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 목포 공생원 이야기
종일 눈보라가 세차게 분다. 김준호 선셍이 목포 공생원에 다녀온 이야기가 있어 공생원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고 사진과 함께 올려본다.
아래 이야기가 김준호 선생 증언이다.
한번은 목포 공생원 있었습니다. 일본시대 고아원 하나 있었어요. 일본 여자와 사신 분 윤치호입니까? 윤치호, 그분이 원장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육이오 후에 그래 고아원이 가난해서 애기들이 얻어먹는단 말씀을 듣고 저를 파송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누굽니까? 여기 한 집사님 알아. 저하고 둘이 시작해가지고 서로 헌금을 대거든, 질세라 헌금을 대니까 얼마나 헌금이 많이 나왔든지, 실러쿵 실러쿵 미친놈도 아니여. 깡통을 들고 파송을 갑니다. 동광원 대표로, 그리고 시찰을 했어요. 보고했어요. 거기까지 갈라면 심문을 당해야 해요. 그때는 좌우익이 있어가지고 한 발자국을 갈수가 없어요.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증명은 확실하거든요. 대한민국 그러니까 또 보내고 또 보내고 가서보니 배고프니까 걸어 다닐 수 있는 애기는 다 시내 나가고 없어요. 인제 앉아있는 애기들 한 30명이 추우니까 미군 담요를 덮었던지 떨어져버리니까 솜만 남았어요. 어떻게 불쌍하던지. 그것을 이고 30명이 이고 앉았어요.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17살 먹은 처녀가 아주 천사에요. 이 애기들이 불쌍해서 자기가 밥을 해주고 있다고 그래요. 자원병이야. 자원해서 그런 거예요. 아주 고마운 천사에요. 나까지 갈수가 없어서 이 애기들 밥해주고 있다고. 원장님이 행방불명이 되고 사모님은 구걸 갔다고 목포 시내로, 그걸 보고 보고해드렸어요. 그 다음에 양식하고 옷 30명분하고 만들어 보냈지요. 이 선생님이, 그렇게 살았던 것뿐이고요. 어찌되었든지 그렇게 매일 같이 이렇게 심부름을 보내고 그래서 실상은 한가하게 앉아서 예배한번 못 봤거든요. 그렇게 살아오던 끝이지요.
어래 이야기는 <국민생갓 언론>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뿌리 목포 공생원.
세상은 수시로 낯을 바꾸고, 사람은 쉼 없이 오고 가지만 사랑으로 함께 사는 ‘공생의 꿈’은 오롯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93년의 긴긴 세월동안 변함 없이 그 자리에~.
목포 공생원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살의 청년전도사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다리 밑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고아 7명을 발견 하게 된다. 아이들을 가없게 여긴 윤 전도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목포시 대반동 유달산 자락에 터를 잡게 되는데 이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7명의 고아들로 시작된 공생원은 20명, 30명, 100명, 원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먹이고 입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윤 전도사는 아이들과 밭을 일구는 등 자력갱생에 힘쓰는 한편 다른 전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 교육에도 마음을 쏟는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 다른 과목과는 달리 음악수업은 참으로 어려웠다.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였다. 일본인 여성으로 목포 정명여고에 재직중이던 그녀는 아이들의 음악수업을 맡아 공생원에 운명적인 첫 발을 내 딛게 된다.
이후 윤치호와 사랑이 싹트게 된 그녀는 당시 정치, 사회적 벽을 뛰어 넘어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당시엔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남성의 결혼이 쉽지 않았다. 점령군인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인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우치 치즈코는 7살 때 고위관료인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온 엘리트 여성으로,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을 흔쾌이 받아들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우치 치즈코의 어머니 였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던 그녀는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다같은 형제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승낙 했다 한다.
단 무남독녀임을 감안, 데릴사위를 전제로 말이다. 그때가 1938년.
7년여의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됐다. 목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서둘러 귀국선을 탓다. 혹시라도 모를 위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치호·윤학자 부부는 일본행을 택할 수 없었다. 100여명이 넘는 고아를 데리고 일본까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해방후 일본인에 대한 위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분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라며 적극 보호에 나선 고아들과 “좋은일을 하신 분들”이라며 감싸준 목포 시민들 덕분에 무사 할 수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밀려오고 상당수 목사, 공무원, 경찰관 등이 인민재판 이라는 미명하에 목숨을 잃었다. 이 때도 고아들과 시민들의 보호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윤치호 전도사 신변에 변고가 생기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당시 500여명에 달하는 고아들의 생계를 위해 전남도청에 식량 지원을 요청 하러 갔던 윤 전도사가 행방불명 된 것이다.
이 때부터 공생원 운영은 올 곧이 윤학자 여사가 도맡게 된다. <2편에 계속>
[출처] <한국 사회복지의 뿌리 목포 공생원> (1)공생원의 시작...|작성자 국민의 생각이 언론
윤치호와 목포 공생원
1928년 10월 15일은 사랑과 봉사의 기독교 정신으로 개인이 설립한 전남 지역 최초의 아동복지시설 ‘공생원’(共生圓)이 세워진 날이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믿음,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은 그들의 전설을 되돌아본다.
아름다운 유산 - 복지 선교사 ‘윤치호’
목포 유달산 아래에 위치한 ‘공생원’을 세운 윤치호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부친 ‘윤영배’와 모친 ‘안동 권 씨’ 사이에 태어나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가난한 집안의 소년가장이 되었으나 함평옥동교회의 미국인 여선교사 ‘마틴’의 도움으로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이후 전남 지역 최초의 교회인 ‘목포양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목포는 부산, 인천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항구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걸인과 고아들이 넘쳐났다.
이 시기에 목포에 온 청년 ‘윤치호’는 7명의 부랑아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의 ‘공생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주민들과의 마찰로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니다 1930년 4월에 목포양동교회 성도들과 유지들의 도움으로 대반동에 목조원사를 신축하여 1932년 12월 15일에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이 후 1937년 4월 대반동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 현재의 숙사는 일본 강점이후 한국에 베푼 것이 별로 없는 일본이지만, 민간 차원에서의 사죄와 봉사는 ‘공생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일본항공’(JAL) 회장이 증정하여 건축되었다고 한다.
‘공생원’ 설립 10주년이던 1938년 10월 15일 ‘윤치호’는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와 결혼했다.
당시 일본총독부관리의 고명딸로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공생원’에 봉사활동을 하던 중 ‘윤치호’의 인품에 반해 백년가약을 맺고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고쳐가며 평생을 바쳐 고아사랑에 헌신했다.
일제치하의 제2차 세계대전, 해방 그리고 6.25사변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연행과 고문으로 친일 반동분자,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고아들을 두고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 며 ‘공생원’을 끝까지 지켰는데 인민군 치하에선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의 변호로 풀려났지만, 대신 ‘공생원’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였다는 이유로 인해 인민군을 도왔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또한 ‘목포양동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박연세’ 담임 목사와 뜻을 같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갖은 고초를 겪었는데 ‘박연세’ 목사는 투옥되어 1944년 2월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지금은 독립유공자 묘역에 영면하고 있다.
윤치호는 자신의 결혼식에 부랑인들을 초청하였는데 그들에게 광목으로 새 옷을 입혔지만 자신의 예복을 맞출 돈이 없어 친구의 도움으로 국민복을 입고 예식을 치렀다고 한다.
1951년 1월 26일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고아들의 식량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남도청’에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는 신앙의 진리와 민족정신을 지킨 보기 드문 인물로 교육에 힘썼던 선구자, 평생의 사명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장 기뻐한 전도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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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f1-MN5f5f8&pp=ygUP66qp7Y-s6rO17IOd7JuQ
목포 공생원에 들리다 : 정인세
나와 목포 공생원의 관계는 광주 귀일원(동광원)으로 비롯해서다.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많이 발생해서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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