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스위치백 기차를 타다 : 복음과 믿음
동해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태백으로 가는 철도길에 스위치백길이있어 10여년전 까지 운행하던것이 지금은 관광지로 되어있어 지난 9일 다녀왔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들에 끼어 화창한 봄날 꽃과 신록을 만끽하였다. 한결 젊을을 맛볼수 있어 10년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스위치백은 가파른 고개를 기차가 오를때 선로를 변경하는 스위치로 다음 차선을 바꾸어 뒤로 가는 것을 말하며 태백산맥을 넘을때까지 몇차례 반복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하이원에서 삭도마을 까지 왕복이며 삭도마을에서 머물고 쉬다가 되돌아온다. 삭도마을에는 식사는 먼저 주문 예약해야 하며 도께 탄광 체험장과 탄광 장비와 생활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복음과 믿음
1997. 8. 14. 오북환 장로님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 한가지 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 와서 인간의 힘으로 마치려 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겪은 모든 경험이 다 헛일이었다는 말입니까?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서에 성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하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서에 율법 서에 기록된 모든 것은 꾸준히 지키지 않으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은 사람을 살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을 믿음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키므로 산다고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또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약속, 형제 여러분 세상에 관례를 들어서 말해 봅시다. 사람들이 맺은 계약도 한번 맺은 다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거나 무엇을 덧붙이거나 할 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때에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킨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맺어주신 계약이 430년 후에 율법이 생겼다. 해서 소멸되거나 그 약속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근거로 해서 상속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벌써 약속된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에게 상속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 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면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 까지 갇혀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후견인이라는 말은 어떤 데는 안내자랍니다. 안내자,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속에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3장을 다 읽었습니다.
이 시간에 특별히 3장을 택한 것이 아니고 이아침 여기 모임에서나 혹은 광주 가서도 로마서 1장서부터 쭉 봐 나온 차예요. 그래서 어제 갈라디아 2장 말씀인데 그러니까 읽기만하고 문제가 없으면 그냥 읽고 지나가니까 한 30분 이내서 되고 혹은 한 시간 한 시간 반은 조금 없었어요. 이번 시간에는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이랍니다. 그 이상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에 제 자신은 별로 할 말이 없어요. 그 전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많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할 말이 없는데 할 수 없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제 2장에서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믿음이 뭐냐는 거지요. 믿음이 뭐냐? 갈라디아 2장 19절 20절에 우리가 믿어도 믿음이 뭐냐고 물으면 믿으면 믿는 거지, 믿음이 따로 있느냐? 대답을 잘 못하지 않아요? 믿음이 무엇이냐? 분명이 믿음이 이런 것이다. 말해야 되거든요. 나라는 것은 율법에서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믿음이라 말이야. 다시 보면 믿음이 뭐냐? 하는 건 확실한 말이 되어있단 말이야. 믿음이 뭐냐? 여러 가지 히브리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되어있어요. 제일 간단하게 여러 가지 말씀이 있는데 제가 봅니다. 나는 이미 율법에 손에 죽었단 말이야. 죽었어. 율법에 죽었어.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살아있지 않아요? 무엇이 죽었냐? 몸이 죽었다는 말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믿는 생활, 믿는 것이 무엇이냐? 믿는 생활이 무엇이냐? 그리스도가 사는 생활 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는 생활, 그리스도가 살아 움직이는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전부 내가 살아서 움직이지, 그쪽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수라도 사랑만 있어야 될 텐데, 이유가 없이 사랑이 없거든요. 믿는다 해도 내가 있으니까 사랑이 없어요. 그리스도가 있어야 사랑인데 내가있으니 사랑 있느냐? 말이야. 내가 안 죽었어요. 바로 믿는 것은 나는 없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거야. 사랑만 있는 거란 말이야. 20절부터 다시 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것은 몸은 살고 있어요.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나는 없고 나는 죽고 율법에 의해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 생활에는 항상 내가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내가 머리야. 그건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또 2장 11절부터 14절 까지는 베드로사도가 바울사도에게 책망을 받았단 말이야. 면책, 바울 사도는 가짜라 참 제자가 아니다하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나야말로 참 제자다.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로서 직접 받은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 것이 갈라디아서라고. 갈라디아 전체는 쓴 동기는 바울사도는 가짜다. 하는 것과 동시에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이 있다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는 갈라디아서지요. 그래 내가 전하지 않은 복음을 누가 어느 누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내가 전한 복음이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 그렇게 아주 너무 혹독한 말을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철저한 자기가 전한 복음은 참이다. 진리이다. 했어요.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제자로 봐서는 수제자 아닙니까? 수제자인데 제자라고 되지 않은 예수의 죽은 뒤에 나타난 이 사람이 어째 또 연령으로 보더라도 나이도 젊고 그런 아주 후배가 선배를 책망할 수 있냐? 빌립보 2장에 보면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는데 후배가 선배를 책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만하냐? 그렇게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책망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다른 성경에는 바울사도의 전한 복음이 베드로 사도에게 인증을 받았다고 인증을 해준 거란 말이야. 옳다고 그대로 전하라고 그런 뜻이 되어있어요. 그래야 맞아요. 왜냐하면 사도행전 10장에서 보면 9절서 밑에 읽습니다. 10장 베드로가 본 영상, 9절입니다. 길을 가던 일행이 그 이튼 날 욥바 근처에 이르렀을 즈음에 베드로는 기도를 드리려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때는 낮 열두시쯤이었다. 아래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시장기가 들어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무아지경에 빠져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다. 자기가 있냐? 없냐? 자기를 의식 못해요. 내가 있더냐? 없더냐? 무아란 말이야.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는 온갖 네발가진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이 들어있었다. 그때에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여왔다. 베드로가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와 같은 말이 세 번 오고 간 뒤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그때 무슨 뜻인지 확실히 모르지요? 무슨 뜻인가? 이것이 뭐냐 하면 고넬료 에게 가서 복음 전하라는 뜻인데 고넬료는 이방사람이거든. 이방 사람은 유대인하고 교제를 못하는 거예요. 지금 이방 사람은 쌍놈 취급을 받았어. 유대인들은 양반인데 어떻게 그런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했는데 이방사람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 깨끗한 건데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건데 그 뜻이거든요. 그래서 인제 고넬료의 심부름꾼들이 와서 청할 때 그때 따라오면서 생각이 되었어요. 그 환상의 뜻을 거기 좀 봅시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대면, 베드로는 자기가 본 영상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몰라요. 무슨 뜻인가 하고 혼자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와 문 앞에 서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불러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지 물어봤어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 안하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22절 다시 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내려가서 당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나요. 어떻게 오셨소? 하고 묻자 그들은 고넬료라고 하는 백인대장이 대장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거룩한 천사에게 선생님을 집에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받고 우리를 보낸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 22절에 현대어 성경에는 ‘거룩’이라는 말이 빠졌어요. 그걸 빠진, 크게 보니까 상관이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을 넣고 빼고 하는데 굉장한 차이가 있어요.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복음을 받기 전에 고넬료 생활이 하나님께 상달된 기도 생활이 바로 했거든요. 구제도 잘하고 유대인 에게 까지도 칭찬을 받고 바로 살았어요. 그런데다가 베드로를 청해 다가 복음을 들어야할 필요가 뭐냐? 그러지 않아도 잘 사는데 그러니까 복음을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기 전과 후와 무엇이 다를 것 아닙니까? 똑같을 바에야 뭐 하러 베드로를 시키겠냐 말이거든. 생활의 달성이라 어제는 세속과 확실한 구별이 없이 살았습니다. 거룩 이라는 말은 구별이거든. 또 쉬운 말로 하면 순결이고 순결 세속과 달라요. 성도는 세상사람 생활과 달라야 한단 말이야. 예수님과 같은 생활을 한다 말이야. 마음이나 생활이나 신앙의 생활이나 그래서 마가복음 8장 34절 38절, 38절이 관주가 되어있습니다. 거기 한번 보면 마가복음 8장 34절,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믿는다면 이 말씀부터 순종해야 하지 않겠나? 자기를 버리라고 하는데 안 버려요. 그러고 무엇을 지킬 것이고 무엇을 하고 그런 것만 생각해. 첫째 조건은 자기를 버리는 거야. 그게 믿음이야. 자기를 옛 사람을 죽인단 말이야. 그런데 믿는 것이 무엇이냐? 순종이야. 자기를 버리는 순종,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 말씀만 실행할 수 있으면 좋지요. 이 말씀을 실행하지 못해, 불순종해요. 자기를 버리지 않아요.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또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말이야.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는 절개 정절 절개가 없고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거룩한 천사, 우리 현세에는 숨 끊어지기 전에는 아무런 죄를 지었더라도 숨 끊어지기 전에 회개해서 순간이라도 거룩해 졌다면 그럼 구원이 되는 거라고, 일평생 아무리 깨끗하게 살았더라도 그렇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 말이야. 그러니까 항상 구원은 세 가지이거든요. 세상 창조 전에 구원이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최후 마지막에 구원이 틀림없지 않아요? 창세전에 되었으니까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 구원이 있다면 현재 구원이 제일 중요해요. 현재 죄의 종살이에서 못 벗어나요. 다시 말하면 자기감정을 초월을 못해요. 속된 감정, 땅에 속한 마음, 자기를 못 이겨요. 자기를 버리지를 못해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가 하나님께 상달될만한 기도와 생활을 했어도 세상과 구별 되는 거, 거룩은 안되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베드로사도는 장소도 틀리지요? 시간도 틀리고 장소도 틀려요. 시간은 베드로 사도는 정오 한 낮이요. 낮 오(午)자는 말 오(午)자입니다 말라는 거예요. 낮에는 자지 말라. 밤에도 깨어있어야 하는데 낮에까지 자버리면 되겠냐? 그 말입니다. 자지 말라는 거예요. 말은 항상 서있어야지 타고 다니는 말이 밤에 누우면 그건 못써요. 그런 버릇이 있으면 뚫어가지고 천장에 딱 매어놔요. 못 눕게 눕지 말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자지 말라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와 자지 말라. 남자는 여자를 보지 말라. 그겁니다. 밤 열두시는 낮 열두시하고 다르지 않아요? 밤 열두시는 자시(子時)라고 그래요. 자시(子時) 자시는 아들 자(子)인데 쥐자 요. 쥐 생활 말라는 거예요. 그게 거룩이란 말이야. 또 시간도 다르고 장소는 고넬료는 지붕 아래겠지요? 어딘지 모르지만 지붕 아래고 베드로는 옥상입니다. 지붕 위입니다. 지붕 위에 스라브 위에 그럼 인류 물질계를 초월했다는 것이야. 거기서 영계의 소식을 받아가지고 땅에 속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한 거예요. 하늘로 올라오라 땅의 일 그만두고 회개하고 올라오라. 그겁니다. 복음과 율법은 확실히 달라요. 율법은 땅에 속한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무엇을 지켜서 구원한다는 행동이에요. 자기 행동 복음은 그거 아니에요. 이미 땅에 속한 정신 그것은 죽고 예수의 마음을 갖은 거야. 예수님의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를 복음이라 그래요.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 의인 부르러 오신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를 한번 누가복음 15장 1-2절만 봐요.
부정직한 세리들과 소문난 죄인들이 가끔 예수의 설교를 들으려고 왔다. 자 우리 한분 한분이 여기 모인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왔는가? 그겁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러 왔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도덕설을 들으러 왔는가? 무엇이냐? 가끔 예수의 설교를 들으러왔다. 소문난 죄인들이 무엇 하러 예수의 설교를 필요로 하는가? 말이야. 죄인들이, 그러면 예수께서는 이런 멸시받은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멸시받은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하시고는 하였다. 설교를 들으러 나오니까 예수님은 대 환영이야. 죄인 구하러 오신 예수하고 어서 오라고 식사도 같이 했다하면 뜻이 같다는 말 아닙니까?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완전히 한 식구야 통했어요. 바로 한 형제가 되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이 일을 두고 빈정거렸어요. 투덜댔어요. 원망 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알아봐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 학자들은 예수하고는 전혀 천만년 거리가 멀어요. 몰라요. 모를 뿐만 아니라 반대를 한단 말이야. 원수 시 한다. 그러니까 천국 복음은 안다는 사람과 똑똑한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철부지 어린애들에게 나타내신 것이 옳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이 많이 아는 사람에게 나타내야 할 텐데 율법학자들에게 안다는 사람과 똑똑한 사람들에게 숨기신다. 천국 복음은 철부지 어린애에게 나타낸다. 또 누가복음 11장에 같으면 부자와 나사로가 있는데 나사로는 일자무식이에요. 배운 것도 없고 배울 수 있는 형편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고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갔냐? 이거야. 믿었다는 증거를 생활로는 하나도 찾을 수 없어요. 그래 부자에게는 의식적으로 믿은 증거를 찾을 수 있어요 아브라함 할아버지 아브라함더러 아버지라고 그랬어. 할아버지 입으로는 잘 믿었어요. 마음으로는 안 믿었어요. 그래 부자니까 지옥가고 가난하고 거지니까 천국가고 그거 아니고 믿음이 있고 없는 것뿐이야. 나사로는 비유지만 마음으로 진짜 믿는 거예요. 외모로는 하나 믿는 거 없지요. 외모로는 교회 갈수도 없고 성경 볼 줄도 모르고 찬송 부를 줄도 모르고 마음으로 믿는 거예요. 마음으로, 사람은 몰라요. 부자는 겉으로는 잘 믿는 거라고 그걸 비유한 거라고 하나님은 마음에 계신 하나님이지 겉에 계시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 혹 이 자리에도 말씀이 들렸다면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겁니다. 오기는 왔어도 안 들렸다면 내 자유로 온 것이고 말씀은 하나님 말씀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말씀이고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도 예수님이 그 입을 쓰세요. 또 받는 편에서도 예수님이 듣게 하셔야 된다고 증거는 그러니까 양쪽이 다 책임이 있어요. 못 듣는 것은, 먼저는 증거 하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예수님이 나를 저를 쓰셔서 말씀을 한다면 듣는 편에서도 예수님이 듣게 하신단 말이야. 그런데 듣는 편에서도 내 귀에 감정의 귀로만 들으려면 소리는 들리지만 뜻은 모른다. 그거야. 확실히 깨달아 졌으면 그건 분명히 예수님이 듣게 하신거야. 예수님이 듣게 하셔서 들려졌다면 틀림없이 생활은 변화됩니다. 정신이 변화됨과 동시에 생활은 변화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자립 골로새 4장에 가서 있거든. 11절 12절에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는 것으로 굳게 서라. 그래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아는 것에 따라서 그 정신은 바로 선 겁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과 12절은 경제적인 자립이에요. 물질로도 남의 것 털끝만큼 의지할 필요가 없어요. 내 것 주었으면 주었지 의지할 필요가 없어요. 없을수록 더 잘살고 그게 자립입니다. 정신적인 자립이 정신이 바로 서있으면 생활은 필연적으로 됩니다. 생활부터 만들려고 하니까 정신은 세속에 속해가지고 생활만 만들려고 하니까 헛수고야.
사건 따라서는 사건대로 보면 왜 책망을 받았냐? 예루살렘에서 오는 사람들이 주장하니까 그들 때문에 슬며시 이방사람들하고 교제하다가 끊었거든 음식을 먹다가 물러났거든. 그걸 보고 복음답지 않고 않다고 책망을 했거든 베드로사도는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아직 어리니까 그 사람들이 받을 책망을 베드로사도가 받아준 거예요.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고넬료 집에 이방 사람에게 복음 전하라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대로 전한 것 잘못한 것 없어요. 직접 하나님의 게시 받아가지고 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형제 중에 동생 어린 사람을 잘못한 걸 매를 때릴 수 없으니까 형을 때려요. 형을 유대인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유대인을 택한 것은 무엇이냐? 매 때리기 위해서 택한 거야. 매 때리기 위해서 아모스 3장 1-2절을 보면요.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쳐서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그 족속들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 너희만 알아졌다. 그건 매 때리려고 그래 왜냐? 이방사람들이 정신 차리라고 형을 때려 이방사람들은 동생들이야. 어리니까 이방 사람은 때려서는 안 되거든. 회개를 못해요. 그러니까 형을 때린 거예요. 그걸 보고 깜짝 놀라서 동생이 회개하는 거야. 이스라엘이 뭐 특별한 거 아니에요. 잘못한 거 가지고 매를 때리면 들보가 기둥을 치면 들보가 울린다. 그 말이거든. 이스라엘 선민이라고 자랑할 것이 뭐냐? 하면 매 맞은 거예요. 매 맞은 거 그럼 갈라디아 2장은 그렇고 바울사도의 전한 복음이 베드로 사도에게 인증을 받았다는 이 책망 그것뿐 이에요. 그러니까 무엇과 같으냐? 정월보름에 널뛰지요? 널, 탁 굴리면 낮아지면 낮아진 만큼 한쪽이 높아지는 거야. 바울사도가 베드로사도를 책망할 때 율법적인 생각 같으면 교만하지요? 실제로 교만하지요? 교만해 선배를 책망했으니까 하지만 책망한 만큼 자기는 더 낮아진 거예요. 율법은 책망하면 할수록 교만해져요. 자꾸 말씀을 왜 할 용기가 자꾸 없어지냐? 하면 하면 해놓고 자꾸 교만해 지거든요. 그 말씀에 대한 책임을 안 져버려요. 내가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해야 할 텐데 실행을 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니까 교만해져버린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증거 해놓고 교만해버려. 그러니까 이 현필 선생이 무엇이 다르냐? 굉장히 책임을 지는 거예요. 함부로 말을 못하시거든. 한번은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을 너무 의로우니까 감당을 못하니까 자꾸 이 선생님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시간에 뭐했냐하면 그 앞날 조금 다른 분하고 이 현필 선생하고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조금 변론이 있었어요. 조금 그래가지고 강사 되신 분이 내가 잘못 봤구나. 남쪽에서 새싹이 돋은 줄 알고 와봤더니 내가 잘못 봤구나. 교만하다. 그렇게 본거에요. 그래가지고 아침에 말 안 해요. 이 선생도 안하지요. 안하고 있으니까 시간은 지나가는데 이 선생 인제 광주로 와야겠는데 도중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합디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그 선생님을 뵈었는데 뭔 말을 하실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 기도문 같이 죄인 중에 나는 죄인이다. 그 말만 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이 탁 돌아서서 손을 잡고 말이요. 나 오늘 세례 받았소. 서로 잘한 것 냈더라면, 더 사실로 증거 한 거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만큼 이 현필 선생은 말씀에 책임을 져요. 책임을 말씀전한 그대로 이상의 실천하지 않는 말은 말 안 해요. 도무지 말 안하거든. 제가 편지로나 사람을 통해서나 질문하는 거 대답을 안 해요. 저는 몰라서 대답 안하는 것으로 생각 안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오늘 오신다고 하던데 질문을 열댓 가지 저한테 보냈어요. 다 할 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저는 대답할 수 없는 거지만 제 공부니까 공부를 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겨우 엊그저께 답을 보냈어요. 그런데 오늘 온대요. 내일 아침에나 말하겠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성경은 사람한테 통해서 배운 거는 제대로 배운 게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하나님께 배워야 한다. 성령께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 배워야하고 사람을 통해서는 아니다. 사람을 통해서는 한 가지밖에 배울게 없다. 뭐냐? 히브리 5장 11절입니다. 말씀에 가장 초보 되는 것만은 사람을 통해서 배워, 6장에서는 그것도 그만 두라. 그거야. 또 배워야 할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사람은,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의 비밀은 배우지 마라라. 그리스도의 비밀은 배워라. 그겁니다. 묵시록 2장에 있어요. 21절로 26절에 꼭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3장에서는 대충한다면 갈라디아 3장에서는 무엇을 배우냐? 13절의 말씀이요. 그것이 마가복음 11장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11장 12절 14절 봅니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튼 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올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시던 참에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나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저주 하셨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20절 26절, 믿음의 힘, 믿음의 힘 이른 아침 예수의 일행은 그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다가 그 나무가 뿌리 채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한 말 말한 대로 되리라하고 믿기만 하고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 살아계실 때 그런 기적은 한 번도 안 하셨지요. 산이 빠지는 거 그러므로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겨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랬단 말이야.
그러면 무화과나무 저주는 무슨 뜻이냐? 세 가지 중요한 뜻이 있어요. 뜻이 아니고 그 사건 그대로 본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합니까? 철이 아니니까 철이 되면 다른 사람이나 따먹게 놔둘 일이지, 당신이 그때 못 따 잡수셨다고 해서 저주까지 해버리고 영원히 맺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면 그 무화과나무는 지금 있거든요. 금년도 따 먹었을 거예요. 아직도 있는가? 몰라요. 영원히 맺지 못한다고 했는데 맺었거든요. 그 무화과나무 말이 아니거든요. 그걸 들어서 무슨 뜻을 말한 거지. 성경은 전부 비유라고 비사 무엇을 들어서 원 뜻을 말한 거지. 역사가 아니란 말이야. 어떤 역사를 통해서 뜻을 말한 거라고, 아까 첫째 갈라디아 3장 13절이거든요. 당신이 율법의 저주 받을 것을 첫째가 그거에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해도 하나도 지킨 사람이 없거든. 그래 유대인 못 지킨 걸 대표해서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는 건 저주받는 거라고 율법의 본뜻은 사랑인데 사랑을 낼 라면 저주 받아야 되거든. 자기라는 건 없어야 되거든. 아담의 성품을 가지고 사랑 안에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사랑이 되요. 그리고 첫째는 당신 십자가에 저주 받을 것을 보이신 것이고 둘째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음에 평화도 없고 문제 해결되지 않고 더욱 교만만 해지고 또 지킬 수도 없는 거예요. 지키는 것은 죽는 거예요. 율법의 목적이 궁극 목적은 사랑인데 사랑하려면 죽어야 되니까 중간 목적은 죽는 거야. 완전 자기부정입니다. 거기서 인데 믿음은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사랑이지 내가 안 죽고 있는 동안에는 사랑이 없어요.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고 사랑을 달라는 말도 거짓말이고 없어요. 사랑은 사랑의 자체여야 사랑이 되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 삼위만이 사랑이시니까 삼위께서 사랑하실 일이지 나는 왜 하나님께서 사랑을 못 하시냐? 내가 안 죽었으니까 못해요. 나만 치워버리면 되는 건데 내가 하려니까 못해요. 사랑은 사랑 자체가 사랑인거에요. 사람은 죄인이니까 땅에서 온 사람은 못해요. 그래 믿으면 해요 믿으면 그리스도가 해요. 믿으면 자기는 없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니까 믿는 사람은 한단 말이야. 자기가 있는 사람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뭐냐? 자기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는 사람은 해요. 신앙만능이란 말이 그 말이거든. 그리스도면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서 뿌리 채 말라버리는 무화과나무에서 우리는 열매를 기대해요. 무엇을 행해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뿌리째 말라버리는데서 무슨 열매가 있겠냐? 자꾸 방법만 고쳐 소용없어요. 씨 뿌리는 비유가운데도 이 씨는 새가 주워 먹고 악한 자가 빼어가 버렸는데 아무리 가꿔 봐도 헛수고에요. 씨가 있어야 말이지. 가라지만 무성해버려. 옥토여야 된다. 씨가 있다면 길가 돌작밭 가시덤불 옥토 좋은 땅 옥토야, 옥토라는 말이 뭐냐? 옥(沃)자는 삼수변에 일찍 죽을 요(夭)자입니다. 일찍 죽어라. 완전히 자기가 죽고 신앙 믿음, 그리스도만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옥토에요. 백배 육십 배 삼십 배, 내가 있는 동안에는 단지 율법이란 말이야. 헛수고야. 돌작밭이나 길가에나 그 것 뿐이야. 악한 자가 빼가 버렸어요. 헛수고에요. 그러니까 또 하나는 셋째로는 저주 받으라는 겁니다. 저주, 예수님이 저주 받았으니까 그래서 열댓 가지 질문 가운데 아까 첫째 뭔 질문이냐 하면 성령과 양심의 관계는 어떤 것 입니까? 이런 질문이야. 성령과 양심, 그런데 대답하렵니다. 히브리 9장 14절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이 말씀,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는 데나 그리스도의 피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인제 말하자면 선악과 따먹은 일을 안 하게 한다. 말이야. 버리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이겁니다. 세 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째가 양심이 깨끗해라. 예수의 보혈은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으로 통해서야 그리스도라도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 양심을 깨끗하게 하면 법이 필요 없어요. 다 빛이니까 환히 알아서 하는 거란 말이야. 양심이 어두워 가지고는 밤낮 여기가 부닥치고 저기가 부닥치고 양심이 어두우니까 무엇을 가르쳐줘도 몰라요. 밤낮 방황하는 거지, 양심이 환하면 빛이니까 환하면 누가 죄라 뭐라 말할 것도 없어요. 다 그럼 무엇부터 안하냐하면 따먹지 않는다니까 세속을 안 따라가요. 완전히 거룩 구별되는 거야. 세상과 몸은 세상에 살아도 마음은 구별된 생활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생활입니다. 빛 노릇을 합니다. 그 빛을 보고 따라 오도록 믿는 사람은 삐뚤어지고 어그러진 세대에 빛 노릇을 합니다. 하늘의 별처럼 밝히 비추라는 거야. 그리고 죽음의 행실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거 죽음의 행실 버리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거 셋이면 다 들어있어요. 다 또 저주 받아야 하면 로마서 9장 1절 3절이지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슬픔이 없어요. 이면 마음으로 양심의 슬픔입니다. 다른 면으로 다른 영혼을 위해서 슬픔이에요. 자기 사생활을 위해서 슬픔이 아니에요. 그건 초월해 버렸어요. 순수한 사랑 때문에 다른 영혼을 건지려니까 희생 제물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적 생활번민이 아니라니까 나는 혈육을 갖지 않은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 따라가자는 거야. 저주받아 동족을 위해서 다른 영혼을 위해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양심을 성령을 힘입은 양심의 움직임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자기 사명 없어요. 다른 영혼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영광이라고, 이거 다른 사람이 걱정 근심할 것을 대신 받는 거야. 예수님의 근심은 일평생 근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 인류의 죄 짐을 대신 받으니까 또 예수님은 일평생 만족과 평화와 기쁨이지요. 그건 왜 그러냐?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하나님 안에서 전능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쁨이고 인류의 죄를 자기 당신이 지심으로서 저주와 고통 죄 짐을 그 고통을 당함으로서 우리 죄가 없어진 거라고 예수님이 대신 내 죄 대신 당하신거예요. 그러면 무화과나무 저주는 당신이 십자가에 지실 거 저주 받을 거 또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거 동시에 평화도 없다는 거 셋째는 형제 사랑에 있어서 나도 저주를 받아 다른 사람이 저주를 내가 대신 저주를 받아버려. 사랑으로 하니까, 그래서 하나 더 보충하자면 베드로전서 2장 19절이하지요. 거기만보고 그만합니다. 18절서부터 그리스도의 고난, 하인들이여 주인을 존경하고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하십시오. 친절하고 사리판단이 명확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잔인하고 고약하고 잔인하고 난폭한 주인에게도 복종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벌을 받았거나 받았던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악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아낸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거 당연히 받아야지요? 옳은 일을 한 것 때문에 양심껏 살았는데 벌을 받고 받고도 말없이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어요. 이렇게 하라고 애매한 고난을 달게 받으라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오라고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서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놓아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저주받고 말이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갑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욕을 당해도 욕하시지 않고 고난을 받아도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떠나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신 대신 우리가 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적의 공격해 와도 여러분의 영혼을 완전하게 지켜주시는 감독자 목자이신 그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찬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