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숨 默想

[스크랩] [안병무] 예수의 얼굴

mamuli0 2009. 1. 8. 05:44

[예수의 얼굴]_ 안병무 박사

[ 예수의 얼굴 ]
* 안병무 교수께서 생전에 강남향린교회 창립예배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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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에 뭐 할라고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

그게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세상이 무슨 소리 무슨 소리 해도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 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 남을 괴롭히려는 얼굴, 벼라별 얼굴이 다 있는데, 그 중에 참 평화로운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하고 한탄한 시가 있습니다. “세상에 왜 왔나? 얼굴 하나 보려고 왔지.” 그 말이 제겐 언제든지 마음에 새겨집니다.

예수가 세상에 온 다음에, 사람들이 각기 예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까? 율법주의에 젖은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율법의 상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란 것이 오래 판을 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니 지금 시대가 달라졌는데 율법적인 시각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선 안된다. 헬레니즘, 특히 그레꼬-로마 문화에 적응하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자’, 했습니다. 그래서 발전된 것은 예수의 본 얼굴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서가 모두 희랍어로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쪽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본 얼굴인 갈릴리의 시골 농민, 목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미국 사람 얼굴 같은 희한한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맨 처음의 얼굴은 수염이 없었어요. 수염이 없으니까 좀 권위가 안 선다는 말이에요. 나도 미국에 갔을 때, 어떻게 해서 중앙신학교에 가르치러 갔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교수’라고 그랬거든. 그런데 나이는 25살밖에 안 먹었는데, ‘교수’란 당치도 않았단 말이에요. 할 수 없이 수염을 길렀어요. 그랬더니 겨우 30쯤 보더라구요. 예수의 얼굴에 수염이 길기 시작했어요. 맨 처음에 그린 얼굴에는 수염이 없어요. 그 다음에 수염이 점점 길어졌어요. 왜? 법왕하고 대립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권위는 더 있어야겠기에 예수의 수염이 점점 커졌어요. 대립관계 때문에. 여러분이 보는 사진은 예수의 얼굴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성서엔 기록이 없어요. 키가 큰지 작은지, 미남인지 추남인지, 멋있는지, 유모어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절대로 예수의 생긴 건 언급을 안했습니다. 그건 묘한 일이죠. 어떨 땐, 예수의 얼굴이 그리워서 예수의 모습이 어떤가 단서를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율법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예수를 율법이라는 큰 상에서 그리려고 했는데 이런 일은 바울 전에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레꼬-로마, 즉 헬레니즘 영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 얼굴 가지고는 안된다, 촌스럽다, 농사꾼 가지고는 안된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전시킨 것이 그레꼬-로마의 얼굴하고 비슷한, 또 거기의 사상하고 상당히 비슷한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게 지금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여러분이 죽어라 하고 고수하고 있는 것, 그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맞게 그린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그들에게 맞게 그렸어요. 수염도 많이 났고, 털도 만들었고…….

특히 그레꼬-로마의 신인사상이란 게 있어요. 신이며 더불어 사람이란 사상이 있는데, 그걸 예수에게 꽉 맞췄어요. 세상에 해괴한 존재 중의 하나가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란 거예요. 그런 괴물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면 사람이고, 신이면 신이지. 신이 완전한 인간이란 것은 희랍 문화에 의해서 된 겁니다.

그리고 점점 기독교가 발전하여 중세기를 지배했습니다. 여기에 나쁜 동기가 하나 들어갔습니다. 로마제국과의 세력을 경쟁하려니까 비슷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얼굴도 비슷하고 교리도 비슷하게 만들어서 경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린 그 유산을 많이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서방 종교, 서방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서방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권력과 야합한 서방 기독교입니다. 그 전통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거기에 대립해서, 동방 기독교라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 얼굴이 진짜 얼굴이 아니다, 예수는 겉 모양으로, 이론적으로만 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예수는 신비한 존재이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신비한 관계이다. 말로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방향으로 예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중심이 된 것이 동방교회입니다. 그것이 러시아로, 희랍으로 퍼졌습니다. 둘 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느냐 하면, 서방 교회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 중 하나인 서방 교회만 택했고, 동방 교회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릅니다. 같은 분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우린 하나밖에 모릅니다. 이게 절대보수라는 겁니다, 절대보수. 이걸 지키면 죽는 줄 알고 있어요. XXX 같은 소리예요. 그러면 동방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보가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다. 예수처럼 살고 싶은데, 예수의 모양대로, 그가 걸은 대로, 그가 입은 대로, 그가 굶은 대로, 살고 싶다. 그가 장가 안 갔으니 나도 장가 안 가고, 그가 소유를 안 했으니 나도 소유 안 하고, 되도록 그 길을 따라가겠다. 예수를 닮는다. 따른다가 아니고 닮는다.’ 그런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게 뭔지 압니까? 그것이 수도원의 시작입니다. ‘큰 세계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우리끼리라도 좁혀서, 요 영역 안에서 조건을 맞춰서 예수처럼 살도록 하자’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는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 성 프란치스코는, 연애 감정도 있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이었습니다. 특히 클라라라는 여자를 아주 사랑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했어요. 연애 감정도 없으면, 그것도 사람인가요, 뭐. 성 프란치스코도 클라라를 죽도록 사랑했는데,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 안되겠기에 수도원을 이루어서 수도원장이 되었고, 클라라도 그것을 못견뎌서 여자 수도원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너무 그립지만 만나면 안되겠고 해서, 눈이 오면 클라라 모습을 만들어서 그걸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엉엉 울었대. 그건 진짜인지도 모르지. 난 이해가 돼. 왜냐 하면, 나는 본능이, 정열이 굉장히 강하니까……. (웃음)

어쨌든 예수처럼 살자는 그 운동을 난 높이 평가합니다. 무소유, 곧 가정 안 가지고, 아무 보상도 없이, 노동과 기도와 성서 읽는 것과 남을 돕는 것으로 전체를 다 바치는 것, 그 수도원의 전통이란 걸 기독교에서 절대로 버려선 안됩니다. 그걸 두루두루 유지해 왔는데 마르틴 루터라는 엉뚱한 녀석이 수녀를 훌딱 가로채 왔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다른 수도사들이 너도나도 하면서 모두 장가를 갔어요. 그들이 예수를 앞세웠지만 그들 속에 뭐가 있었다는 게 증명이 되죠. 그러고서 예수의 얼굴이 어떻게 되든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이런 많은 과정에서 할 일을 찾으면 많지만, 좋게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뭐 하러 왔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보자 그거죠. 왜 교회가 여기에 하나 섰나? 많은 교회들이 모두 그리고 있는 예수의 얼굴이 틀렸다. 우리가 바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거죠. 나도 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는 것이죠.

지금 90% 이상의 한국 교회가 예수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느 밑에 있는지 알아요? 놀랍게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거슬러 올라가서 두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율법주의도 그대로 지키고 있고, 그 밑에서 예수를 봅니다. 또 하나는 그레꼬-로마의 밑에서 얻은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강제하고 고집합니다. 그것을 떠나면 이단자로 몹니다. 그외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Christianity without Jesus’, 예수 없는 기독교,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배제했습니다. 왜? 예수는 우리에게 거리끼니까, 그대로 수용했다가는 팬티까지도 다 빼앗길 것 같으니까.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하는 것은 더 나가면 팬티까지도 벗어주라는 말이 되니까, 난 그건 죽어도 못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라, 그건 난 못한다. 그러니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는 좀 배제하자. 그래서 예수는 아니야. ‘Christianity’ 라는 데로 흡수해 버리자.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설립된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도로 살려보자는 겁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지도 않았어요. 의미가 없어요. 안 그린 겁니다. 교리를 얘기하고 율법을 얘기합니다. 아직도 토라가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려보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얼굴은 신비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고행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개인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이유야 어쨌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입니다. 자기 위해 죽은 것은 아닙니다. 뭔지 미지수는 많지만 그는 남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은 이입니다…….

(여기서 한참 말씀을 멈추고 울먹이심)

왜 우리는 세상에 왔나? 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나? 하도 예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그리고 있으니까, 나는 비록 못났어도, 내가 예수의 뒤를 따르지 못해도, 내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과 내 모습이 너무도 달라도, 내가 그린 예수의 얼굴이 나를 마구 짓밟아도, 내가 모욕당하고 심판을 받아도 예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자. 그 용기를 갖자. 나와 일치시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예수의 얼굴을 이렇게 그려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아니야 내가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그의 모습은 정직하게 그리자. 세상에 그대로 드러내 놓자. 세상에 예수는 있다. 지금도 살아 있다. 2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다. 오늘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 우리의 거리에 살아 있다…….

(다시 한번 울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계속 말씀하심)

그러나 교회에는 없다. 교회에는 없다. 순교하는 놈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교회 밖에는 있다. 자꾸 죽어가지만 교회에는 없어, 이젠 안해. 어떤 감독이 “나는 필요하다면 예수를 위해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니까, 키에르케고르가 글로써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100% 믿는다. 필요하다면 순교를 당할거다. 그러나 너는 절대 필요한 조건을 만들지 않을거다.” 흥, 그렇지. 안 만들지 뭐. 모두들 얘기하기를 ‘아 세상에 죄가 너무 많고……’, 그런 소리 하지요.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하면서 슬슬 피하는 거죠. 무슨 죄요? 하고 물어보면, ‘내 죄로소이다’, ‘내 탓이요’, 하지요. 그렇게 크게 써 붙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붙일 사람이 따로 있지. 우선 추기경의 문에다 붙이고, 윗 놈들한테 붙여야지. 왜 밑에 사람한테 붙여! ‘우린 당한 놈이요’ 그렇게 붙여야지……. (웃음)

오늘 너무 한계를 지어놔서 운신의 폭이 좁을 줄은 모르나,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리십시오. 여러분이 망해도 예수는 살아야 하니까. 세례 요한의 말대로, ‘당신은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입니다. 그 말을 지키십시오…….

(다시 말씀을 잇지 못하고 우심)

지켜야지.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혼잣말을 하듯 말씀을 마무리하고 울면서 강단을 내려오심)

출처 : 김박의 독서일기와 잡문모음
글쓴이 : 김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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