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작업 삼일째 : 통회의 맨발
금년 대설은 따뜻했다. ㄴ문 없이 매일 작업을 한다. 무청은 덕장에 걸고 무는 말랭이를 하려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미루어지고 있다.
통회의 맨발
1991.01.11. 김준호 선생
요한복음 1장 16절 17절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로서 하나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에게서는 은총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 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다. 3장 17절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율법은 단죄를 하는 것 이고 구원은 은총을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요. 구원은 은총에서 오는 것이고 단죄는 율법에서 오는 것이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다. 모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죄, 단죄를 받기 위해서 바라는 것이고 예수님을 바라는 것은 은총을 받기위해서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분에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한번 받는 것이 아니고 받고 또 받았다. 날마다 아침마다 때때마다 또 받고 또 받아야지요.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주려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되면서 그러면 예수님이 땅위에 오셔서 처음에 하시던 말씀 가장 처음에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 모세가 가르쳐준 율법은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해설이고 예수님이 주신 은총은 은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행위 아니고 믿음으로 그렇게 분석하신 분이 사도 바울이시지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은총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은총에 앞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렇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러면 은총에 의지해서 단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단죄를 받으면 가슴이 아프지요. 영혼이 아프고 영혼이 정죄, 어떤 의미에서 절망에 이르지요. 그러니까 영적 고통이 절망에 이르러서 회개하므로 회개가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말씀하신대로 회개하라. 단죄를 받았을 때 고통이 일어나고 회개했을 때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 자비를 베풀겠다. 구원을 주겠다. 그렇게 해석이 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 6절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 사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기 위해서 보내신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자비의 때이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율법의 때가 아니요. 정죄의 때가 아니며 자비의 때이며 불쌍히 보고 사랑하는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은 아닙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은 아니야. 오늘이 단죄의 때가 아니요. 바로 구원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고 이제 사무엘하 말씀을 상고해 봅니다. 그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에 의해서 참 정신고통이 심했다. 말씀했지요. 그런데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씀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장면은 그런 자비를 베푼 것이지요. 정죄를 하지 않아요. 아들로서 아버지를 반역했다. 그 정죄하는 것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끝까지 자비를 베풀어, 그 점을 은혜라 하겠어요. 다윗은 예수님은 아니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이었다. 어떻게 하던지 아들을 살리고 사랑 할라고 했던 것이지 아들을 천에 만에 한 칸도 내 아들을 살해해야겠다. 죽여야 하겠다. 하는 뜻은 한 번도 품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19 장, 왕이 그 아들을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니라. 아들이 죽었다는 말이 아버지한테 절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슬펐어. 그게 자비 이지요. 그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려고 했던 일구월심의 소원이었지 천에 만에 한 칸도 내 아들 죽여야겠다. 단죄해야겠다. 정죄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 가니라. 이겼어도 모든 군인들이 숨었다고. 왜 대왕께서 슬퍼하시니까 왕이 얼굴을 가리 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어찌되었든지 그 아들이 죽었으니까 전혀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게 자비지요. 반드시 아들은 죽을죄를 지었어요. 그러나 그 아버지는 죽기를 원하지 않아. 살기를 원해. 그게 단죄가 아니고 자비심이다. 그 말이에요. 은총을 베풀고자 함이다. 그렇게 설명이 되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은총으로 대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고 결코 단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그 심정이 예수님의 심정과 똑 같았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땅위에 오신 것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다닌 것은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 죽이려고 피해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제 우리가 생각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회개하시고 하나님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것은 그 예수님에게서 받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 구원의 은혜에 감격, 자비를 얻은 것에 감격을 했다. 그랬지요?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했지 예수님의 단죄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니다. 그 자비에 녹아나서 회개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제자들이 항상 스승께 대해서 의심은 얼굴도 못나고 키도 적고 몸에는 병 투 성이 이고 또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군중이 수만 명이 존경을 하며 뒤따라가는 것인가? 그게 의심났다. 하지 않아요? 살아보니 백성들은 어찌하여 스승을 그렇게 존경하며 사랑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프란치스코는 너무나 죄가 많고 너무나 불쌍해서 자비를 베푸신 까닥이다. 단지 이유는 그 것뿐이지 아무것도 내게는 선한 것도 없고 나는 죄 뿐이다. 그렇게 대답하셨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해서 사랑하신 것이지 결코 내게는 선한 것이 없다. 그렇게 설명 하셨어요. 자비의 때이며 구원을 날을 맞이해서 프란치스코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 생활을 한 것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 말이에요. 무슨 행실이 곱다 던지 무슨 적도를 많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이 스승의 전기를 쓸 때 우리 사부님이 회개하신 날부터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하루하루를 잘 살았다고 그렇게 기록했다. 그런 점이지요. 우리 사부님이 고행한 날로부터 또 무슨 선한 일을 하시기 시작한 날부터 그렇게 이렇게, 이렇게 사신 것이 아니다. 살았다 무슨 그런 기록한 사실이 없어요. 어디를 떠들어보나 우리 사부님이 회개 하신 날 후, 회개하신 날부터 이렇게, 이렇게 울 으시고 감사하시고 살았다. 그런 기록뿐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살펴보면서 그 눈이 우리들 눈이 빛으로 향하는 것이다. 밤을 보고 놀라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질 때 밤을 보고 밤을 의지하고 초조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동쪽에 해가 뜨니까 아침을 맞이해서 지금 다섯 시가 넘었지요? 해가 곧 뜰 테니까 이젠 아침이 돌아왔다. 해가 뜬다. 빛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그런 소감입니다. 그 동안에는 우리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해가 뜨니까 빛을 보고 감사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들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이왕에는 우리 선생님이 선행을 많이 했다. 깨끗이 살았다. 그 덕행을 의지하고 믿어볼라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떨었지요? 정죄의식에 떨었어요. 나는 옛 선생님만큼 살수도 없고 선생님만큼 그렇게 깨끗할 수도 없고 나는 죄인이다. 그 판단을 모세의 법에다 두고 판단했기 때문에 항상 침울하고 소망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은총에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자비에 눈을 떴기 때문에 희망이 있어요. 감사하고 왜 무조건 용서하시고 무조건 사랑하시니 아무것도 한 일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지만 무조건 저를 사랑하시니 감격이 있을 뿐이고 감사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랑에 눈을 뜨고 낮에 속한 사람이 이제는 되었다고 하는 그런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밤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낮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비관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낙관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은총에 예속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압살롬과 같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쫒아 다닌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는 다윗과 같이 아들 살려주려고 쫓겨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신앙 목적이 달라진다. 기도 목적이 달라진다하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까 성경 말씀이 다시보이더라.
어제 봤지요? 사무엘 상 15장 30절. 그래서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올리브산 등성이를 걸어올라갔다. 이 처참한 대목, 사랑하는 자식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 아버지의 모가지를 베기 위해서 칼을 들고 쫒아 오는데 자기가 아들한테 맞아죽기는 쉬워도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입힐 수는 없는 것이고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내가 살든지 죽던지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할 것이고 내가 할 일은 도망가는 거다. 내가 도망하므로 내 아들을 살려야겠다. 단지 그 마음뿐이야. 내 아들을 피해서 도망가야겠다. 그래서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죽이고 승리할 마음을 먹었다면 불효자식 이니까 내 아들을 죽여 버려야겠다. 그렇게 반기를 든 아들한테 마음을 품었더라면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거지요. 맞서가지고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내 아들은 큰 죽을 위기에 빠져있단 말이에요. 맞아죽을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에 내가 도망가야 내 아들을 살리겠다. 자꾸 도망감으로 내 아들이 칼을 내리도록 내 아들이 회개하고 스스로 자기가 칼을 꺾어버려야 살지, 칼을 들고 맞서버린다면 그건 참 그건 아들이 이길 수가 없는 대세거든요. 아버지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가 없지요. 그래 이 직감적인 평소의 다윗의 자비심 이지요. 평소에 사랑하던 아들 사랑이 그런 것이지요. 이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아들이 반역했다는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사건 아닌가? 얼마나 부끄러워 너무나 부끄러워.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럽고 사람들이 부끄럽고 머리를 가릴 수밖에 없지요. 또 울지 아니할 수밖에 없고 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 구원받았다. 그 은총으로 자비를 베풀었다. 그 사연은 자비를 베풀었다. 울었다는 뜻이거든. 하나님이 울은 거예요. 슬퍼하신 거요. 불쌍해서 울은 것이지요. 자비를 베풀었다. 다윗은 자기 아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울어요. 자기가 죽는 것이 서러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죽을 일을 미리알고 울어. 서러워, 자비를 베풀어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 발로 맨발로 이 맨발로 말이 어감이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 선생님이 맨발로 가던 길과 아마 그 성질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지금 다윗이 맨발을 벗은 것은 고행 행위가 아니에요.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적 등 하나님 앞에 공을 세워야겠다.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 맨발을 벗은 것이 아니에요. 넋이 나가서 정신이 빠져갖고는 맨발을 벗었는지 신을 신었는지 혼비백산 해가지고 죽은 목숨이라고요. 가슴이 찢어지고 아프고 괴롭고 넋이 달아났어요. 그러니까 죽은 목숨이야. 통곡하면서 맨발을 벗는 것이란 말입니다. 회개했다고 그럽디다. 신학 상으로는 자기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솔로몬을 낳았기 때문에 그 솔로몬에게 왕위를 준 것이 압살롬에게 노여움을 돼가지고 아버지를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압살롬이 나를 반역한다. 그 생각 할 수도 없고 가슴이 괴로운 것은 내가 솔로몬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범법을 한 죄 때문에 내가 범법을 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시켜서 나를 벌하신다. 그 통회심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설을 하는 겁니다. 이 성경구절을 자기 죄에 떨면서 울고 맨발벗고 올라가는 길이지, 압살롬이 지금 말씀한대로 괘씸해서 압살롬이 미워서 압살롬이 원망스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다. 압살롬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우리아의 아내를 강간하고 또 거기서 솔로몬이 낳았고 또 충신을 죽이고 한 내 범법 때문에 자기가 이런 환난을 만났다고 믿기 때문에 통회하는 울음이다. 그렇게 해설하지요. 자기 죄를 통회하면서 맨발로 올리브 산을 올라갔다. 그 점이지요. 통회의 눈물, 이 고행의 눈물이 아니라 통회의 눈물이었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를 지도하시던 이 선생님의 눈물은 결코 고행의 눈물이 아니었고 통회의 눈물 이었고 우리의 선생님 이 선생님이 맨발을 벗은 것은 고행의 발길이 아니고 통회의 맨발이었다. 고행을 하기 위해서 맨발을 벗은 것이 아니라 통회의 발걸음 이었던 것을 우리들이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하기 위해서 맨발을 벗었다고 한다면 밤중에 가는 길이 아니야. 밤중에, 고행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내가 고생을 많이 해서 공을 세워야겠다. 밤에 가는 길이고 이 통회의 발자국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낮에 가는 길이지요. 낮에, 낮에 울면서 맨발 벗고 가는 길이지요. 빛을 향해서 사랑을 의지하고 가는 발걸음 이지요. 사랑, 우리 이 선생님의 눈물이나 맨발은 그리스도의 감격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고 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그 자비의 감격해서 맨발 벗고 올라가던 길이다. 그렇게 알아지면서 희망이 생겨요. 아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많이 굶고 많이 고생하고 또 많이 적선을 하고 많이 정절을 지키고 그렇게 갈라하면 정죄뿐이에요. 아무리 무엇을 해봐도 절망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선이, 섬김이 되지 않아요. 사람이 아무리 해보아도 순결에 예속되지가 못해요. 몸은 깨끗해도 마음이 더럽고 마음을 아무리 닦아 봐도 마음이 다시 더러워지고 정죄 정죄로 빨려들어가지요. 선행을 하다보면, 그러나 예수님의 하시던 그 말씀을 따라 나는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그 자비를 의지할 때 회개뿐이에요. 주님 오늘 제가 잘못했어요. 주님 제가 너무나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울면서 맨발로 주님을 따라가요. 그것은 구원이지요. 회개의 길이니까, 고행을 하기위해서 따라간다면 갈수록 절망입니다. 갈수록 절망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간다면 울어도 희망이 있고 맨발로 가도 행복이에요. 사랑을 의지하니까, 이 선생님이 맨발을 벗었던 길은 그 법률 율법을 의지하고 가는 길이 아니고 은총을 향해서 자비의 감격에서 가던 발길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될 때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좋은 선생을 우리에게 주셨다. 좋은 지도자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그렇게 희망이 물결같이 용솟음칩니다.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올리브산 등성이를 걸어 올라갔다. 그 말이 지금 자꾸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절대로 자기 아들 압살롬을 저주했거나 미워했거나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다. 그래 31절에 다윗은 압살롬의 참모가운데 아히도벨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이렇게 빌었다. 하나님 야훼님 제발 아히도벨의 꾀를 뒤집어 주십시오. 아히도벨의 그 꼬임에 든 아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우쳐 주시라는 겁니다. 아히도벨의 꾀를 뒤집어 주십시오. 기도는 그 것 뿐이야. 내 아들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했어.
우리가 참 기도할 제목도 내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내 어리석은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그 말 뿐이에요. 그 기도뿐이에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왜 내 동생이 나를 오해할까? 풀 수는 없어요. 도망가요. 자꾸 피해. 왜 동생의 마음이 돌아설 수 있도록 이유 없이 동생이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니까 왜 너는 나를 미워하니 따지는 것은 율법이거든. 따질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나님 동생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마음이 돌아서면 서로서로 은인인데 서로서로 원수가 아니라 은인인데, 마음이 돌아서야지. 행실로는 되겠느냐? 아무리 잘해도 행실로는 더욱 더욱 미움을 받거든요. 행실을 잘하므로 내가 신용을 얻어야겠다. 그 천부당, 만부당 오산이라고요. 잘 못했으니까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잘하면 더 미워해, 잘 할수록 더 미워합니다. 법이라는 것 그렇습니다. 법이라는 것 묘한 것이 법의 성질이어서 내가 밥을 안 굶으니까 미워하나보다. 그런 오해를 했다면 더 굶어 봐요. 하루 삼일 오일 칠일 팔일 십일 이십일 삼십일 많이 굶으면 더 미워해. 그게 율법이라고요. 그래 마음을 바꿔야지. 마음이 낮아지고 은총에 눈을 뜨고 사랑으로 마음이 돌아서야 서로 감사하고 오해가 풀어지는 것이지 행실로는 못하면 이브가 되어서 미워하고 잘하면 시기해서 미워하더라고요. 더 잘하면 더 미워해요. 예수님이 너무 잘하므로 바리새교인들이 미워서 십자가에다 못 밖은 것입니다. 무슨 예수가 잘못이 있어요? 너무 예수가 잘하니까 죽일 만큼 미워했지요. 죽기까지 미움을 당한 것이야. 그런 것이 그래 다윗의 기도를 우리가 본받아야겠습니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제발 아히도벨의 꾀를 뒤집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내 언니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지. 누가 나를 미워한다. 아버지 내 동생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마음이 돌아서야지 마음이 돌아서지 않고 행실로는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미움뿐이라고요. 절대 존경이 없어요. 그럼 눈을 떠야겠다. 영안이 열려야겠다. 행실로는 땅위에는 행복이 없고 평화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함으로 은총으로만 마음에 평화가 오고 마음에 희망이 오고 기쁨이 오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자비의 눈을 떠야겠다고 모세의 율법에 눈을 뜨면 불행하니까 눈을 감아버리고 예수님의 자비의 눈을 뜨므로 예수님의 구원의 눈을 뜨므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평안을 얻을 길이 우리에게 이제는 바야흐로 준비해 오셨기 때문에 열려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이 선생님이 저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임종 하실 때 기뻐했던 것 그렇게 나름대로 해석했거든요. 얼마나 고행 난행을 많이 하시다가 쉬시니까 기쁜가보다. 그렇게 생각 했거든요. 얼마나 굶으시고 얼마나 참고 모질게 참고 또 참고 얼마나 고행 난행을 많이 하시다가 숨을 거두시니 얼마나 평안 하실까? 그렇게 해설했거든요. 그러니 막연하지요. 존경을 그렇게 했거든. 그건 천부당, 만부당 오해다. 너무 마음을 잘못 먹었다. 마음을 바꿨어요. 마음을 바꿨어요.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 이 선생님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보셔서 무조건 평화를 주셨기 때문에 가슴이 터지도록 기뻐했거든요. 오매 기뻐, 오매 기뻐. 내 심장이 찢어지도록 기뻐. 실상 이 선생님은 심장이 부어서 죽으셨거든요. 폐병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가슴이 (끊김)
너무 기뻐하셨어. 그러면 그 기쁨이 고행 난행해서 기쁘냐? 무조건 예수님의 은총에 감격하시고 구원에 감격하시다가 기뻐서 하늘나라 가셨지요? 그렇게 짐작을 했어요. 그 임종하시는 것을 우리 이 선생님은 순결을 지켜서 너무 깨끗하게 정절을 지켜서 저렇게 기뻐서 임종하시나보다 그렇게 생각 했더라고요. 그러니 눈을 다시 떠봤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다시 떠서 보면 이 선생님은 정절을 못 지켜서 통회하신 분이다. 해설이 달라지더라고요. 너무 깨끗지 못해서 일기를 보면 돌아가시기 5일전 까지도 통회하시거든. 아주 자기 마음은 더럽고 추악하고 아 나는 어찌 마음이 추한지요? 그렇게 통회 하셨더라고요. 그리고 그럼 왜 그 사람은 선생님은 영혼이 기뻤을까? 그래 눈을 떠서 보니 다르더라고요. 고행 난행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은총에 감격해서 기쁨이더라. 예수님의 자비에 녹아나서 기쁜, 그 기쁨 이었다. 아 무조건 받으신 은혜지. 행실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었구나. 해석이 달라지면서 희망이 생깁디다요. 우리 선생님이 받으신 은혜 나도 받으면 행복하겠다. 우리 선생님이 용서 받으신 용서 나도 받으면 행복 하겠다. 우리 선생님이 감격하던 그 은혜를 나도 받으면 나도 행복 하겠다. 그 희망이 생기면서 기쁨이 와요. 소망이 생기니까 기쁨이 오고 평화가 오고 남은 몰라봐도 스스로 행복해. 그래서 감사 생활이 되더라고요.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그래. 저 같은 사람은 이 철없는 사람이 무엇을 감사하냐 하면 키가 작은 것이 어떻게 감사한지요. 옛날은 키 큰 사람을 부러워하고 항상 불평했다고, 키가 작으니 이마도 안찌지요? 어디가면 키가 작으니까 천하만사가 좋더라고요. 그전에는 죄 없는 사람이 부럽더니 이제는 죄 많은 사람이 부럽더라고요. 죄 제일 많은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아니에요? 예수님이 제일로 그 언니를 제일로 사랑하시거든. 임종하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그 언니를 제일먼저 만나보시거든. 그러니 성녀니 뭐니 그런 말 어색합디다. 언니지요. 그래서 이 선생님 말씀하신대로 우리 예수님은 언니시다. 제일 좋은 언니시다. 우리 예수님이 진짜 언니시다.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황송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 하셨어. 예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정정 부끄럽거든. ‘님’ 을 부쳐드려라. 언님, 우리언니, 우리언니 우리 언님, 언님이라고 불러드린다면 최상의 존경 사다. 최상의 존경 사다. 그 목포에 공동체에서는 언님 이라고 부릅디다. 수녀라고 부르지 않고 언님 김 언니 박 언니 존경할 때는 언님, 아무 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상용하시거든. 매일 쓰는 거지요. 식구대로,
그런데 우리한테 최 흥종 목사님이 남자는 아무개 자라고 불러라. 공자 맹자 최상의 대접이다. 여자들은 언니라고 불러라. 그게 최상의 대접이다. 그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가장 존경하는 선생이 언니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언니시다. 언니라고 부르고 살아라. 그렇게 가르쳐 주셨지요. 그럼 얼마나 큰 대접이요. 언니, 언니, 응용을 오히려 목포에서 잘 하더라고요. 그 말을 응용을 잘하십디다. 그래 소원은 그겁니다. 이아침에도 마음을 바꿔주십시오. 마음을 바꿔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빛을 보게 해 주십시오. 어두움을 보고 공포에 떨 것이 아니라 빛을 보고 기쁘게 해 주십시오.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 율법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은혜를 보고 희망을 품게 해 주십시오. 그 점입니다. 이 선생님께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믿음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감사 생활할까? 감사 생활은 율법을 쳐다보면 불평불만뿐이지요. 은혜를 쳐다보면 감격 감사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 네 덕, 내 탓으로 살까? 은혜를 받았을 때에 네 덕 내 탓으로 살지요. 율법을 받아들이면 네 탓 내덕으로 산다. 그렇게 관이 틀려져요. 희망이 생겼다는 말씀은 그런 여러 가지 오해가 풀리면서 매사가 은혜롭고 천하만사가 행복하고 기쁘고 그러더라고요. 마음을 돌리니까 뜻을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야훼 제발 내 아들 압살롬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제발 내 아들 압살롬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려면 압살롬을 지도하는 스승, 그 아히도벨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기도의 핵심 이지요. 무엇 때문에 기도를 중언부언 하는가? 마음만 돌아서면 되지 않아요?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끊김)
그렇게 기도 했어요.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율법의 눈에서 이제는 은혜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 주시지요? 그래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은혜가 보인다. 지금 말하자면 구원받은 다윗도 율법에 눈을 떴던 사람이 예수를 죽일라 했지요? 그러나 예수를 만나보고 은총에 눈을 뜨지요? 은혜에 눈을 떴어. 그렇게 해서 고백하신 말씀이 고린도 후서 12장이지요? 은혜의 눈을 떠서, 7절부터 봅시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 곳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들어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경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있게 하신 것이지요. 자기 덕행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은총을 의지했다. 그러면 행실로 보면 자기가 아무리 행실이 고와도 교만해 지는 것뿐이라고요. 행실이 옳으면 옳을수록 교만해져요. 자기 행실이 옳으면 옳을수록 예수가 밉고 죽이고 싶고 그래서 병을 하나 얻었다. 그 병은 절망 병이겠지요? 고통이겠지요? 정죄이겠지요? 덕행을 숭상하다 보니까 정죄의식에 빠져요. 아무리 해봐도 자기는 양심이 고통이 일어나고 괴롭겠지요? 선행은 하면 할수록 착하면 착할수록 정절을 지키면 지킬수록 교만해 지는 거예요. 그 정신이 기초가 잘못 놓여 졌지요? 그러니 교만해져요. 교만 겸손이 오지 않아요? 지키니까 몸이 깨끗할수록 교만해져. 그러니 얼마나 불행해 집니까? 잘 어떻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 봐도 안 되어요. 굉장한 덕행을 자기가 실천함으로 해서 교만해 지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지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 정신고통 영적고통, 정신의 파탄이지요. 영적파탄, 사탄은 교만한 것인데 사탄의 하수인 교만의 왕 이지요. 교만의 왕, 그럼 이제 사탄은 교만이라 합시다. 사탄의 죄는 교만 병 이지요? 사탄이 천사였기 때문에 교만한 천사가 사탄이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죄는 교만 죄인데 그래서 사탄이 된 것인데 교만은 하수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 곳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회개한 것인데요.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행은 하면 할수록 교만해 지기 때문에 선행으로는 한계가 있다. 도저히 나는 행복해 질수 없다고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빌었다. 3번 빌었다는 말은 24시간 빌었다는 뜻이지요? 아주 생명을 가지고 빌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그러니까 절대 자비로 절대 은혜로 절대 은총으로 너를 구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정죄의식, 정죄를 받고 양심이 괴롭고 통회가 나오고 앞이 캄캄해져서 그렇게 참 맨발벗고 통곡할 만큼 되었을 때 거기에 은혜가 임하는 거다, 그게 무너져야 그 자기 교만이 무너졌을 때 마음을 돌렸을 때에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그 말이지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을 이 은총이라는 것은 절대의 자비라는 것은 그 정신고통 절망 신음 그 아픔이 일어나야 오는 거다. 그 회개가 일어나야 오는 거다. 그래서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 자비가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쁨으로 나의 정신 고통 파멸 맨발 벗고 통곡할 만한 내 이 부족 내 이 도덕의 부족을 느끼고 통회하고 항복하는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고 죄 뿐이라고 나는 정죄에 짓 눌려가지고 처참할 만큼 파탄해. 그 맨발 벗고 통곡하고 나는 걸어간다고 그렇게 자기는 나아가겠다. 그 점을 내 선행은 산산이 조각이 나고 내 덕행은 완전히 무너지고 나는 처참한 죄인이 되어가지고 통곡하는 것을 택했다. 자랑하는 것이 내 덕행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내 부족한 점을 정죄의 정죄를 받았음을 자랑합니다. 내 부족한 것을 자랑합니다. 내 약점을 자랑합니다. 내 정죄를 자랑합니다. 내 인격이 무너지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은총을 의지해서 자비를 의지해서 내가 죄가 드러난 것을 기뻐하며 만족히 여기며 죄인인 나로서는 누가 나를 뺨을 때리던지 발로 차던지 감사하고 모욕을 감사하고 이 죽일 놈이 돈이 없어서 거지가 된 것을 감사하고 빈곤하고 또 어디를 가든지 나를 몰라보고 발로차고 주먹으로 때린 것을 감사하고 박해를 감사하고 또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공공이야. 돈도 없고 옷도 없고 명예도 없이 천대받는 것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망했을 때 내가 파멸 받았을 때 내가 회개했을 때에 나는 죄인이오. 하고 항복했을 때 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지 않아요? 그 뜻인 것 같아요. 무슨 놈의 하수인이 쫒아 다니면서 24시간 그렇게 성가시게 할 것 있겠습니까? 교만 병 이지요? 교만 병 나를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하수인을 주었다지 않아요? 그래서 감사한 거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쯤 되니까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셨지. 자기가 뭐 선행하시고 무얼 지켰으면 감사할 리가 없거든요. 날마다 감사하고 시시때때로 감사하고 모든 것이 감사 한 것은 욕을 해도 감사하고 매를 맞아도 감사하고 발로차도 감사하고 멸시해도 감사하고 밥을 안주고 굶겨도 감사하고 그 경지는 통회의 발걸음 이라고 맨발벗고 통회하며 가는 발걸음이어야 감사하지 자기만 회개하고 다윗같이 되어야겠다. 그 말씀이지요.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서 불평이 없어요. 자기만 통회해.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내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쫒아오는 것도 내 죄요. 내 탓이요. 결코 압살롬의 탓이 아닙니다. 압살롬을 살려주십시오. 압살롬이 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압살롬을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망명하는 것이야. 그리고 도망가는 것이야.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해. 내 아들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가 죽을 죄인인데, 왜 나는 안 죽고 네가 죽었냐? 내가 죽일 놈인데 내가 죽일 놈인데 제가 죽었구나. 압살롬아 하고 울었다고. 그쯤 되니까 항상 그렇지 않고야 불만뿐이지요. 나는 왜 팔자가 이 모양이어서 못된 자식을 낳았던고? 나는 왜 이렇게 불효자식을 낳았던고? 그러고 불평불만 했지요? 이 압살롬에 대해서는 호리도 불평이 없었던 마음은 자기 죄를 탄식했다. 압살롬보다 자기 죄를 뉘우치고 통곡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지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래 인제 우리가 본받을 사람은 압살롬이 아니고 다윗의 태도다. 그 점이에요.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면서 맨발로 가는 다윗을 본받는 다고 한다면 이 선생님이 다윗과 같은 심정이었겠다. 그게 이해가 가더라는 거예요. 이 선생님이 맨발벗고 가던 길은 마치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얼굴 가리고 맨발 벗고 통곡하고 가던 서리내 길인데 그걸 몰라보신 오 장로님이 고행인줄 알고 맨발을 척 벗고 따라가니 ‘왜 밤에 신을 벗고 따라온 거요?’ 하고 질문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그 뜻을 우리가 깨달았으니까 희망이 있다. 이제는 우리에게는 눈물이 아니고 기쁘고 감사. 이제는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있고 기쁘다고 그 맨발벗고 가시던 그 길의 뜻을 우리에게 마음을 돌려줬거든. 고행인줄 알고 따라가던 마음을 자비인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발걸음인줄 알고 뜻을 돌려준 것을 축복이라고 깨달아 진다. 그 축복 절대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렇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희망이 생기고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을 열어주시고 뺨을 맞아도 감사하고 정죄를 받아도 감사하고 네 이놈 도둑놈아 그래도 감사하고 아무 불평할 이치가 없더라고요. 마음을 돌리니까, 마음을 율법에서 은혜로 마음을 돌리니까 감사할 것 밖에 없더라고요. 우리 앞에는 탄탄대로고 감사 할 것밖에 없다. 회개하고 가는 길은 감사할 길뿐이다. 가슴을 치며 맨발벗고 얼굴을 가리고 서리내로 가는 길은 행복의 길이었다. 불평하는 길이 아니란 말이야. 그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을 우리가 다시 면목을 바꾸어서 눈을 떠서 바라보니 우리들도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또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창조 신천신지 새 하늘과 새 땅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늘나라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감사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실패하고 죄를 질수록 울 것이 아니라 더 감사하고 더 감사하고 소화 테레사 마냥 자기가 죄를 지면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을 보십시오. 제가 죄를 짓지 않았어요? 그리고 예수님 앞에 달라 들면서 감사하고 가시던 그 사람의 발자국 복음의 발자국 감격의 발자국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 인제 아까 ‘주님마음’ 부른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죄인이니까 이런 우리는 정죄의식에서 공포심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부른 노래니까 예수님의 그 뜨거운 자비에 감격해서 부른 노래기 때문에 얼마나 좋아요? 자 부르십시다. ‘산에 여우 굴이 있고’
주님 마음
1. 산의 여우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 있건만 우리주님 세상 와서 집 한 칸을 못가지고
아픈 다리 끌으시며 이리저리 다니시네.
2. 고대광실 화려한 궁 우리 주님 원치 않고 죄인들의 마음속에 성전 꾸며 살기 위해
문 밖에서 두드리며 애처롭게 부르시네.
3. 엄동설한 추운 밤에 내 맘 문간 찾아와서 밤새도록 두드리니 그 머리에 서리 앉아
검은 머리 희게 되고 손에서는 피 흐르네.
4. 불원천리 너를 찾아 몇 번이나 왔건만은 사랑하는 나의 벗아 모진 잠이 그리 들어
내 소리를 못 듣고서 잠꼬대만 하고 있나.
5. 사랑하는 나의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비목석 인비목석 주님 마음 몰라주고
무정하게 굴었으니 죽을죄를 지었어요.
6. 저의 마음 추하오니 주님 피로 닦으시고 성신 불로 소청하사 성전 꾸며 살으시고
불초한 종 수종들어 주님 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