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독교동광원수도회 광주 유적지 탐방2 : 지산동(구YMCA자리), 송등원, 오방정, 증심사골

mamuli0 2022. 11. 23. 03:53

 호남신학교에서 나와 양림교회를 찾아갔다. 양림교회 옆에 있었던 구YMCA 자리에 일본 사람들이 사용했던 큰 건물이 있었고 그때 회장 최흥종 목사님 총무 정인세 선생과 남원에서 진출한 동광원 소년들이 양영원이라고 명칭한 곳에서 광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6.25때는 고아가 5~6백명의 고아들이 함께 생활했던 곳이기도하다. 다음으로 양림천과 양림교는를 보았는데 고아원 해체후 천변에 움막을 치고 동광원 형제들이 지낸곳이며 양림교 굴다리밑에 김준호 선생이 거지들과 함께 지낸곳이다.

 광주 양림동에서 나와 산수오거리를 지나 송등원이 있던 자리를 찾아갔다. 그자리는 많은 아파트들이 울타리 높은 담을 둘러놓아서 들어가 찾기가 매우 힘들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창 찾아 헤맸는데 결국은 보지 못하고 울타리 넘어 대나무 밭에 있을것으로 추정 결론을 내고

 

 

 증심사 쪽 최흥종 목사님 별장과 그 윗쪽에 집을 짓고 고아들을 돌본곳을 찾아 나섰다. 증심사 종합상가 주차장에서 내려 증심사를 향해 올라가다가 의재 허백련 문향전이 있는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표지판 옆 돌에새긴 오방기념사업회의 글을 보고 그자리가 최목사님 별장(오방정)임을 확인하고 골짜기를 올라가 부셔진 동광원 비석을 다시 짜맞추고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증심사에는 1947년에 해남에서 이현필 선생을 찾아 올라온 김준호 선생이 별채에서 김천배 선생을 수종하면서 함께 지냈고 최목사님이 동광원에 내놓으신 별장과 그골짝 위로 일본사람이 쓰던 헌집과 또 몇채를 더 짓고 고아들을 돌본곳이다.

 

 

 증심사 골짜기에 살때 이야기 입니다.

런데 그 규모가 너무 철저하기 때문에 아무리 애기들 많이 해 준다 하더라도 애기들이 내가 여름에 목욕하러 데리고 가면 넓적다리 살이 없어요. 아무리 애기들 많이 준다고 해도 애기들이 영양부족이야. 그때 이렇게 다리가 꼬여요. 뒤에서 보면 뒤 엉덩이가 살이 없어. 애기들이 그러니까 그렇게 살던 시절이니까 저는 철저하시다. 생각해요. 그때는 약을 안 쓰니까 옴이 왔네요. 옴, 그때 오 장로님도 애기를 맡았어요. 지금 증심사 골짝 별장에서 또 100미터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집이 한 채 있는데 어느 일본시대 살던 사람의 빈민가지요. 그걸 넓혀서 사시데요. 소년을 데리고 맡아 계시더만 혼자, 그런데 오 장로님의 가르치는 법은 금식이야. 그리고 그 어린 소년들한테 한 끼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한 끼인데 그건 남자들이야. 살림이 남을 리 없지요? 옴이 올라요. 또 오 장로님 법은 새벽 목욕을 시켜요. 찬물에, 그 어린것들 그런데 제가 하룻밤 자봤는데 와 비릿 내, 옴이 올라오지요? 찬물에 목욕을 해놨으니 물이 불으니까 고름냄새가 어떻게 비릿 내가 나는지 코가 막혀, 그 방에 못 있겠어요. 본인들은 모르더라고, 오 장로님 지옥 갈 거야. 아마 인정이 ‘난’ 줄 아니까 철저히 회개하더라고. 인정, 혹독해. 무서워. 오 장로님 법은 무서워. 그런데 소년들이 어떻게 순종하던지 참 기특하데요. 그럼 그걸 이 선생님이 목격하고 헐어버린 거예요. 이 선생님이 안 되겠다. 어머니들은 절제하느라 3작 먹고, 오 장로님은 인정을 끊으라니까 애기들을 바짝 말라가지고 옴이 왔어도 찬물로 목욕시키고, 아니고 이대로 두고 죽으면 이것이 뭐냐? 그러면 이 공 당파이고 이 현필 당파인데 천국에 가도, 이건 안 되는데 천국 가서도 ‘이 현필 네 이놈’ 그러시지 잘했다. 그럴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까 자비심을 회복해. 눈물의 회복이야. 내가 지옥 가더라도 이걸 해방하고 죽어야지 인정을 무기삼아 가지고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세우고 이대로 죽으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 약 안 쓰고 고기 안 먹고 냉수로 목욕 시키고, 그러니 결과는 어떻게 해? 애기들이 영양부족으로 얼마나 죽어져요. 애기들이 고아원인데 약을 안 쓰고 약을 안 쓰면 천국, 그건 이론이지. 약을 안 쓰면 예수 잘 믿는다는 거예요. 고기 안 먹으니까 이 사람 천국 간다 이거에요. 영양부족, 영양 없으니까 옴이 전 식구에게 올라가지고 고름냄새가 나고 진동해. 본인은 몰라요. 그게 천국인줄 알아. 인정 끊었으니까, 전통이 그것 아닙니까? 

 

 

진달네」를 심은 까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3)"
약 70여 년 전, 예수님의 산상복음의 마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을 받고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 사시던 이세종이라는 분은 천태산에 은둔소를 짓고 입산하여 수도를 하셨는데 그분을 이공(空)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해방 전에 돌아가셨는데 해방 후 YMCA의 현동완 선생님이, 세계의 성지를 찾아 돌아다니셨던 분으로, 우리 한국에도 성인이 살던 은둔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천태산 은둔소를 찾아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서울에 계신 유영모 선생님께서 현동완 선생님과 같이 천태산 은둔소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이세종 선생님의 제자였던 이현필 선생님과 세분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으로 두 분은 정월과 팔월에 일년에 2회씩 이세종 선생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씩 종교교육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1월달에 말씀하러 오셨던 현동완 선생님께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소원을 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에는 결핵전문 무료병원인 제중병원이 있는데 서울 이하에 있는 무의무탁 결핵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죽기전 마지막으로 입원하는 병원으로 입원하는 환자들은 6개월이 지나면 퇴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무리 위독해도 약속에 의해서 그리고 새로 들어올 환자들을 위해서 퇴원을 해야 합니다.
그때 오덕환이라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연령이 23세 되었는데 퇴원 날짜 통지를 받고 절망하여 잠을 못자고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삼일 후 갑자기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옆에 누워 있던 제가 '어떻게 마음을 안정 하시고 식사를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각오를 하였더니 잠이 오고 식사가 됩니다.' '무슨 각오를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자기 가슴깊이 넣어 두었던 약봉지를 '탁 탁'치며 '6개월 전에 여기에 입원이 안되면 먹으려고 햇던 독약이 있지요. 저는 하룻밤 잘 곳이 없던 나그네로서 6개월 동안 천사 같은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그 동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나갈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서 밥을 못 먹었는데 마음속으로 다리밑으로 내려가서 약을 먹을 생각하니 아주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병원 당국에 호소했고 특별히 6개월 더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6개월이 다 되어가니 그 환자의 앞날이 제일 큰 걱정입니다."라고 현 선생님께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 말씀을 심각하게 듣던 선생님은 병원에 가셔서 칼링톤 원장 선생님을 만나뵙고 모든 사정을 아신후 오덕환씨 이야기를 글로 적으라고 하시기에 글로 적어드렸습니다.
그 사연을 가지고 서울에 가셔서 그 때 자유당 정부의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의장을 만나뵙고 환자의 딱한 사연을 말씀하시고
당신도 젊어서 결핵 환자였고 저도 젊어서 결핵 환자였는데 이 사람을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장께서 "내 개인으로 성의를 올리겠습니다." 하시며 도움을 주셨습니다.
요양소 이름은 이공님의 고향 등광리(燈光里)에서 '등(燈)자 하나를 정하고 이기붕 의장의 호 '만송(晩松)'에서 '송(松)'자를 따서 '송등원(松燈院)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송등원 자리는 무등산 기슭에 있는 '파크호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주민들의 반대로 철거를 당했습니다.
한겨울에 광주에 들르신 유영모 선생님께서 '송등원'환우를 찾아가서 하룻밤 말씀해 주시고 주무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6km를 걸어서 무등산 '삼밭실(원효사 골짜기에서 1,700m 지점)'이라는 골짜기에 살고 있는 여자 환자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거기 산에 있는 환자를 돌아보고 내려오시면서 선생님은 눈이 내리는 2월의 무등산을 자꾸 되돌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산 밑에 영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구약성서의 도피성같이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은둔소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
"죽은 사람은 죽지만 이곳 저곳에 가보면 아주 젊은 사람들이 간호해 주고 도와주는 보모들이 있는데 젊어서는 좋지만 늙어서는 어떻게 하느냐?"하며 걱정하셨습니다.
 이곳 저곳에 가보면 청춘을 바쳐 봉사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젊은 분들의 노후가 걱정된다고 하시며 인재들이 모여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 뜻이 좋고 불쌍한 사람도 많지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일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때에 젊은 구도자들의 교육을 걱정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그 뜻을 알고 있던 그 때 제가 전주 모악산 기슭에 절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 4만평과 대지 600평이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집과 땅을 사주셨습니다.
 바로 <진달네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사도록 협력하신 분이 그 지방에 사셨던 박효균 선생님과 박중근 선생님이셨습니다.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p222-p226

 

 

이 다리를 내려올때 생각이 나서  이글을 올려봅니다. 나무꾼 할머니와 빵 이야기인데 동란후 참혹한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무등산에 환자가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해는 져가는데 배나무 골 이라는 데가 있어요. 산소 돌아오는데 할머니가 나무다발 하나를 놓고 앉아계세요. 저도 옆에 앉아있었어요. 할머니 말이 ‘저는 며느리가 오기 전에는 내 아들하고 화목하게 살았소.’ 며느리가 온 다음에는 아주 그 자기를 싫어한다. 이거에요. 왜 놀고먹는다 그거에요. 그러면 너무 며느리가 미안해서 새벽에 굶고 무등산에 나무하러 왔답니다. 그러니 나무가 없어요. 광주 시내가 다 나무를 때니까, 연탄 때는 데가 없으니까, 구백고지를 가도 나무가 없어요. 거기도 사람이 다 가니까 깨끗해요. 뭐 무등산에 나무가 없어요. 낙엽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얼마나 상상봉에 가서 나뭇가지 한 쪼금 주웠답디다. 그걸 이고 오는데 배가 고프니까 빨리 갈 길을 못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소나무밭 옆에서 신사들이 여름이니까 수박을 먹고 가버렸어요. 껍질이 거기 있어요. 껍질 한참 주워 먹으니까 눈이 보여요. 그래요. 나 여기 앉아서 수박껍질 주워 먹으니까 이제 눈이 보입니다. 그래 인제 가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할머니가, 그러면 선생님은 그걸 보고 보고하라 그거지요.또 이건 여름 이야기니까, 아 그런 할머니를 목격했어요. 그분 사시는 곳은 월산동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그 집을 알겠는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김은연씨 어머니 속히 오시라. 그래요. 총무님 오시라고, ‘우리 집에 밀가루 강냉이 지금 십일조 받은 것 얼마나 됩니까?’ ‘강냉이 한포 있고 밀가루 한포 있습니다.’ ‘가서 곧 빵을 찌십시오.’ 즉석에서 명령하세요. 전혀 몰라요. 왜 찌라고 하는지? 전부 빵을 만들라고, 그럼 해가 지기 전에 산수동 문턱이지요. 작고개가? 거기에 빵을 갖고 가 서있으라. 그래요. 그 할머니가 나무를 오늘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지만 할머니를 찾아야지요. 여기 아리랑고개 여기서 빵을 안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꾼이 가면 점심 자셨소? 물어보고 빵을 주라. 그래요. 물도 떠다놓고 드리고, 그러니까 이제 산수동 골목하고 아리랑고개하고 빵을 나눠 준겁니다. 나무꾼한테, 아주 개미같이 나무꾼이 올라오지요. 무등산에서 해가질 때 그 양식을 누가 대요? 십일조는 다 끝나버리고 양식이 우리는 없으니까 병원 원장을 찾아가셨어요. 나무꾼이 오다가다 배가고파서 길가에 쓰러진단 말 들었습니다. 선교부에서 양식을 대 주십시오. 그럼 하루에 얼마나 대 드릴까요? 빵으로 하면 몇 개를 쪄 드릴가요? 하루에 천 덩이 쪄주십시오. 모자라면 더 쪄드리겠습니다. 그런 거예요. 카링톤 원장이지요. 여기 자매들이 가서 봉사하니까 고마워서, 월급도 안 받고, 와가지고 빵을 쪄달라니까 그래 인제 빵 기계를 주문을 해요. 빵 기계를 자기 직장에 갖다놓고 빵을 찐 겁니다. 이 선교사가 직원은 몰라요. 영문을 모르는 겁니다. 그럼 동광원 사람이 가면 빵을 내줘요. 한 천 덩이씩, 전 직원이 반대합니다. 무슨 소리냐? 이 밀가루는 세계봉사회에서 제중 병원에오는 환자들 주라고 준 밀가루야. 그런데 왜 동광원에 가냐고, 그때 사무실에 총무, 지금 그 사람 미국 갔어요. 박씨라고, 제가가면 항의를 해요. 당신이 뭐냐고, 왜 우리 환자들의 양식을 당신들이 가지고 가냐고, 문제가 컸어요. 그래서 산림청에 고발을 했어요. 무등산을 망해먹는 도벌꾼인데 이 길가에 서서 빵을 나눠줘. 나무를 더하라고, 도벌을 더하라고, 이건 산림법에 방조죄에요. 이것이 문제가 되어가지고 세계 봉사회에 진정이 된 것입니다. 밀가루를 제중 병원에 불쌍한 사람 주라고 보냈는데 안 쪄주고, 나무꾼을 쪄줬다. 이거에요.

 


  송등원의 태동
 1964년 김준호 선생은 현동완 선생을 만나 결핵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광주에는 미국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에서 결핵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병원의 사정상 6개월 뒤에는 환자를 퇴원시켜야 새로운 환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6개월 뒤에 강제로 퇴원하는 환자들이 갈 곳이 없어, 병원을 나갈 때는 독약을 품고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결핵환우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였다.
 이러한 김준호 선생의 말이 싻이 되어, 현동완 선생은 제중병원 카딩턴 원장을 만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의를 하였다. 현동완 선생이 서울로 돌아와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씨를 만나 300만원의 후원금을 얻어 광주 동광원에 맡겼다.
 1954년 동광원(현 귀일원) 예배실에서 송등원 발기회가 열렸다. 발기회에서는 오방 최홍종 목사를 이사장으로, 김준호 선생, 박두옥 장로, 카딩턴 원장 등을 이사로 선출하였다. 송등원은 1년간 동광원에서 사업을 펼치다가 1955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지산동으로 옮겼으며, 여성들을 위한 무등원은 1956년에 창설하였다.
이후 광주 제중병원의 환자들이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게 되면 무의무탁한 환자들 중 남자는 송등원, 여자는 무등원에서 생활하면서 치료를 더 받게 하였다. 당시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은 무등원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송등원과 무등원은 상호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이현필 선생은 제자인 김준호 선생에게 무등원을 중심으로 결핵환자를 돌볼 것을 특별히 당부하였다.

 

옛날 사진

 

새벽에 일찍 나가가지고 그 눈 오는 미끄러운 때에 그 추운 때에 새벽에 나가서 똥 퍼가지고 그럼 저쪽 동산이지요. 저쪽 감나무 동산인데 거기 가서 똥을 푸는 것을 늘 보셨어요. 그걸 보시고 이 시를 지었는데요. ‘천리마에 수레매여 소금 섬을 실었으니 무심한 아이들은 웃음직도 하다마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소금 그 얼마나 귀중하며 거룩하신 어른의 뜻이라면 그 어디를 못 가리.’ 그러니까 그 이 시를 감격스러워 지어가지고 이 결핵 환자들 앞에서 읊으셨어요. 그거에요. 그분들이 지금은 대학 교수가 된 걸 보면 명철한 청년들 이었습니다. 자기들 노트에 적어가지고 팜프렛을 만들었어요. 종이를 짜가지고 나누어 본거에요. 그러니 여기 결핵 요양소가 없었더라면 현 선생님이 그 새벽에 시를 읊었지만 아무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일이 그리도 오묘해요. 그 결핵으로 누워있던 청년들이 그 시를 듣고 눈물겨워서 수첩에 적었어요. 그래서 우리 손에 남아 있거든요. 그 사연이 그렇고요. 그러면 소금 섬. 아까 우리 백 장로님이 소금이 되게 해 달라고 빌으셨는데 소금 섬이 무엇 이었던가? 똥통을 말해요. 똥통, 전신은 귀부인이고 참 가정부인이었고, 또 육이오 전후해서 관리시고 또 육이오 동란 때 이 선생님 만나가지고 참회 했지요. 회개하시고 무명한 사람이 되신 다음에 여기 와서 똥을 푸며 살았다는 것은 역사가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기념해야 되겠다. 현 선생 생각 이지요. 아 이것이 예수 믿는 길이다. 그거예요.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류를 섬기고 남을 섬기고 동포를 섬기고 형제를 위해서 소금이 된다는 것, 제일 낮은 자리에서 제일 천한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섬기러 왔다지만 아 여기 와서 보니 이 사람들이 희망이 있다. 한국 동포가운데 이렇게 자기가 낮아져서 모든 형제를 섬기기 위해서 윗사람이 제일 높은 어머니가 똥통을 친히 푼다면 그것은 참 예수님의 정신이다. 그래서 시를 읊은 것 이지요. 자, 기념으로 한번 따라 읽어주세요. ‘천리마에 수레매어 소금 섬을 실었으니 무심한 아이들은 웃음직도 하다마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소금 그 얼마나 귀중하며 거룩하신 어른의 뜻이라면 그 어디를 못 가리.’ 

​귀일원에 대해서도 상당히 사명이 있었어요. 이렇게 떨어져서 있으니까 한곳에 다 모여가지고 한 이 만평 구해가지고 울타리치고 그렇게 사는걸 보면 좋겠다. 그 이상도 있었지만, 장로님도 지금 90이 가깝지요? 저도 그때 생각하면 땅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훗날 보니까 이 사람들도 몇이 없어요. 전부 보모들이 30대 50대 그런데 그러면 이 상당한 정신운동 가운데 무리했다고 하는데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사업을 해서는 안 되겠다. 뭐 요양소 좋게 만들고 그런 생각해서는 안 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퍽 납디다. 이공님 발자국 이 선생님 발자국이 들어가서 우리가 보전이 되지. 뿌리를 찾아야 이것 정신운동이 보전이 되지, 그 정신을 못 찾고 경치 좋은데다 이렇게 광주 변두리에다 사업을 확대시켜 놓으면 며칠 못가요. 요새 그 다리 끊어진 것 보세요. 누구 한사람 장난꾼이 나와 버리면 요. 총무 가사, 원장 같은 거 고발해 버립니다. 아주 뭔 단점을 잡아가지고 허물면 싹 뺏어가 버려요. 누구 한사람 버틸 장사가 없어요. 재산이라는 거 무서운 겁니다. 그렇다면 재산이 없어져도 이 가난, 풀뿌리를 캐먹고 사는 예수님 사랑하는 운동이 어디서 시작했냐? 등광리와 중촌에서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이 장로님과 제가 죽기 전에 고향으로 정신의 고향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야지, 이건 뭐 배급받아(도움) 나누어 먹는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큰일 나겠다. 그 큰 계시를 주셨어요. 

 

 

그래 제가 아픈 겁니다. 하나님이 매를 때려요. 정신 차리라고. 그러니까 심각해집디다.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이건 허튼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알뜰해야 되겠다. 그런데 재산이 많으면 싸웁디다. 어느 가문이나 공동체나 재산이 적으면 고생이 많아요. 그러니까 보전이 되어요. 가난이 복이지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해 놓은 것은 손댈 수 없어요. 이대로 보전되지만 여타의 재산은 이 선생님이 눈물 흘리시고 육이오 때, 한 백 명이 거의 죽었답니다. 생명 하나를 보전하자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이 순교를 했어요. 또 친히 수종하던 세분이 순교를 당했거든요. 거기 발자국마다 피가 흘렀어요. 화학산 일대, 우리가 죽기 전에 다 가 봐야 해요. 거기 다 압니다. 흔적을, 이 선생님이 제 1번 친구였을 때 장로님이 거기 입주한 집터가 있어요. 가사 그렇게 또 이공님이 도를 이루신 흔적이 있어요. 아까 그 말씀대로, 현 선생님 같은 이가 와서 보고 눈물 흘렸다고 하는데 그런 정신없어요. 지금은 정신 차려야겠다. 그러면 인제 모든 것이 뿌리가 있어야지 뿌리가 없는 게 며칠 가냐? 이거에요. 며칠 못가요.

 

 

 재산같이 더러운 것이 없어요. 재산 잘못하면 사람 놓치고 큰일 나 버리지요. 그러니까 재산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뿌리 찾기 해야겠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또 선생님이 여간 좋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 가시기 전에, 그래서 현 선생님이 삼백만원 얻어왔을 때 거기 땅을 구해놨어요. 귀주 어머니 친정에서 기증한 만평을 해가지고 장대방죽 구해놨습니다. 그런데 그리로 송등원 세우려고 열망하셨어요. 그러나 광주에 어른들이 모두 반대 했어요. 그 이상을, 그 뜻을 세워주지 않아요. 제중병원이 뭔데 어떻게 뭐를 놔두고 환자를 치료 하냐? 그것은 안 된다. 그런데 그 어른은 서러워 하셨어요. 제게 대해서 서러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소극적이냐? 주장을 못하느냐? 그런데 그걸 없애버렸어요. 그 선생님의 뜻을 모른 거예요. 

 

 

그것이 장대방죽이 거의 만평인데, 그동안에 아무 것도 못했지요. 전신을 찾고자 하자. 그럼 이 선생님은 자기 스승 장대방죽이 이공님이 다니던 전도길이거든요. 거기다가 유적 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늦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이가 있는 사람들의 뜻을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이가 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지금 거기 땅 주인이 구해놨어요. 근 삼천 평, 그래서. 어느 공동체든지 정신운동이 일어나야 보전이 됩니다. 그리고 꽃동네를 보전하려면 수도원이 있었어요. 지금 이 자매원도 그렇고 여기 귀일원도 그렇고요. 그 사업체가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지금 인재양성을 해야 해요. 다시 말하면 선생님 계실 때는 성경학교를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성경학교 그건 재정이 적어서 못했어요. 수녀원을 시작하던지 성경학교를 시작하던지 거기서 젊은 사람들이 양성되어가지고 이 인재들이 나와 가지고 일을 하게 되어야하지, 현재 나이 많은 사람이 천년만년 어떻게 삽니까? 못살지요? 

 

 

그러니까 인제 거기 들어가면 정신운동이 되어요. 정신운동, 인재양성 이지요. 찾아온 사람들이 거기서 수양을 해야지요. 조석 기도회 올리고 성경 배우고, 그러면 선생님들이 해 놓으신 재산이 많아요. 이용 할 줄 모를 뿐이란 말이야. 아까 말대로 땅이 있으면 사업체를 늘리기 위해서 이상을 꿈꿀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복음화 학교라도, 가사 정신을 기를 수 있는 도장,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거기서 일생을 몸을 바치고 살 수 있는 안정지대, 아, 나는 여기 들어오면 평생이 안심된다. 그런 참 동광원이지요. 빛이 있는 동산이 속히 건설되어야겠다. 선생님이 계실 때는 저쪽에 뜻을 두셨어요. 저쪽 만평을 구하면 저기다 동산을 하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때 안 되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고향에다 하시려고 그랬어요. 한번 선생님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때는 장로님 한분만 찾아왔을 때에요. 그럼 제가 일번이라 합시다. 

 

 

제가 찾아갔을 때 장로님은 생활이 없으니까. 생활이 없으니까 해방 후에 동란 전이니까 우선 사람이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먹어야 하니까. 물론 그냥 소극적으로 시래기 쑥 독새기 보리 가루 보리 겨 그것 먹고 살았지만 인제 정당한 수입을 위해서 장로님이 장롱을 짜셨어요. 거기가 소재라는 마을입니다. 제가 찾아갔을 때 그 밑에서 일을 배우라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수 그 일을 배우라는 거지요. 그런데 거기 찾아오셨어요. 여름에 단식하시지요. 세 사람인데 훈련시킨 겁니다. 몇 번 얼굴은 봤지만 서로서로 누군지 모르는 사이인데 찾아왔으니까 명령, 밥 얻어 오십시오. 그래요. 그게 첫 인사입니다. 둘이 목수 일했으니까 밥상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찾아오셨어요.

 

 

 밥을 이렇게 수저를 딱 들었는데 그때는 준호씨야, 준호씨, 밥 얻어오세요. 청천벼락이지요. 청천벼락, 그 그분이 우리가 무섭게 봤는데 꼼짝 못하고 순종했지요. 벌벌 떨고 죽어도 가기 싫어. 꼭 처음에 코 뚫는 송아지 같이 아파 죽겠어. 죽어도 안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거야?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래 갔습니다. 그건 참 할 수가 없어요. 순종하고 가서 밥 얻었습니다. 비가 장대같이 왔어요. 점심시간이었겠지요? 그래 비는 오는데 안집은 멀리 있는데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옛날에 걸인들이 어떻게 하더라. 아 이렇게 하더라. ‘밥 한술 주시오.’ 안 들려요. 안집이 소리가 멀어가지고, 한 세 번 소리 지르니까 빨간 치마 입었으니까 갓 시집오신 며느리라고요. 누런 옛날의 그릇 유기그릇에다가 뚜껑을 덮었는데 공손히 갖고 와서 줍디다요. 비는 마구 오는데 밥을 얻으러 왔으니까 빈 그릇을 가지고 왔으면 비워 오는데 빈손이니까 할 수 없이 탁 받았지요. 너무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절을 했거든요. 그 부인이 아, 어여쁜 아기씨 색시인데 ‘왜, 하나님께 감사 안하고 사람에게 감사하시오?’ 그런데 처음 얻으러 왔는데 이럴 수가 있어? 빨리 갖고 왔지요.

 

 

 갖고 오니까 선생님이 와, 기뻐하는지 벌떡 일어나가지고 나와 가지고 받아요. ‘처음 얻어온 밥이니 내가 먹어야지.’ 그러고 딱 제끼니까 흰죽이에요. 규모가 짱짱한 부잣집이라 비가 오니까 낮에 일 안하거든, 해방 후라 그래, 일 안하는 날 죽을 먹지요. 규모가 짱짱한 집안이거든. 그분이 그 죽 잡숫는 것 제가 봤어요. 처음으로 봤어요. ‘준호씨 소감 이야기하세요.’ 밥 막 먹으려고 하는데 그래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 긴장하고 앉았다가 그 말 했어요. 어찌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했더니 왜, 하나님께 감사 안하시고 사람에게 감사 하시오? 그럽디다. 그 말씀은 쌀 천석 만석보다 귀한 말씀이오. 그러신다고, 과연 그랬어요. 

 

 

육이오 때 우리가 산에 갇혔지요. 12월 한 겨울까지 갇혀있었으니까, 그해 눈이 10월 달에 와버렸어요. 눈 속에 갇혀있고 서울 어머니가 마지막 밥을 했다고 갖다놓고 간지가 벌써 한 열흘 넘었으니까, 굶고 있지요. 밤중에 서울 어머니가 오셨어요. 깊은 산속인데 이 구장부인이 그때는 공산주의 시대니까 그분 남편이 옛날 밥 줬던 그분 남편이 구장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구장 부인이 수소문하고 들어보니까 소문나기를 이 선생님이라는 선생님이 산속에 숨었다는 소문이 나 있소. 그 소재에, 자기는 구장 부인이니까, 자유가 있단 말이에요. 이 분들이 굶어죽고 있겠구나. 그 영감이 오드라 그래요. 내가 만일 갖고 가다가 죽으면 죽자. 그런 생각을 했다고, 나물을 캐러 나온 것처럼 하고는 나물바구니 속에다가 백미 닷 되를 싸가지고 왔더라고 그래요. 주고 가면서 내가 이거 탄로되면 나는 죽소. 그러고 떠났습니다. 

 

 

그래 쌀 닷 되니까 서울 어머니도 이것이 마지막이라 그러 시드만 나로서는 이것이 마지막이오. 길이 없을 것 같소. 선생님은 어디가 계시냐? 거기서 수십 명이 죽은 영감을 하셨던지, 무슨 면목으로 나 혼자 살아가는 거냐는 거예요. 나는 거기서 죽겠다. 잡혀죽는 것은 미안하고 굶어 죽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굶어 죽으려고 앉아계시거든요. 깊은 산속에, 쌀 닷 되를 주고 가서 한 몇 달 살았으니까 그래서 12월말까지 살았는데, 그러면 그 구장부인은 처녀시절에 신자였어. 거기 와서 예수 못 믿었거든. 결혼해 오기 전에 여기 양림동, 여기서 예배당에 다녔다고. 처녀시절의 믿음이야, 그래 우리 생명을 건져줬지요. 쌀 닷 되가 사람을 살렸지요. 말하자면 끝까지, 그런데 육이오 후에 소문 들으니까 남편은 그때 국군이 들어와 죽여 버렸어요. 왜? 그 때 구장이 되어 부역을 했었으니까, 그 마을이 쏘가(몰살) 되어버렸지요. 다 죽여 버렸지요. 

 

 

국군이 들어가서. 그런데 이 부인은 살았든가 이리로 출가했어요. 이리로 가서 빈민굴에 정착하시고 예수 잘 믿는 할머니하고 두 분이 걸인행각을 하는데 꼭 밥을 얻어 와서 그때 사창에 있지만 몸이 안 팔리면 밥을 굶고 있어요. 육이오 후에, 그러니까 밥을 얻어다가 둘이 잡수시고 꼭 그 불쌍한 처녀들을 먹여 살렸어요. 사창가에 정착해갖고 살았어요. 이름이 연임씨에요. 성은 몰라, 연임씨, 그 한번 오셨어요. 나중에, 이리에 계시다가 소위 말하면 참 신비에 쌓인 인물입니다. 그 이 선생님이 알고 그분에게 밥을 얻으러 보낸 거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작품이지요. 하나님의 작품이야. 어제 밤에 목사님도 신비하다고, 그 조그만 애기들 한 십여 명 데리고 사는데 누가 줬는지 모르게 먹여준다고, 이 선생님 일생이 전부 신비지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요. 왜 사람을 만나게 되며, 왜 그렇게 서로 만났는지, 또 찾아왔으면 됐지, 광주에 정착하지 않고 또 장로님 처음에 집을 얻어줬다는 곳이 도구박 골인데 사람 못살 곳이거든요. 거기에 집이 한 채 있더라고요. 거기서 살라고, 거기서 또 옮기셨다. 그 두 분, 그래서 그 말이지요. 장로님이 떠나신 다음에 할 수 있지만 계실 때 그런 일이 착착 시작되면 좋겠어요. 그 뜻을 이번에 주셨어요. 제가 아팠기 때문에, 

 

 

아침에 말씀 했어요. 장로님 말씀에도 병 주는 것은 영혼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알라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계시다. 섭리라고 하셨지요. 이번에 아팠기 때문에 정신 차렸지요. 아프기 전만해도 마음이 들떠있었지요. 막 뭔 일 할라하고 그렇게 생각이 들더란 말씀입니다. 그 빛이 아까 말씀도 그래서 본겁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자꾸 외향적인 밖에 무슨 일 하려고 해요. 영, 영의 운동이 확실해져야겠다. 영적인 운동이, 정신 운동이 확실해져야겠다. 야훼의 영광이 널리 비춘다. 또 모든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이 암흑에 싸여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을 비추신다. 너만을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예수님 은총으로

1. 오, 예수님 은총으로 내 마음을 여시니 영원한 사랑 흘러넘쳐 들어와 가슴 속 스며드네. 자비, 자비 넘치네. 평화, 평화 잠기네.

2. 오, 예수님 자비하신 보혈 흘려주시니.

3. 오, 예수님 사랑스런 기도하게 하시니.

4. 오, 예수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니.

5. 오,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시니

6. 오, 예수님 서로서로 돌아보게 하시니.

7. 오, 예수님 온 인류를 사랑으로 안으니

(후렴)

영원한 사랑 흘러넘쳐 들어와 가슴 속 스며드네. 자비, 자비 넘치네. 평화, 평화 잠기네.

 

이이야기는 2004년1월1일 배석희 언님 증언입니다.

인제 무등산에 맨 꼭대기는 무슨 집이 있다고 그러고, 중간에 오막살이가 하나 있는데 거기다 갖다놓고 나를 거기 갖다 놨어요. 그래서 거기서 살아요. 인제 다른 때는 중간에 집사님 네서 살 때는 이 선생님이 안 오셨어요. 바쁘시니까 안 오셨겠지만 그 무등산 올라가는 중턱에 오막살이에 거기다 갖다 놓고 살 때는 뭐 그냥 하루걸러 오는지 무등산 올라가는 길 초니까 꼭대기 올라가시다가 들어오는지 내려가시다가 들어오는지 아주 사흘들이로 오는 거 같아요. 아주 왜 오시느냐? 그게 있어요. 그 다른 부수가 청년반도 있고 소녀반도 있고 뭐 여러 반이 있는데 노인반도 있고 있는데 가면 열 터지는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 선생님 주관이 뭐냐 하면 그런데서 보고 듣고 답변해주고 그러시다가 위로 받는 데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애기들이 오면 좋아서 껑충껑충 뛰면 가운데 퍽 들어앉아 가지고 애기들이 다 매달려요. 그냥 좋아서, 그러는데 선생님 마음에 뭐냐 하면 ‘나는 꽃밭에 왔습니다. 나는 꽃밭에 왔습니다.’ 기뻐서 그냥 나는 꽃밭에 왔습니다. 나는 꽃밭에 왔습니다. 이러세요. 그냥 그러면 애들이 그냥 매달려서 선생님 뭐 사진 찍어줘요. 뭣도 해줘요. 그냥 조잘조잘 하면 예, 지금 천사가 나란히 위에가 있어가지고 은행자 찍는 천사, 덕금자 찍는 천사, 뭐 일일이 그렇게 이름을 부르시면서 사진 찍습니다. 예쁘게 똑바로 이러면 뭐 진짜인줄 알고 애들이 그냥 또 아주 자세를 잘해요. 그냥 그런 모습을 제가 한데 앉아서 그런 모습을 잘 안 봐요. 내가, 애기들 자유를 주고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인제 나가지요. 인제 그래서 나가서 있다가 들어와서 돌아보고 막 좋아서 인제 기뻐서 그렇게 애기들하고 나누다가 가셔요. 그런데 그런 건수가 그냥 몇 달 만에 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기로 가끔 오십디다. 그때도 나는 이 선생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몰라요. 지금,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예배 석에도 안가요. 이 선생님이 뭐 해야 된다는 게 못가요. 애기들 때문에 나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무슨 성자인지 무슨 강론을 잘하는지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나누는지 전혀 몰라요. 나는 백지에요. 오로지 애기들 키우는 거 내 책임은 애기들 키우는 데만 충성을 바치는 거예요. 그러는데 그 선생님 이야기가 한번쯤은 올만한 사람인데 이 장소에 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오더라고요. 한나 어머니가 오셔서, ‘석희양은 왜 모임에 안 오지?’ 그때는 네 시에 예배를 봤어요. 왜 안 오지? 인제 그런 말씀을 종종해요. 그런데 먼저 걸리는 게 뭐냐? 나는 가면 다리 뻗고 앉는데 그때는 동그랗게 만 했어요. 식구들이 뭐 이렇게 줄을 맞춰서 앉거나  그랬으면 내가 가림이 될 텐데 동그랗게만 앉았어요. 언제든지, 계명산에서도 그랬고 언제든지 동그랗게만 앉으니까 이 다리를 뻗고 앉으니까 죄인이 돼서 못가요. 나는 지금 거기를 그러다가 인제 또 그 무등산에서 애기들을 데리고 사는데 선생님이 오시면 들어오라고 그럴 때가 있어요. 밭에 있어서 밖에 있고 그러면 가서 고모 데려 오라고 애들을 시켜요. 또 애들이 오란다고 하면 들어가 앉았어요. 그때 인제 조금 성경 이야기를 해주세요. 왜냐하면 예배도 못 보러와. 또 무슨 모임 하는 데도 안 나와, 그러니까 무척 내 영혼이 약해 보였는지,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이게 그때는 좋았는데 세월이 흐르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그런 기억도 있어요. 지금 그러면서 그 선생님이 하도 거지처럼 빼빼마른분이 그때는 거지도 그렇게 안 입었을 거예요. 쪼록쪼록 헌옷만 입고 다니는데 이렇게 올라가시면 나가서 애들이 다 쳐다보고 인제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뭐 애들이 조잘거리면 되게 옷을 남루하게 입었으니까 선생님은 저렇게 입어야 되는가 보다. 나는 그냥 그때 뭐 교육을 받아봤어야 뭔지 알고 들어봤어야 아는데 전혀 몰라요. 나는 전혀 백지에요. 그러니까 되게 저렇게 말하자면 헌옷입고 다녀야만 선생님 인가보다. 인제 동광원 이라는 데는 원칙이 그런가보다. 이렇게만 알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때 인제 어디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냐 하면 수레기 라는 데를 또 날 데리고 가서 애기들을 데리고 가서 살라고 하더라고요. 수레기 라는 데를 가서 살아요. 지금 그냥 수레기라는 데 가서 살 때 선생님이 그때 어떤 마당에다가 이 선생님 누님 댁 이라는 거 같아요. 내가 지금 오래 됐기 때문에 희미하지만 누님 댁이라는 데다가 멍석을 두 개인가 펴놨습디다. 멍석을 펴놨는데 몇 사람인가 왔는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 다 왔나 봐요. 멍석에 다 앉았어요. 난데없이 이 선생님이 이야기를 잘 하십디다. 동네사람인지 교우인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또박또박 하시다가 저 강화도 섬사람인데 삼남성 이라는 이제 그 옛날에 전쟁 때 성을 쌓고 있던 삼남성이 있는 거기서 오신분이 하나 있는데 그 분의 말씀을 들으시오. 그리고서 어디로 가버려요. 그 지적이 나예요. 인제 말하자면 그때 처음으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벼락을 맞는 줄 알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또 이 선생님이 나한테 말하라고 밀어 던진 거 같아서 짐작으로 사람은 없으니까 이 동네 사람뿐이니까 그래서 제가 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요. 했어요. 그리고서 애기들이 그때는 나 혼자 갔는데 나 혼자 어떤 방에다 둬두고서 애기가 하나씩 나하고 키운 애기들이 옵디다. 인제 그래서 그 누님 방에서 누님 네 방 하나를 줘가지고 살았어요. 그 누님 준 방에서 살고 있는데 그때는 소녀반인지 또 무슨 반도 같이 살았는지, 그랬습니까? 금남 양? 소녀 방인지 하여튼 식구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직원회의를 한다고 밤 한시에 오래요. 어디 계셨냐하면  아주 깊은 산속이야. 나 지금 아주 깊이 올라가는데 캄캄한데 올라가는데 너무 깊은 산속이에요. 그게 소반바위라던가? 소반바위라고 그러는 것 같아요. 깊은 산속에 갔습니다. 그때는 눈이 하얗게 왔어요. 그래서 애기들을 재워놓고 한시에 거기를 갔습니다. 갔는데 내가 가면서 기도를 항상 기도 중에서 기도를 하고 하지만 인제 갑니다. 지금 처음으로 직원회의를 간다는 건 처음이에요. 아주 동광원에 들어와 가지고 처음이에요. 그래서 직원회의를 가는데 우연히 길을 보고 가다가 저쪽을 쳐다보니까 십자가가 딱 내 눈에 띄었어요. 그런데 아주 밝은 빛으로 십자가가 딱 비출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계셨는데 희미하게 예수님이 내가 쳐다볼 적에 또렷하게 있었는데 차차 없어집디다. 그러더니 그 십자가가 사라졌어요. 이상하다. 그래도 나는 그때 나이에도 내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정말 항상 원하니까 이 길에서도 보여준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 선생님한테 갔어요. 갔는데 조그만 골방에가 쭉 지금 뺑 돌아앉았어요.

 

 

그런데 그때로서는 성 권사님 정 선생님 오 집사님 김 선생님만 빠졌어요. 남자로서는 무슨, 무슨 집사님해서 몇 분이 계셨고 어머니로서는 다 있었어요. 금남양도 있었어요. 내 기억으로서는 갈보리 어머니 갈보리 어머니 동생 귀주 어머니 한나 어머니 해서 뺑 둘러앉으니까 그 방이 꽉 찹디다. 인제, 그래서 앉아서 이 선생님이 이야기 하시기를 뭐라고 하시냐하면 그 분은 직접 이야기 하는 게 없어요. 다 비유로 이야기를 하세요. 누가 답하는 소리 하나도 없어요. 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한참 말씀을 하시다가 저 책상 밑에서 종아리채를 세 개를 꺼냅디다. 요만큼씩 한 막대기를 세 개를 꺼내놓더니 딱 세 개를 앞에다 딱 놓고 자기 그 빼빼마른 종아리를 쳐들어요. 이제 이렇게 쳐들더니 내 종아리를 때리시오. 내가 잘못 교육했고 보여준 것도 없고, 했기 때문에 내 잘못이오. 그러니 내 종아리를 때리시오. 그리고 종아리를, 이걸 다 걷어치워요. 인제 그런데 빼빼마른 종아리를 그러니 누가 그 종아리를 때릴 사람이 있어요? 어느 누가 더 먹먹하고 더 꾸부러져 다 빠져버렸어. 그러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니까 왜 말들을 안 해? 저렇게 안타깝게 있는데 왜 말들을 안 해? 내가 화가 나는 거야. 그냥 뭐 그거 그 사람 네들 무슨 사상이 있는지 주관이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 모르니까 백지니까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나는 백지니까 죄다 둘러보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죄다 머리를 가운데다 놓고서 있습디다. 이상도 하네. 그렇게 답답할 때 이야기 한마디라고 하지. 왜 이야기를 안 해? 내가 속으로 그렇게 불이 나는 거야. 그러더니 종아리를 이렇게 내리키더니 내게로 화살이 딱 들어와요. 이 선생님이,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지. 저분 이야기 하는데 비유로만 하니까 저분 이야기를 한 오래기도 잊어버리면 못 알아들으면 내가 답변을 못해. 그러니까 나를 쏴대고 이야기를 하니까 잘 들어야지 하고 그 이야기 하는걸 총알같이 꿰어가지고 나도 비유로 답변을 하는 거야. 그냥 그때는 내가 뭐 철부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때는 이 선생님 뭐라고, 뭐라고 그러면 나도 답변을 막 해내는 거야. 아 그런데 이 선생님이 끝도 한도 없이 이야기를 해요.

 

 

그래가지고 해가 이 창살에 다 올라왔어요. 밝아 가지고 아 그러더니 이 선생님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나 배불러요. 문을 열어놓으라고 그럽디다. 나 배불러요. 그리고서는 인제 문을 확 열어놓으라고 해놓고서 나 배불러요. 그러고서 가래요. 나는 애기들이 밝으면 일어나는데 이 애기들이 일어나면 나를 얼마나 찾을까? 하구서 나만 줄달음질로 와요. 지금 막 집을 향해서 오는데 큰 냇가가 있었어요. 지금도 있는지? 자갈돌이 많고 그럽디다. 냇가가 있었는데 눈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냇가 물은 없어도 오는데 뱀이 이따위 굵은 뱀이 도막이 쳐서 탁탁 잘라져가지고 순서대로 있는 게 아니라 가운데 대가리가 있고 꼬랑지도 가운데 있고 뒤죽박죽이 돼서 내 앞에 딱 막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멈추면서 눈을 딱 감아버렸어요. 안 보려고 눈을 감아버리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음성이 들려요. 뒤에서 무슨 소리들을 하나 했더니 싸워요. 지금 뒤에 사람들이 왜 이 선생님 따라다닌 지가 8년 됐어. 우리는 이 선생님 제자가 된지가 6년 됐어. 이 선생님 따라 다닌 지가 4년 됐어. 인제 온지 일 년도 못된 아무것도 아닌 백지, 배불러? 그게 어디가 된 말이냐? 이거에요. 그래가지고 뒤에서 왕머구리 끓듯 주거니 받거니 그런 소리가 들려요. 그러니까 내가 가슴을 탁 치면서 응 질투 있는 곳이 여기로구나. 나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으러왔지. 사람 안 믿으러 왔어. 딱 마음에 작정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서 내려다보니까 없어요. 뱀이 어디 간 데가 온데가 없어요. 그래가지고 집에 내려왔거든. 그 다음부터는 이 선생님이 수양회를 한다. 뭐 공부를 시킨다. 뭐 그냥 무슨 특별 강사를 불러다 뭐를 한다. 양림동에서 뭐를 한다. 안 갔어요. 이 선생님 공부시키는데도 안 갔어요. 오로지 애기들 애기만이 내 앞에서 건강히 잘 키우는 거 그것만 주관했어요. 그럴 때에 그것도 위에서 주신 지혜인데 정말 나한테는 아침저녁은 약하게 먹이고 가운데 점심만은 배불리 잘 먹여라. 요 런 지혜가 왔어요. 그래서 아침저녁은 애기들을 먹이고 점심만 삼시를 해 먹이는데 그렇게 잘 먹여서 그런지 애기들이 환자들이 그때 많았어요. 뭐 각혈하는 아이 무슨 옴쟁이 뭐 무슨 아이 많았어요. 그런데 약하나 안 쓰거든요. 지금 그런 애기 데리고 살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보셨는지 다 낫게 해 주셨어요. 그러느라고 저는 제 나름대로 지금 정말 하나님 눈에 드는 사람 되고 싶어서 정말 하나님 딸답게 사는 그것을 애기한테서도 제가 애기들 키운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 했어요.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람이 돼. 너희들이 나 사람 만드는 도구다. 생각해서 얼마나 존경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때 이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여자는 양을 붙이고 남자는 자를 붙이라고 그래서 남자가 은행이라고 하면 은행 자 라고 부르고 영희라고 하면 영희 양 하고 불렀지. 영희야 이리와. 이런 소리 못했어요. 그리고 공대를 하라고 그랬어요. 왜 그 영혼이 내 영혼보다 높다 이거야. 그래서 공대를 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영희 양  오세요. 이랬지 영희 양 이리와 못했어요. 그렇게 애기들하고 살면서 하나님이 항상 그렇게 가리켜 주는데 어떻게 가리킴을 받는가 하면 애기들을 다 재워놓고 애기들을 위해서 그 다음날 살 거를 물어요. 지금 하나님께 내일 애기들하고 살 때 어떻게 살면 되지요? 하나하나 묻습니다. 다 각각이니까 성품들이 다르니까 물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참 내가 쉽거든요. 그래가지고 참 끔찍이 저를 사랑하셨어요. 하나님이, 그래서 많은 것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삽니다. 한 날은 또 이 선생님이 어디를 오라고 하냐면 우리가 감나무 골에서 사는데 등성이 넘어서 거기를 뭐라고 하지요? 소반바위 말고 수랑 골 거리 오래요. 애기들을 다 데리고 오래요. 나는 정말 애기들 데리고 오라고 하면 선생님이 오시면 좋은데 그 애기들 다 데리고 오라면 걸어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깔끔하게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내려와. 또 내려가려면 미끄러져 내려가. 넘어져 애기들을 데리고 가려면 두 시간 세 시간씩 걸려요. 업어 내려야 되고 안아 와야 되고 그러면서 수랑 골에를 갔어요. 제가 왜 오라고 했냐하면 교육을 시키신대요. 보모 교육을 그때 보모 두 분을 데리고 왔습디다. 그리고서 거기서 교육을 시킨다는데 지금 이 선생님 교육은 처음 받아 봐요. 내가 지금 이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 성서 말씀 예배 보는 이야기 한 번도 못 들었어요. 그리고서 처음 직원회 한다고 할 때 그때 가서 해 보고는 안했거든요. 그리고는 처음으로 지금 공부 하러 오라고 해서 거기 공부 하는 거예요. 요한1서 공부를 하는데 사흘을 했어요. 제가 그 감나무 골에서 수랑 골에 가면서 감나물 골에가 인제 일찍 떠나야 되지요. 거기를 갈라면 공부도 해야 되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애기들을 씻기고 먹이고 다 해가지고 갑니다. 가고 해가 여기까지 올라와요. 인제 시간이 없지요. 애기들을 밖에서 놀게 하고 공부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내가 제일 기뻤던 거는 애기들을 이 선생님 맡겨놓고 상관안하고 밖에 나가 김을 매든가 주방에 가서 일을 하든가 그때가 참 좋아요. 마음이 편하고 그때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애기 맡기는 기분으로 이랬을까 알지요. 그러면 이 선생님이 애기를 데리고도 가만히 안 있어요. 밥을 조금 주더냐? 배고팠냐? 때리더냐? 이런 걸 다 물어요. 내가 살아온 걸 그러면 애기들이 답을 하지요. 그랬든 저랬든 잠깐이라도 애기 안보니까 좋은 거야. 편하고 맡겨버렸어. 그리고서는 밭으로 갔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공부 시간이라고 들어오라고 하면 애기들을 밖에서 놀게 내버려두고 공부시간을 합니다. 지금 공부시간이 돼서 하는데 처음으로 해보는 거지요. 선생님 앞에서 요한1서나 알지. 뭐 이 선생님이 해주는 교육이 참으로 좋다. 나쁘다. 진리다. 이런 건 분간도 못했지요. 지금 나는 애기들이 머릿속에서 애기 밖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오줌똥이나 싸지 않았을까? 이 생각에 가 있어요. 애기한테 그리고 선생님 읽으라는 대로 읽기만 하고 그래 답하라는 대로 답만 해주는 거야. 나는 그리고 사흘을 공부를 했습니다. 마지막 날 보모 둘을 딱 셋을 앉혀놓고 지금 이 선생님이 한 사람 한사람 씩 감정을 해본거야. 성격은 어떻고 믿음은 어떻고 뭐 마음은 어떻고 그걸 다 마음을 꾀 뚫어 알아가지고 평가를 내려요. 지금 선생님이 그래 보모 둘을 다 평가를 내렸는데 그건 다 기억에 없어요. 그래 내 차례가 됐는데 나를 평가를 합디다. 그래 들어요. 지금 평가를 다 했습니다. 그것도 평가 해 놓은 것도 그냥 다 던져버려 나는 애기만 데리고 또 와야 되니까 몇 시간씩 데리고 와야 되니까 넘어질까 자빠질까 해 있을 때 떠나서 오는 거예요. 제가 3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하도 돌아다닌 데가 많고 끌고 다니니까 이 노트장이 너무 중량도 나가지만 보관할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그거를 태웁니다. 지금 어디로 떠나려고 작정을 하고 태우는데 처음으로 내가 일기장에서 이 선생님 평가가 나옵디다. 어머, 이런 때도 있었나? 그리고서는 일기장을 태우면서 읽어둔 거예요. 아 이 선생님이 이렇게 이야기 해 준 때도 있었네. 그러면서 그 기억이 항상 잊어버려지지 않아요. 내 머릿속에 처음에 나 평가했을 때는 다 잊어버렸어요. 오로지 애기만 잘 키워야 돼. 나는 그냥 그랬다가 그 일기장에서 봤는데 나한테 평가를 이 선생님이 하셨어요. 어떤 평가를 했냐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도에 아주 진도가 빠르대요. 남보다 빨리 도하고 하나가되는 그런 마음씨가 있기 때문에 조심할게 두 가지래요. 뭐냐 하나는 인제 누구하고 상대해서 이야기 해 보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나하고 똑같은 수준인줄 알고 이야기 했는데 못 알아듣는다. 그럴 때는 교만이 나오지 않으면 슬픔이 나온다고 두 가지를 주의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쓰여 있어요. 아 그래 내 성품을 바로 판단 하셨네. 그런데 그 도에 다른 사람과 달리 빠르다. 인제 거기에 나는 그런 거 없는 거 같은데 이러고 있는데 첫 번 인제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뭐 인고 하면 내 성품을 평가한 거예요. 내 성품을 평가했는데 어떻게 했냐하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꽃이 만발한 봄날인데 너무 예쁜 꽃들이 오색을 찬란하게 여기저기 피어있는데 다 꺾어서 가지 수를 다 맞춰서 한 아름 안고 내려오면서 세상 사람들더러 뭐라고 하느냐하면 향내를 맡으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향내를 맡으십시오. 내가 그러는 성품 이래요. 그거가 하나 나오고, 또 하나는 셋이 나왔는데 또 하나는 추운 날 깊은 산에 가서 나무를 마른 나무를 한 짐을 지고 내려오면서 길가에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발 녹여가지고 가세요. 쉬어 가세요. 그러는 성품이래요. 내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사막에다가 샘을 터트려 놨는데 샘을 파놨는데 지나가는 분들에게 짐승도 목을 적시고 행인도 목을 적시고 이 샘물로 평안히 배불리 가세요. 그러는 성품 이래요. 나를, 그런 걸 적어놨어요. 내가 그런 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이 선생님이 말씀 하신 거니까 그 노트에 적어놨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일기장 불태우다가 그것만 뚜렷이 안거예요. 그리고 있으면서 인제 세상살이를 살 때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주셨으니까 했겠지만 바쁜 시간에도 바쁜 날이라도 선을 하나라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어요. 내 성질이, 착한 일을 알던 모르던 누구께 던지 착한 일을 하루 한 개를 안 하면 안 되어요. 그래서 그게 몸에 굳어가지고 자동적으로 해지는 거예요. 인제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니 당신 빈손이면서도 그걸 어떻게 해? 응 위에서 하나님이 계시니까 긴 답변 못해요. 그리고 했는데 그 노트 장을 그렇게 한번 발견해 가지고 아 아름답다. 내가 생각을 하면서도 당신이 위에서 주셨으니까 이렇게 아름답지요. 인간이 조작을 했다면 거짓될 건데 참 아름답다. 이 선생님하고 살면서 제가 거지잔치를 한번 한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무등산에서 기억 나실걸요. 거지잔치 한번 했지요? 무등산에서 그때 쑥떡 베를 많이 갖다 줍디다. 나를 뭐 잠방인데 여름인데 잠방이를 만들어다  줍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