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에서 올라오는 길에 천안 애견쎈터에 들려 벤토를 처음 보고 다음 날 벤토의 돌이라고 핑크위드와 소주정원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평택에 오니 많이 변했다. 옛추억과 생소함이 교차한다. 맥컴 고장으로 수리점에 다녀왔다.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
유 선생은 52세에 일식을 시작하였다. 유영모는 <요한복음> 7장 52절의 “무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 홀로 산으로 가시다”라는 말에 이끌리어 서울을 떠나 북한산으로 들어간 것이 52세다. 67세로 죽음을 각오한 선생은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자각하고 <생선>이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 마리면 몇 토막에 한 토막은 몇 점인가 하루하루 점여내니 어늬덧 끝점 하루하루는 죽는 날인데 萬날 壽만 녁이네 맛없이도 머리토막 점여 내어 없이 했고 세간 한답시고 간대토막 녹였으니 님께는 무얼 바치나 꼬리잡고 뉘웋네. 국거리는 못되어도 찌개라도 하시려니 찌개감도 채못되면 고명에는 씨울거니 성키만 하올 것이면 님께 드려 보고저 오십구빌 도라드니 큰 토막은 다 썻고나 인간의 도마 우에선 쓸데없는 찌꺽이나 님께서 별너주시면 배부르게 오천인
그 후 유영모 선생은 YMCA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전했다. 선생에게서는 언제나 기쁨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것은 진리에서 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기쁨이었다. 유영모 선생은 세상에 태어난 지 1만 800일을 지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간증했다. “내게 실천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 내가 난지 18925일 되는 오늘, 내가 중생한 오늘, 증거 할 말씀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 신다’이다. 주와 나, 주는 누구시뇨 말씀이시다. 나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주는 한울에 계셨다 하나 말씀은 여기 계시다. 나는 죽겠으나 믿음은 살겠다.” 유영모가 찾은 것은 말씀이요 말씀에서 솟아나는 믿힘이다. 근본적인 영의 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힘을 얻은 것이다. 동양에서 말씀은 道요 힘은 德이다. 유영모는 말씀과 믿음을 도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다.
유영모 선생은 <말씀대로 믿음>이란 노래를 지었다.
1. 아버지께 가는데 예수 길 되시니 참말 삶에 나감은 믿음으로 얻네. 진리의 성신이 떠붓듯 오실제 죄와 의와 심판이 바로 뵈저 나네. 그 모든 걸림 헤치며 아바 찾아 열제 세상 이긴 인자로 앞을 서 주시네.
2. 일다 이룬 말씀이 집에 돌아갈 제 보혜사를 보내마 떠먹듯이 했네.
4. 저는 삶이 그립습니다.몸을 잊자 낯을 벗자 마음을 비우자 그리고 보내신 이의 뜻을 품자 주를 따라 아버지의 마음을 이루자 말씀을 이루므로 살자. 아멘.
유영모 선생은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지듯이 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90이 가깝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선생도 어느덧 빈탕한데가 되었다. “이 빈탕한데 우리 아바 마음 아바 아버지 뜻 맨 처음 이름 있 우리 아바 한 알 한 우님 앎 거룩한 한 알 뜻뜻 야훼여 아멘.” 빈탕한데는 노자의 치허극(致虛極) 수정독(守靜篤)의 인생관이다. 몸은 돌같이 단단하고 마음은 하늘처럼 텅 빈 세계다. 이것이 일좌식(一座食)이다. 유영모는 강의 할 때 온돌방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10시간씩도 정좌하고 있고는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편이었다. 하늘땅을 잇는 고디(直), 선생은 나무처럼 하늘을 이고 있었다. 유영모는 ‘이마’를 임을 이고 있다고 해서 이마라 하였다.
이 나가 이마 이 이마 웋에 내임 이마 이마웋 손수 나린 예수 예수 온갖수수 이손 있손 손 맞어 드릴 올 디림 눈을 맞혀 떨칠가 고히 고히 올라갈 웋고히 고히 우러 엘나 조히 조히 주금 네메 조히 조히 사리브름 비 바람불고 바람에 말씀따름 그 밧게 손둘 너 나가 떨치면 주금에 느러질 손손 하나 맞어 디리면 사리 불 너 부를손 그믄지 그믐 보름의 조금사리 므르믈.
유영모 선생은 사람을, 땅을 디디고 하늘을 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수출고고영현외 요긴심심이황중이라 했다. 머리는 하늘 위에 두고 마음은 진리의 가운데를 붙잡는 것, 그것이 정좌다. 빈탕한데다. 유영모 선생은 언제나 정좌를 하였다. 그것이 가장 편한 탓이다. 또 저녁 8시에 자서 밤 12시에 깻다. 4시간이면 수면은 충분 했다. 그만큼 깊은 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잠 속에서 하나님 말씀도 듣고 인생의 근본 문제도 풀었다. 잠속에서 지은 시를 읊기도 했다. 잠이야말로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때였다. 선생에게 잠은 진짜 기도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잠을 일언이라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때다. 선생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정좌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 대로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YMCA에 들고 나가 그것을 몇 시간이고 풀이 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20리 길을 걸어와서 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또 20 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YMCA 간사 가운데는 선생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동완 간사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강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동완이 간 뒤 유영모 선생은 YMCA에서 쫒겨 났다. 그리고는 이집 저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람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동양사상과 신학>p27-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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