을 빼버렸단 말이야. 가감을 했어. 그럼 가감한 것이 죄가 아니라 왜 그런 가감할 수 있는 그 마음 상태가 어떻게 되었냐? 어디까지나 자기를 변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또 가감을 하는 마음 상태가 어땠기에 가감을 했냐? 감정이 맞지를 않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비위에 거슬려 부에가 났어. 또 자기를 용서하는 것 봐요. 반드시는 아니고 죽을까 하노라. 반드시를 빼어버렸어. 마음대로 자기 마음대로 해버렸어. 하나님의 감정에 자기감정이 거슬려 마음에 맞지 않으니까 하는 소리야. 그러니까 가감을 해버렸어. 마음 상태가 벌써 불신상태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거야. 자기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 벌써 사탄의 주사 기운이 들어왔지요. 술 안취하면 아주 선하고 좋은 사람이 술 취하면 막 발악을 해. 주사기운처럼 말이요. 독침을 받았어. 독사의 독침을 맞은 거야. 독이 올라서 하는 말이에요. 가감을 했어. 그러면 저기 묵시록 끝장에 가감을 말라고 그랬지요? 다른데도 있고 어디 가봅시다. 묵시 끝장 18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보태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자기 욕심 따라 살면 마음대로 빼고 보태고 말이야. 그러면 거기 관주가 신명기 4장 2절에도 있고요. 12장 32절에도 있고 신명기 4장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가 가감하지 말라. 보태거나 덜거나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3장 32절이에요. 신명기 12장 32절에도 있고 민수기 24장 18절, 거기는 가감이 아니거든. 그 만두고 여기까지 범죄의 가능성에 대해서 1장 2절 2장 7절 또 2장 16절 17절 세 번째 이것은 네 번째 창세기 3장으로 가서 보태고 빼고 네 번째 범죄의 가능성에 대해서 타락성의 증거지요. 네 번째 또 그다음에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에 대해서 그러니까 여기 다섯 번째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다. 생각이 났어. 주사 기운이 더 나왔어요. 뱀이 주사를 맞은 증거가 자꾸 드러나 탐심이 더 생겨버렸어요.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자꾸 달라진다는 겁니다. 여기도 다섯 번째에요? 여섯 번째에요? 탐심이 생겼다는 것 더 생겨, 보면 볼수록 탐심이 더 커져, 남편에게 주었다. 7절,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에 야훼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나님 눈에 띄지 않게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다. 여기 인제 여섯 번째 지요? 숨었어요. 그러면 여기 무엇이 더 범죄의 가능성이 결과가 자꾸 나타나는데 무엇입니까? 8절이요. 하나님의 낮을 왜 피하게 됩니까? 선들 바람이 불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쓸쓸해. 가슴이 쓸쓸해. 냉정하단 말입니다. 또 거기 타락성이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왜 하나님을 피하냐 말이야. 하나님이 또 음성이 왜 듣기 싫어요? 이 자체가 굉장히 타락 성을 지녔어요. 이것이 첫째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영적으로 죽음이에요. 첫째죽음, 그러니까 여기 말씀 묵시 20장 6절에 이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둘째 죽음도 있고 첫째 죽음도 있지요? 둘째 죽음이 있으면 첫째 죽음이 무엇이에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또 둘째 죽음이 무엇이고 첫째 죽음이 무엇이냐? 또 첫째 부활이 무엇이냐? 인제 둘째 부활도 있을 것 아니야? 첫째 부활 둘째 죽음이 있으니까 첫째 죽음이 있어요. 첫째 죽음이 아까 창세기 3장 8절이라고 하나님을 떠난 것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무엇을 했나요? 가인이 잠깐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안 떠났는데 자기가 잠깐 떠났어. 죽이려 하는 사람이 없는데 무서웠어요. 항상 하나님 앞에 아뢰었지요? 자기 죄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죽을 것만 걱정해요. 친 아우를 죽여 놓고도 자기 죽어야 마땅할 것인데 아우를 죽였으니까 자기도 죽어야 마땅할 것인데 자기 죽을 걱정만 해. 자기 죄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하나님이 용서를 해. 너를 죽이는 사람은 칠 배나 악하겠다고 염려가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영적으로 첫째 죽음이에요. 그러면 그것도 디모데전서 5장 4절 5절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의로운 과부는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항상 하나님께 간구함이라. 6절, 그러나 향락에 빠진 과부는 살아있다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향락에 빠진 과부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것이다. 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송장이 어떻게 송장을 치우겠어요? 그 말은 아직 세속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에 있는 사람끼리 하게 놔두고 너는 살았다면 산사람 따라와야 하지 않냐? 그 말이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앞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 세상일에 매이느냐? 그 말이야. 사사로이 매이지 않는다. 군인으로 뽑힌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사람인데 더군다나 우리는 천국 군인인데 세상일에 매이느냐? 그러면 둘째 죽음이 무엇이냐? 첫째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둘째 죽음은 무엇이냐? 야고보 1장 15절 이에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 무엇이냐? 인간이야, 전 인류가 이거에요. 죄를 따라 사니까 죽을 죄 덩어리를 또 하나 낳고 죄가 자라면 사람이 크면 병들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생로병사 낳으면 늙어져, 그래 늙으면 죽는다고 그런 것이지. 그런 것만 낳았지. 욕심 정욕 따라 산 결과가 그것이지. 사람은 항상 그냥 숨 끊어져버려.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이 둘째 죽음이라고 욕심을 따라 따먹어 버리니까 그 결과야. 죽을 것만 낳았어. 죽겠다 결론은 그거야. 사람은 죽겠다. 허무하다. 그걸 깨달았으면 되요. 회개하고 돌아가라고 첫째 죽음, 그러면 9절서부터 야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몰라서 부른 것 아니야. 자기가 피했지. 하나님은 거기 계시는데 아담의 마음속에 있어요. 계세요.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지요. 왜 두려우느냐 그거야. 말씀을 어겼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다. 그래 두려워 그때부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고 피한다고 어디 가서 안심하고 살 것이냐? 어디 가서 숨을 것이냐? 아무리 산골에 파묻혀도 숨을 수는 없대요.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알려주더냐? 창세기 2장 끝 절에는 벌거벗으나 부끄럽지 않았는데 왜 여기서는 부끄러워요? 그래 2장, 거기는 무엇입니까? 벌거벗었는데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거든, 이 세상 부귀영화 다 벗어버려도 부끄러운 것 아니에요. 그러면 세상을 입었어. 그러니까 예수 옷은 벗어버렸어. 그러니까 부끄러운 거야. 말이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려는지,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