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동광원수도회 서울지역 유적지 탐방6 : 떡번지와 이현필 선생 소천하실 때
이현필 선생 묘소에서 계명산 골짜기를 따라가다가 왼편 가파른 산자락 능선을 오르면 작은 떡번지가 나온다. 맑은 샘이 있고 잣나무 두그루가 있다. 지금은 고양시에서 숲 생태공원을 만들었다. 그곳을 1958년 개간하고 움막을 짓고 할머니들이 사셨다. 거기서 서남쪽으로 더오르면 2000여평 큰 떡번지가 있다. 그곳을 개간할 때 증언들을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한영우 장로님과 박공순 원장님의 증언입니다.
이거 차근차근 안 되네. 떡 번지 개간해 가지고 법에 걸렸지요? 그런데 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막아주시는데 거기를 개간되어가지고 나무 베고 땅파기 전에 검불을 다 모아가지고 한 요 방에서 저기만치 다 사방을 긁어 넣었어요. 그래가지고 갈잎을 불을 지르는데 연기가 나니까 가슴이 뛰고 그냥 아주 그래가지고 저는 너무 무서워서 위에로 올라갔더니 연기가 이렇게 숨이 막혀서 죽을 번 봤어. 너무 겁이 나서 산으로 불이 간 것 같아. 혼자 막을 거예요? 너무 겁이 나서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숨이 막혀서 죽을 번 봤어요. 헤쳐 나오느라고 그런데 그걸 여기 경찰서에서 다 봤대요. 저 산에 불났지 않냐 고 막 그러니까 불났다고 그러니까 경찰들이 올라오려고 하는데 여기서 막아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수녀원에서 모닥불 태운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안 왔지. 아주 연기가 동수레 같이 산꼭대기에서 나니 막아주셨으니까 그렇지 아마 쫒아왔을 거예요.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경기도 산림계에서 산을 재러 왔어. 그래가지고 봤어요. 보고는 산꼭대기에서 막 다 가지 말고 거기 서라고 잡아 죽일 듯이 악을 써요. 막 왜 땅을 파냐고 막 그러더니 장로님은 슬금슬금 지게지고 내려오세요. 막 거기 있으라고 악을, 악을 써요. 산꼭대기에서 도에서 나와 가지고 경기도 산림계에서 나와 가지고 그래서 거기 한나 어머니가 이러고 산골로 올라가시는 것처럼 하니까 막 우리가 학생 따라 가라고 따라 가라고 쭉 가는데 그 사람들이 내려왔더라고 그러면서 내려와 가지고는 왜 땅을 파냐고 우리가 이래저래 해서 땅을 판다고 한나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니까 이 사람들 이만치 키웠으면 훌륭하다고 다 내보내라고 다 내보내래. 그래가지고 들켜가지고 자꾸 서울 어머니가 불려가지 않아요? 그 땅 판 죄로, 자꾸 불려가는데 마지막에는 자기네들이 다 이야기 듣고 하루는 재판소에 넘어간다고 보호자를 하나 데리고 오라고 했대요. 그때는 산림계가 서울 운동장 앞에가 있어요. 거기 있는데 그날따라 비가 많이 오는데 서울 어머니하고 나하고 갔어. 서울 어머니는 나 말 잘 못 할까 무서워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가는데 맨 꼭대기 7층에 올라가서 그 양반들 있는데 가서 이야기를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하고 서울 어머니 이야기 하라고 하고 나보고 이야기 하라고 하고 그랬는데 내가 이야기를 몇 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네들이 그 서류를 꾸며준 것을 읽어줍디다. 그때 읽는데 아주 잘 썼어. 그렇게 잘 쓸 수가 없어. 이만한 종이에다가 가득 쓰더니 그 역사를 땅 판 이유를 다 썼는데 다 우리를 도와서 썼더라고요. 우리더러 도장만 찍으라고 도장만 찍고. 인제 우리 둘이 한 이야기 적고 그래가지고 도장 찍으라고 돈 천오백원만 내라고, 천오백원만 내라고, 지금은 돈도 아니지. 그전에는 큰돈이나 봐.
한) 그때 천오백원이면,
박) 재판소에 마지막 넘어가는 서류를 천오백 원을 내라고 떡 번지 답을 그렇게 많이 먹고 돈 천오백 원 냈어.
사) 그게 한 60년도쯤 되었나요?
박) 그러니까 개간을 해가지고 2년쯤 되어서니까 60년도쯤 되는 거 같아. 서류 꾸며서 넘어 갔지요.
사) 떡 번지는 어떻게 해서 찾게 된 거지요?
박) 저기 풀무원 원 선생님이랑 여기그때 자주 오셨어요. 예배도 드리시고 장로님은 그 안에 이렇게 산을, 약수터도 찾아 거기서 하루저녁 주무시고 내려오시고 그러고 인제 원 선생님 나 또 몇사 람 따라갔어요. 장로님이랑 약수터 그 산꼭대기 밭 많은 위에서 예배드리고 둘러보시고 장로님 거기다가 개간을 생각을 하시고 원 선생님이 듣고 괜찮다고 그러시데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했어요. 이 동네사람들이 거기가 옛날에 절터라고 절터인데 옛날에 하도 떡이 절터에 떡이 많아 떡 번지라고 그러더라고, 기와장이 척척 잠겨 져 있데요.
사) 그 당시는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베어버리고?
박) 네, 아주 울창했어요. 그때는 미사일 부대도 안 들어서고, 이 선생님이 오셔가지고 그런 말씀을 다해요. 비행기가 이 산에 가라앉고 그런 예언을 다 하셨어요.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미군들이 밀고 들어오데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해요. 저쪽 길로 이러고 올라오면 울창한 산으로 와요. 그런데 개간 한데 밀고 들어오데요.
아래 이야기는 조사연 언님 증언입니다. 동광원 정기총회 1회는 1961년 1월에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살다가 6년 만에 희옥 씨 어머니하고 1월 달 모임에 참석 하느라고 그때 왔었는데 그때는 이 선생님이 도암 분원에 계셨기 때문에 거기서 집회를 모이게 되어서 희옥 씨 어머니와 저는 도암으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갔었을 때 이 선생님께서는 막을 치고 계셨고 식구들이 많이 모였지만 그때는 장소도 비좁고 이 선생님이 막치고 계신 것을 볼 때 제 생각에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막에 계시지 않으신가? 그런 생각도 해보고 또 한편으로는 평소에 위생관리에 아주 철저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많은 식구들이 모이고 그런 형편이라 당신이 따로 나가계시지 않은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 나름대로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저는 그때 선생님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병세는 아주 심해서 걸음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시는 그런 형편이신데 그 추운 막집에 가계시고 또 집회 모임의시간이 되면 그 막집에 나오시는데 걸어 나오시지를 못해요. 그때 매일 매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춘일 양이 많이 업어 모신 것 같았어요. 예배자리 나오시면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몇 시간 이고 말씀을 하시는데 참 많은 식구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했었습니다. 힘이 조금도 없으신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 말씀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제가 이 시간에 기억에 남는 말씀을 골로새 3장 5절 말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또 묵시 2장 24절로 25절 말씀인데 ‘그 두아디라에 남아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느니라.’ 그 말씀 다른 때는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면 평범한 말씀으로 여러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해주셨는데 그때 그 모임의 말씀으로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을 처음 그때 듣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묵시 2장 24절 말씀에서 ‘사탄의 기쁜 것과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의 비밀이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배우지 않으려면 충동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충동을 받지 않으려면 그때 성경 말씀으로는 시편 119편 9절 말씀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지니라.’ 삼간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이라고, 위에서 해주시지만 내가 할 일은 삼가는 일이라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극장에도 가지 말고 텔레비전도 보지 말고 필요 없는 객기도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삼가라고 그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하나님 말씀 안에서 조심하고 살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선생님에게 직접 이렇게 듣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때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며칠 동안에 이 선생님 말씀으로는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서 오 장로님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그때 처음으로 오 장로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역시 오 장로님도 거기에 이어서 요한복음 16장 9절 말씀을, ‘무엇이 죄냐?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시면서 예수와 나와 떨어지는 것이 불의라고 예수와 나와 합하는 것이 정의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서 하나에서 그치는 것이 의요, 참 신앙이라고 그때 말씀해 주시면서 그 순결에 대해서 이 선생님의 말씀이나 장로님의 말씀이나 그때 처음으로 들었지만 말씀의 골자는 다 일치다. 그런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그리고 수양회가 끝나고 나서 그때 선생님 병세가 아주 위독하셨을 때였기 때문에 그때는 기독병원을 제중병원이라고 하더군요. 제중병원에서 차가 와서 이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입원시켜 드리고 저도 그때 같이 나가서 저는 예배당 집으로 가 있으라고 그래서 가있는데 순서가 조금 틀렸습니다만 가기 전에 집회 끝나고 저는 희옥 씨 어머니와 같이 선생님께 인사하러 갔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려고 그랬더니 처음에는 올라가라고 그러시더니 다시 오라고 하시고는 어머니만 올라가고 저는 남으라고 하시면서 광주에서 일 년 수양하고 올라가라고 그런 말씀 하셔서 광주에 나와서 예배당 집에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식구들이 다 병원에 다니기 때문에 예배당 집에 있으면서 종을 쳐도 예배 자리에 나오는 숫자도 없고 저는 또 갑자기 환경이 달라지고 일과가 달라졌기 때문에 아주 답답하고 종만 쳤을 따름이지 식구도 없고 그래서 선생님께 가서 제 답답한 심정을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 말씀은 ‘순종한 시간은 답답하지만 순종하고 보면 뒤에는 깨달아 질 거라’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무슨 숙제를 내주시냐 하면 광주 식구들이 계명산에 가서도 살 수 있고 계명산 식구들이 광주 와서도 살 수 있으려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수가 있을까? 그 문제를 하루 이틀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그런 숙제를 주셨어요. 그러면서 자기도 병원에 다녀 보려느냐고 그러셔서 다닐 마음이 없다고 그랬는데 그 뒤에 또 은현 씨 어머니께서 그때 총무님으로 계시고 매점 다 맡아서 물건 구입해 오시고 그러셨던 때 그 총무님이 같이 병원에를 다녀보라고 몇 번 말씀하세요. 그래서 저는 안다닌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누차 그러시기에 그때 이거 순종을 해야 되는가? 안해야 되는가? 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때 당황이 되데요. 그래서 그때 장로님께 여쭈어 봤어요. 위에서 병원에 다니라고 하는데 다녀야 할지 순종인지 제 자신이 이렇게 분간이 안선다고 그랬더니 장로님 말씀이 지금은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지금 다 다니고 있는데 뒤에 가서라도 미련이 있을까봐 후회할까봐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고 조금 뜻을 비쳐 주시기에 거기서 안다녀도 불순종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서 살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병원에서 선생님께서 또 오라고 하셔서 갔어요. 그랬더니 그때는 무슨 말씀 하시느냐 하면 장로님께 무슨 성경 공부를 했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1절로 5절 말씀 공부했다고 주로 거기는 남자와 여자 부부관계 그랬는데 거기 성경에 남자는 지도자를 가르쳤고 여자는 피지도자를 가르쳤다. 그러나 여자가 신앙이 강하면 여자도 남자가 될 수 있고 남자가 신앙이 강하면 남자도 될 수 있다. 신앙의 강약에 대해서 약간 말씀 드리고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누가 그 깊은 진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겠냐고 그 말씀을 하실 때 선생님 말씀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앞으로 장로님께 여반은 성경 공부를 해야 된다고 지금 여반 수효는 남반 보다 더 많지만 한사람도 서있는 사람이 없다고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한번만 탁 튀기면 다 달아날 사람들이라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앞으로 장로님께 성경공부를 해야 된다고 그 말씀을 그때 해주셨어요. 그리고 돌아왔는데 또 얼마 있다가 선생님이 오라고 하셔서 갔어요. 그런데 그때는 선생님 시중을 들라고 하시데요. 그런데 저는 계명산에서 몇 년을 살다가 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병원에 있다는 것도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것뿐인데 선생님 시중을 들라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저 공동 생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앉아서 공부도 하고 지도도 받아왔지만 또 단독으로 선생님 시중을 들면서 선생님이 무슨 교육을 하실 일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순종을 했어요. 그때는 방 순남 언니하고 저하고 두 사람 같이 시중을 들면서 순남 언니는 주방에서 하는 일을 하고 저는 호실에서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위독하시고 그러실 때라 일어나시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누워계시고 말씀도 못하시고 그러실 때가 시중을 혼자서 들지도 못하고 둘이 해야 할 형편도 되었지만 무슨 교육할 일이 있어서 그러실 것만 같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7월, 8월 두 달 병원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산속에서 살다가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며칠 동안은 어린애 취급을 하시고 가르쳐 주시데요. 그러시더니 며칠 지난 뒤에는 아주 엄격한 교육을 하시면서 시간 일초만 틀려도 아주 엄격하셨고 그런 것을 거기서 직접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직접 거기에서 선생님 뜻은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아주 가까이 대해 주셨고요. 또 아주 겁을 쓰실 때는 엄격하셨고 그러나 부드럽게 대해주실 때는 한없이 부드럽게 해주셨고요. 또 남에게 물건을 받았을 때는 꼭 답례를 하라고 하셨고요. 또 그렇게 몸이 아주 쇠약하시고 병석에 계시면서도 날마다 성경보시고 기도하시고 새벽이면 목욕하시고 그런 것을
선생님 제가 아직도 정리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원으로 갈수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그런 것은 나중에 갔다 와서 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그때 가게 되었었는데 자꾸 순서가 뒤바뀌네요. 가기 전에 총회 때 다른 말씀 성경말씀으로 집회가 끝나면 그때는 동광원 회의라고 사흘이면 사흘 나흘이면 나흘 집회가 끝나면 하루는 동광원 회의가 있었는데 그때는 원장님이 다 사회를 맡아 보시고 또 은현 씨 어머니께서 총무로 보셨기 때문에 그때는 아주 세밀히 기록하시고 낭독하시고 그랬는데 제가 1월 달 총회를 계속 하다가 얼마동안 쉬다가 지금 금년에 또 새로 시작하니까 새롭게 그때일이 생각이 나서 그때 생각을 지금 발표한 것인데 총회 시작할 때는 그 인원 출석을 불러가지고 반수 이상이 오면 시작을 하고 반이 못되면 기다려서 시작을 하고 그랬는데 언제나 처음에 시작할 때는 총무님께서 그 동광원 회의록을 낭독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동광원 회의록에 동광원 정신을 낭독하시고 또 정회원 자격에 대해서 낭독하시고 그 다음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에 개개인의 소감 발표가 있고 그랬는데 그때는 우리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듯이 동광원 회원증을 각각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동광원 회원증에는 동광원 정신이 다 기록되어 있고 정회원의 자격이 기록되어 있고 그랬는데 첫째 정절을 지킬 것 둘째 가난하게 사는 것 셋째 순명을 지킬 것 넷째로 깨끗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 다섯째로는 부지런히 일해서 자작자급 하는 것이 동광원 정신이고요. 다음으로 그 정회원의 자격은 동광원의 정신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 두 번째로는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철저히 충고를 받아서 화목을 힘쓰는 사람, 셋째로는 웃어른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기 직책에 충실한 사람 이것이 정회원의 자격입니다. 총무님께서 이것을 낭독 하시면 다 각 부서에서 온 식구들이 저는 금년 동안에 이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보고가 있은 다음, 또 책임자 어르신들이 각 부서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었다든지 좋은 일이 있었다든지 1년 동안에 되어 진 일들을 모두 다 보고하고 또 그 다음으로는 농산물 보고하고 인제 십일조든지 보고하고 그때 눈몸회가 있었는데요. 아마 눈몸회 회장이 춘일 언니 이였던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생각하기로는 그때 눈몸회 회비는 전도비로 많이 써진 것 같고요. 그때 오 장로님께서 전도부 책임을 지고 계셨는데 전도 심방 다니시는데 많이 써드리고 계명산에서 직조하는데 조금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거기에 협조 해드리고 그렇게 그래서 그때는 처음에 수양회를 해서도 은혜스럽고 수양회 끝나고 동광원 총회에서도 그렇게 은혜스럽게 참 저는 은혜스럽게 생각했어요. 1년에 두 번 모이는 것이 그렇게 은혜스럽고 좋았는데 어쩌다가 가다가 중간에 끊어져가지고 뒤늦게나마 작년 재작년부터 8월 달 수양회가 남원에서 있었고 금년에 여기서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그때 일이 생각이 나서 이 시간에 그때 일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희옥 씨 어머니 공순 언니가 함께 오신다는 건 참 처음 된 일이고요. 저도 거기에서 살았지만 누가 오든지 한 사람씩 교대로 오시고 같이 오신 적이 없었는데 오셨는데 같이 오시니까 저 역시 또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어머니께도 감사드리고 제가 지금 말씀에 순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주서 살다가 갑자기 계명산에 가서 살라고 하셔서 갔었는데 가서 살고 있는데 자꾸 광주에서 소식이 오기를 다시 와서 선생님 수종을 들라고 다시 오라고 소식이 간접적으로 오라고 소식이 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선생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자꾸 그렇게 건너온 말씀 같아서 그때 순종을 안 했었어요. 그런데 원장님도 오셔서 말씀을 몇 번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도 제가 순종을 안했습니다. 그랬는데 다음해에 그때가 62년도였는데 선생님께서 64년도 3월 12일 날 계명산에 오셨어요. 11일 날 능곡에서 하루를 유하시고 12일 날 계명산에 오셔서 거기에서 한 일주일 유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거기에서 능곡에서 막차로 오시니까 밤중에 오셨어요. 지금같이 교통이 좋고 택시가 있었다면 택시로 모셨을 런지 모르는데 그때는 기차역에서 그 마을에서 자전거 한 대 빌려다가 희옥 씨 어머니하고 성재 씨하고 같이 벽제 기차역으로 가가지고 그 자전거를 끌고 밤중에나 오셨는데 그 인사만 드리고 오려고 그랬는데 그때 베틀 방에 모셨어요. 선생님을, 그랬는데 못 가게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라고 그러셔요. 그래서 한나 어머님과 같이 지낸 이야기를 하고 광주에서 오라고 그랬는데 불순종 했다고 선생님께서 오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이렇게 불순종을 했다고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내가 오라고 한 적이 없다고 언니들이 오라고 했다고 그래서 그러면 불순종이 아니겠구나 하고 조금 위로를 받았어요. 그리고 하루를 거기서 지내면서 자꾸 저는 선생님 너무나 피곤하시고 그러니까 그냥 가려고 자꾸 일어나려고 그러면 못 가게 하시고 그러시더니 아마 그때 유언이었던가 봐요. 제게다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지치지 말고 끝까지 살라고 하시데요. 그리고 이 큰길이 앞으로 길이 메어지게 의인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들어올 것이다. 그러시고 그때 꾀꼬리 봉이라고 떡 번지 위에 길이 그때 안 났었는데 앞으로 길이 나고 거기에 비행기가 앉을 것이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그래서 그때는 의심이 들었는데 일주일후에 선생님께서 임종하시고 나니까 그런 것이 다 유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 하루 지내고 그 위에 현 총무님이 수양 처로 지어놓고 계신 집으로 옮겼어요. 선생님을 장소를 옮기셨어요. 거기 가서 예배드리고 그러면 어떻게 예배 시간이면 기쁘고 감사하고 말씀을 힘 있게 하시고 찬송도 우리가 경건한 찬송을 부르면 그 경건한 찬송 부르지 말고 힘 있게 힘찬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면서 지게지고 가면서도 부를 수 있고 노동하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힘 있게 부르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기뻐 하셨어요. 기쁨을 어떻게 형용 못할 정도로 기뻐하시면서 말씀 하시고 우리 한국에 태어난 것 모두 감사하자고 다른 나라는 일 년을 살아도 달도 못보고 그런 나라도 있는데 우리 한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라고 춘하추동이 있고 달뜨는 나라라고 늘 그러시면서 기뻐하시데요. 앞으로 그렇게 등불이 되라고 한국에 등불이 되라고 어디 가서나 일해서 먹고 사는 것 다 등불 노릇 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 또 거기서 임종 직전에 선생님께 배울 수 있는 것은 평소에도 외모에 대해서 단정하셨는데 그렇게 숨이 가쁘시고 일분도 당신 혼자는 앉지도 못하고 누워계시지도 못하고 사람이 부축을 해야 앉아계시는 그런 상황에 누여라 일으켜라 누여라 일으켜라 일분 간격으로 그런 관경인데도 임종하시기 전날 밤에 선생님께서 누워계시기 때문에 속옷만 입고 계셨는데 화장실에 가시고 싶다고 겉옷을 다 입혀달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다 입혀 드렸는데 겨우 가까스로 입혀 드렸는데 대님까지 다 매라하시고 옷고름까지 다 매라 하시고 저희들이 생각 할 때는 대님이 뭐고 옷고름이 다 뭐에요?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런데 그렇게 세밀 하시고 철저하시게 그래가지고 화장실에 가신다고 그러셔서 그때는 화장실까지 못가시고 집에 가까운 나뭇간이 있는데 거기에다 큰 널 박지를 놓아두고 판때기 두 개를 올려놨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보시고 저에게 업으라고 해서 제가 업고 김 선생님이랑 같이 셋이 내리라. 그래서 내리고 저는 밖으로 나가라고 그래서 나오고 김 선생님은 그 안에서 부축하고 다시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가서 업고 방으로 모셨는데 그대로 누우셔도 되지 않아요? 너무너무 힘이 없고 숨결이 가파른데 그 옷을 다 벗기라고 그러세요. 그리고 그 옷 인제 없애지 말고 당신 임종 후에도 없는 사람들 가져다가 입게 하라고 그런 말씀 하시고 그런 모습을 여러 가지를 볼 때 저희들은 그만 못 해도 어디가 조금만 괴로워도 만사가 귀찮고 어디다가 신경 쓸 여유가 없는데 선생님께서는 그 임종 직전 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마음을 쓰신다는 것 평소에도 그랬지만 임종 직전까지도 그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 것을 목격 했습니다. 이제 한 가지 또 자꾸 순서가 바뀌는데요. 임종하시기 전에 한나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회개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 살아생전에 선생님께 불순종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 드리니까 선생님 말씀이 선생님 열이 너무 오르고 숨결이 가프니까 말씀을 끝어리가 잘 알아듣게 그렇게는 못하시고 불순종 아니요. 그러고는 끝났어요. 고린도전서 7장 1절을 보라고 선생님 말씀이 그러니까 개역으로 고린도 전서 7장 1절의 말씀을 읽고 너희의 쓸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각각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너희의 쓸 말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린도전서 7장 1절 말씀, 그 말씀을 인제 한나 어머니께서 광주에서 계명산 들어오실 때에도 그 얼마나 남녀 문제에서 철두철미하신 어머니께서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조금 병원에도 다니고 이렇게 조금 활동을 하니까 모든 것이 한나 어머니 신앙 면에서는 조금 못 마땅 하셨지요. 선생님들이 하신 일이라 해도 왜 저러셨을까? 했는데 그때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가? 불가피할 사정으로 선생님들께서 여반을 가까이 하시고 교육상 그러신 것을 그때 그 말씀으로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일 새벽 3시에 가신다고 그 말씀 하시고 18일 새벽 3시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다 가실 때까지 그렇게 하나하나를 민첩하게 여유 있게 다 하실 수가 있을까? 그런 것을 실제 보고 감탄했습니다. 두서없는 말씀 이만합니다.
감사합니다. 동광원 정신 정회원의 정신 정신강령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저는 성경에 가지고 다니면서도 잊어버렸는데 오늘 사연 언니께서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합니다. 한번 따라서 읽으십시오. 강령 정절을 지킬 것, 가난하게 사는 것, 순명하는 것, 깨끗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 부지런히 일해서 자작자급 하는 것, 예 정회원의 자격입니다. 동광원에 정회원이 있고 준회원이 있었습니다. 정회원의 자격은 동광원의 정신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철저히 충고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화목을 힘쓰는 사람. 웃어른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기의 직책에 충실한 사람. 예, 감사합니다. 19번 성가 19번 추도가 오늘 이 선생님 세상 뜨신 것을 생각 하시면서 성가 19번입니다. 추도가 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노래입니다.
“저 저산에 해가지고 동산위에 달떠오니 우리주님 따라가신 스승생각 새로워라. 그 물속에 비친 저 달 내 마음과 흡사하네. 백합 같은 그 순정을 그리스도에게로만 십여 년을 하루같이 말씀하신 그 비밀은 그 피 속에 스며들어 귓전에 사무치네. 샛별 같은 네 동정을 주님께만 바치라고 그 피땀이 다 진하고 그 숨결이 다하도록 못 잊어서 못 잊어서 다시 말씀하시었네. 네 정절을 주께 봉헌 하겠느냐? 물으실 때 예 말하고 대답하니 다시 말씀 하시기를 너 지극히 적은 이를 섬기라고 하시었네. 그 귀양이 다 풀리고 주님 앞에 가시던 날 감격함을 못 이기고 ‘오 기뻐라. 오 기뻐라.’ 말하시던 그 음성이 지금같이 들려오네. 십자가에 달리셔서 목마르다. 하시던 님 그 사랑이 목이 말라 부르짖던 그 음성이 가시던 님 연상하면 또 다시만 들려오네. 그 순결과 가난함과 그 순명의 복음삼덕 우리주님 앞서시고 저의 스승 따르시니 그 사랑에 의지하고 저희들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