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월말 제주에서 본것 중 나머지를 올려본다. 지금은 장마 중이라 오늘도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와 오능 아침 비오기전에 익어 떨어진 살구를 줍고 길에 풀을 베었다. 빗물 통을 씻어 맑은 물을 받았다. 어제 대전에서 한살림 월동채소 생산자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생존은 언제나 어디서나 긴장과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영적인 것이 생명이다
1985. 09. 13. 김준호 선생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사는 베다니의 동네에 나사로라는 병자가 있었다. 앓고 있는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내던 여자였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전달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그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사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신 던 곳에서 더 머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제자들에게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17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5리 밖에 안 되는 곳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있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 것이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드님 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여기 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 결론을 보면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이 여기 오신 것이 아니라 옆에 둘러선 사람들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을 목격하신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오늘밤 아프신 어머니들을 위해서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뜻도 있겠지만 아직은 몸이 건강하시고 성경말씀을 듣고 생각하실 여러분들 둘러선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우리 귀에 들려주시는 것으로 그렇게 믿습니다. 어느 분의 예화를 들음으로 우리가 아프신 어머니나 또 건강하신 식구들을 위해서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찍 농촌에 태어난 청년이 서울에 가서 참 많은 고생 끝에 집 한 칸을 장만하고 또 상업을 하고 또 예수님을 믿고 또 교회에서도 직분도 갖고 참 성공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장로요, 집사요, 또 돈도 많이 벌어서 어떻게 돈을 많이 벌었는지 단칸집에서 이제는 양옥집으로 또 더 좋은 집으로 또 그걸 팔아가지고 3층 5층 7층 8층 10층, 하늘높이 집을 지었답니다.
그분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데 이제 새집을 지어가지고 뜨거운 물을 끓여 올려가지고 자기가 제일 먼저 목욕을 하려고 참 신식을 꾸며가지고 겨울에 찬물이 아니고 뜨거운 물 끓여가지고 이렇게 목욕통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씻으려고 꼭지를 탁 틀었는데 아직 그 기계가 바로 되지 않았던지 푹 빠져가지고 뜨거운 물이 확 빠졌는데 몸이 익어버렸어요. 그 삽시간에 전신이 데었는데 병원에 입원하니까 병원에서는 사람이 3분의 2이상이 데어버리면 죽는다. 살길이 없다. 3분의 2 이상이 데어버렸지요. 전신이 뜨거운 물에 익어가지고 그러니까 의학적으로는 살 가망이 없고 죽기까지 입원해 있으라고 석 달간 입원 되었다고 그러는데 현대 의학이라는 것은 약이니까 약을 바르려면 다른 균이 몸에 못 들어가게 그 소독을 해야 하거든. 알콜로 하던지 다른 소독제로 하던지 껍질이 발랑 다 벗겨져버린 살에다가 하루에 한 번씩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는데 그렇게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몰라요. 이 살이 깊이 데어버리면 아픈 줄 모르는데 껍질에 데었으니까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손가락만 데어도 아픈데 전신을 데어놨으니 살을 약 한 시간 두 시간 의사가 전 몸을 긁어낸답니다. 고름이 끼지 못하도록 칼로 긁어내야 한답니다. 그대로 두면 울퉁불퉁 하게 얽어가지고 사람이 뭉겨지니까 나은 다음에 피부가 깨끗해지라고 전부 칼로 긁어낸답니다. 뾰족뾰족한 데를 그렇게 무서운 수술인데 껍질은 벗겨져 버렸으니까 그러니 몽원을 하면 안 되어요. 다른 병같이 마취를 해도 안 되고 그대로 조직을 살리려니까 칼로 도려내는데 예수님은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까? 열두시에 임종 하시지요. 자기는 예수님보다 천배 백배나 더 아픔을 당했답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이 아팠다면 육신으로 아프기보다 마음이 뼈와 살이 아팠을 거예요.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한 달 동안을 그렇게 긁어내고 살이 조금 아물어 들어가는데 석 달 있는 동안에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죽기를 열 번 더한 것 같이 고난을 당할 때 인제 깨달아 진 것이 있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집사 되고 장로 되고 돈 벌고 빌딩 짓고 자녀 낳고 하나님이 축복한줄 알았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잘 믿으니까 내게 이렇게 오래살고 건강하고 돈 벌고 자식 낳고 빌딩 짓고 부자 되고 그것이 축복인줄 알고 살았는데 아 나는 죽는다. 생각을 하고 석 달을 이 껍질을 벗기듯이 고통 가운데 깨달아지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니었다.
이 3층 7층 10층 이 집이 나와 무슨 상관있는가? 죽어가는 나한테 티끌만한 도움이 안 된단 말이야. 자기, 영혼한테 아무 도움이 안 돼. 또 사랑하는 처자식이 매일 한 번씩 찾아오지만 아내나 자식들이 내가 아파죽어 가는데 내게 무슨 도움이 되나? 아무 도움이 안 돼요. 티끌만한 내게는 도움이 없다. 그건 은행에 그렇게 많은 돈 수억을 저금 해놨는데 그 저금통장이 내가 죽어 가는데 나와 무슨 도움이 있는가? 나와는 아무 관계없다. 이런 모든 것이 깨달아 지더라는 거야. 하루만 아프고 나으면 못 깨달아질 건데 석 달 동안을 칼로 이렇게 전신을 긁어내니까 그 아프고, 아프고 아픈 결과는 영혼이 깨끗해져. 참 영혼이 깨끗해져요. 그러니까 땅위에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영혼이 거룩해지라고 몸을 주신 것입니다. 평안하면 영혼이 닦아지지가 않아요. 영혼이 더러운 병이 생기고 세상 욕심이 달라붙지, 이 육체가 아프고 고단하면 모든 만사가 몸에서 떨어져나가 마음에서 떨어져나가 내게는 아무 불편한 것이 없고 내게는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야. 그 참 내가 교회에서 배우고 깨닫고 믿었던 것은 다 미신이었다. 예수님 말씀이 아니다. 성경말씀도 아니다. 그래 나는 다시 예수를 믿어야겠다.
그래 살려주시라고 주님 저를 다시 살려주시면 이제는 제가 주님을 참 사랑하고 믿겠습니다. 깨달았을 때 자기가 기적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못 나아요. 피부로 숨을 쉬는 건데 조직이 다 뭉그러져가지고 의학적으로 못 사는데 자기가 기적으로 살아나서 살고 보니 이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제 성경 말씀이 귀에 들려요. 모두 주님 말씀이 옳은 말씀이야. 그래서 참 축복이라는 것은 영혼이 깨끗해지고 영혼이 성화 받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아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도 지금 나사로를 살려주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고 오래살고 부자 되고 돈 벌고 그것을 좋아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나사로를 찾아오신 뜻은 나사로 때문에 모든 찾아온 식구들이요.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고 나사로의 집에 자기가 오셨다고 그랬어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는 차라리 내 살을 너희가 먹고 내 피를 마시라.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요. 혹 내게 살이 있다면 다 먹어버리고 내 피가 있다면 너희가 다 마셔라. 이것이 내 소원이다. 영혼 때문에 그러신 것입니다. 영혼,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뜻이지요. 그렇게 말씀 하시다가 6장 63절에는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아까 그 현대 교회 어떤 집사 장로님이 그랬지 않아요? 그분이 깨달은 거와 같아요. 결국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아들을 낳고 딸 낳고 집 짓고 저축하고 뭐 또 학교 보내고 성공하고 취직하고 월급 받고 그러면 그 산더미같이 모아놓은 재산이 내 영혼이 죽어 가는데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에요. 각자가 다 그래요. 건강해서는 그걸 모르지만 어머니 같이 탁 몸이 쓰러져서 누워계시고 생각해보면 아 내가 헛일했다. 썩을 일이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예수님께서 63절에 그랬어요.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그러면 어머니가 일생 그 참 남편 없이 그 어린 자녀들을 과부로서 키우시면서 예수님 한분을 찾아보자고 그저 이 지혜를 다 짜서 찾지 않았어요? 찾은 것은 영혼 영혼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소원을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지신 것이에요. 그 육신 성공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니고 그 많은 성공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깨달아 가지고 결국은 내 영혼하나 구원받아 가지고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어머니를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그걸 은혜라고 그럽니다. 은혜를 받으신 어머니다. 그런 결론이 됩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영혼으로 아팠던지 자식이 죽고 깨달았던지 남편이 죽고 깨달았던지 깨닫고 영혼이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얻는 것이 재산이지 그 밖에는 다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그러면 예수님이 서른 살이 먹어서 말씀하시고 서른세 살 육 개월 동안 계실 때 3년 6개월 이지요.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한 말 한번이고 열 번이고 백번이고 한 말은 영적인 것이 생명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 생명이다.
그래 이 말은 근대에 잘 생각하도록 깨달은 분 톨스토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말년에 이 말씀을 깨달았어요. 그분이 세계적인 문학가이고 대학자이지만 결국은 다 쓸데없는 일이고 내 생명이 구원받는 것이 참 귀한 재산이다. 참 보배다. 한번 따라 읽으십시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 말씀. 그러면 예수님이 일평생 하신 말씀이 영적인 것이 생명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또 있지요?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보겠어요. 산상수훈이지요. 산에 가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이 땅위에서 제일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는 복을 찾으려고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찾았지요. 가장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예수님이 3년 6개월간 하신 말씀을 요절을 딱 정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여러 번 말씀 했거니와 간단하게 말하면 누가 행복한 사람이며 누가 불행한 사람이냐?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 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그래 이제 열 번이고 백번이고 천 번이고 하신 말씀의 결과로는 그 말씀이야. 아까 그 어느 장로님이 깨달았다는 깨달음이 이 어머니의 깨달을 깨달음이나 다 해봤지만 내 영혼 구원받지 못하면 다 쓸데없는 일이다. 그 영혼은 가난해야 행복하다. 나와 상관없다. 아무 관계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만이 전부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은 건강할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머니가 이 어머니만큼 되어야 이것이 되어요. 쌀밥이 있으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떡이 있으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꿀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또 여기 딸들도 여기 많이 오신 것 같은데 딸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거에요.
보면 안쓰럽고 불쌍한 것뿐이고 영혼이 하늘나라 가는데 짐 덩어리야. 오히려 영혼에 아무 도움이 안 되어요. 기도를 해드려야지요. 기도를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고 성령을 의지하고 하늘나라 가십시다하고 기도를 해드려야지요 영혼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은 많은 땅위의 것이 마음에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 마음의 것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에요. 하나님만 가슴에 떠오르는 것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이 홀홀 단 신 먹을 것이 없으니 빈손이었다면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리워지고 천국이 가고 싶어져요. 세상 것이 없어져 버린다고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아 내가 속았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헛일을 했구나. 천하만사가 내가 다 참 괜한 짓을 했구나. 하고 차라리 눈물이 나와 버려야 해. 아, 나는 천국에 있다. 그러고 만족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 일평생 헛수고 했다.
아까 어느 장로님 마냥으로 이 10층 12층 빌딩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슴을 치고 울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이 행복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 쫓기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예수님 한번 사랑하시자고 욕도 먹었지요. 그거 행복한 영혼이에요. 행복해요.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사람 비유를 못 맞춰. 그래가지고 모든 사람이 미워해요. 욕을 먹고 또 누명을 쓰는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이 말씀이 예수님이 3년 6개월 하신 말씀의 전부이지요. 그러니까 아까 6장 63절은 그 말씀을 받아서 내가 일평생 한 말은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영혼에 관한 것이다. 그 말씀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어머니같이 세상이 끝날 때에 이 성경말씀이 내 것이 되는 것이지요. 몸 건강하시고 평안하실 때 참고는 되지요. 참고는, 그러니까 아까 인제 요한복음 6장 63절 같이 보겠습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이 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을 말한 것이다. 이번에 제가 김 준 선생님 댁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왔는데 이왕 갔으니까 그 사모님이 죽다가 살아났다고 해서 이야기 좀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 저녁에 식구가 다 모였어 딸까지 그래 남편이 옆에 있고 딸이 옆에 있지만 식구한테 황송하다고 그래요. 말하기가 왜 이제 딱 죽게 되어서 병원에서 곧 죽을 성 싶을 때 눈도 안보이고 귀만 소리가 들리는데 다 알아 남편이 오는지 딸이 오는지 다 왔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한테 나를 살려주지도 못할 사람들이고 자기 영혼이 갈급한데 너무 영혼에 위로가 안 된단 말이야.
모두 와서 옆에 와있는데 그런데 찬송을 불러주니까 인사불성이니까 말도 못하고 목이 꽉 잠겨가지고 목을 수술했으니까 꽉 붙들어놨는데 조금만 건드리면 죽으니까 신경을 다치지 못하게 쇠로 못을 박아가지고 살에다가 꽉 묶어놨다고요. 그러니 본인은 송장이고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여기 딸 왔습니다. 여기 며느리 왔습니다. 여기 손자 왔습니다. 해도 아무 마음에 짐만 되지.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식구들 있는데 미안하다고 그래요. 그 말하면서 그런데 찬송 소리가 들리는데 그냥 마음이 시원하게 날 것 같더라고 그래요. 죽은 송장 같은데 옆에 사람이 볼 때는 그래서 역시 하나님 말씀을 읽어주니까 속에서 아주 기쁨이 솟아오르더라고 그 옆에 자식도 들었어요. 좀 야속하지 사람들이 들을 때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그렇더라는 거예요. 기도해주고 성경말씀 해주고 성경 읽고 이렇게 귀에 들릴 때 찬송 불러주는 것이 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데 도움이 되지 다 쓸데없더라고 먹기를 합니까? 무엇을 합니까? 죽어가는 생명인데 그래가지고 뭐 한달 며칠을 꼼짝없이 이렇게 해가지고 척추 뼈를 갈아내고 여기, 자기 다리뼈를 잘라다가 이어서 했다고 목이 꽉 잠겨서 말도 못하고 지금 말씀하시거든요.
그것도 기적이지요. 여기도 오실 때 목이 많이 잠겼는데 지금 많이 풀렸습디다. 그런 것 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몸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는 생명이 있는데 이 성경 말씀은 몸과 관계없이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그거에요. 영혼의 관한 말씀이지 세상에서 복 받고 뭐 잘되고 뭐 건강하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 성경말씀은 참말로 깨닫고 보면 그러니까 인제 깨닫기 까지는 헤매는 것 아니에요. 가사 물도 깊은 샘은 땅속에서 생수가 나오지만 비가 오면 겉물이 나듯이 건수가 있듯이 건수를 먹고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생수를 먹게 될 때는 고난이 뒤따라요. 죽던지 죽기만큼이나 고통이 심할 때 그때 영혼이 갈급하고 그 영혼이 먹을 양식이 따로 있어요. 세상 밥이 아니거든요. 영원한 양식은 틀려요. 성경 말씀이에요. 찬송 소리이고 그래서 이렇게 어머니가 주무시는 것 같아도 좋아요. 말을 못 알아들어도 따님들 오셨으니까 자꾸 찬송 불러 드리세요. 어떻게 고통을 어떻게 하겠어요? 고통이야 당하신 분이거든. 기도해 드리는 것 밖에 없지요. 조금치도 대신 아플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찬송 한 장 부르십시다.
어제 밤에 7시 전에 어머니 어제 오후 어땠나요? 지금은 주무시지 않아요?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 한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시와 오후 세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없이 서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루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 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밖에 받지 못했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대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요?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것만큼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지가 비유에 거슬린 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이 말씀에 관해서 여기 한 데나리온 이라고 하루 품삯을 정한 돈을 우리 한국 돈으로 이만 원으로 가정합니다. 이만 원 하루 품삯을 돈 하루 품삯을 이만 원씩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해 가지고 오후 7시 종일 일한 사람은 하루 품삯 2만원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하루 품으로 이만 원 주지요. 미장이는 2만 원 더 주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아홉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가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자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였다. 마지막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보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품삯을 주라고 그러지요.
그러면 마지막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오후에 다섯 시에 온 사람이 이만 원을 다 받고 가요. 다섯 시에 와서 일 했는데 이만 원 다 줬습니다. 그들은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을 이만 원 줬는데 뙤약볕 밑에 일한 우리들은 더 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지요. 뙤약볕 우리는 온종일 한 시간 밖에 일한 사람을 이만 원 다 주셨으니까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니까 더 달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나 주인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요?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하루에 이만 원으로 정하지 않았소? 그리고 이제 주인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슨 뜻을 찾느냐 하면 오후에 한 시간 일했는데 이만 원 다 받았어요. 다섯 시에 출근했는데 한 시간 일했으면 여섯시에 일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아홉시에 출근한 사람은 얼마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에 하루에 일곱 시부터 출근해서 오후 여섯시까지 일한 사람은 이만 원 받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일한 것만큼 주겠소. 그랬어요. 아홉시쯤 다시 나가서 장터에 일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얼마주면 좋겠습니까? 일곱 시에 출근했어야 하는데 아홉시에 출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기억합시다. 만 칠천 원을 받았어요. 삼천 원 덜 받았어요. 아니 만 칠천 원을 주기로 한 것이에요. 받자면, 그러면 아홉시에 간 사람은 만 칠천 원 받고 또 일곱 시에 출근한 사람은 이만 원 받고 그런데 주인이 또 나가 보니까 열두시와 오후 세시쯤에 또 일꾼을 얻어가지고 왔지요. 열두시에 일한 사람은 얼마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대답해보세요. 일한 것만큼 받는다면 열두시니까 만원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점심 먹고 일했으면 점심때 일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오후 세시에 일한 사람은 얼마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오후 세시쯤에 그러면 칠천 원을 받았어요. 칠천 원 오후 다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했으니까 삼천 원 받으면 되요. 삼천 원 이제는 다 계산해보면 액수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후 7시부터 일한 사람의 생각에 마지막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사람은 삼천 원 받아가지고 갈 줄 알았는데 이만 원 받아가지고 가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이만 원 다 받아가지고 가요. 자기들하고 약속한 금액을 하루 한 시간 한 사람이 다 받아가지고 가기 때문에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 말이에요. 우리는 일곱 시부터 일했는데 이만 원 주고 저 사람은 한 시간 일했는데 (끊김)
당신에게 주기로 한 삯을 마음속으로 주기로 한 것이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생각은 이만 원 주기로 생각하신거야. 약속은 안했지만 그래 일한 것만큼 준다면 삼천 원 주고 보내야겠지만 생각해 보니까 나 이사람 이만 원 다 줘야 되겠다. 그러니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 이 말을 결론을 내립시다. 자기가 일 한 것만큼 받은 것은 소위 이 세상에서 말하는 의인의 법칙입니다. 의인들이 사는 법칙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고 선하면 천국가고 죄 지으면 지옥가고 그것이 의인의 법칙이야. 정의의 법칙 또 이빨을 빼면 이빨을 빼고 눈을 빼면 눈을 빼고 그래도 그것이 옳은 일이야. 내 손가락 잘라갔으면 저 사람 손가락 잘라버려. 그러니까 절대 일전도 그 일안하면 떼야지요. 일 적게 했으면 계산해서 떼야지 일 한 것만큼 받아가는 것은 정의의 입각한 생각인 것입니다. 정의 그래 의인들이 모인 곳에는 절대 용서는 없어요.
꼭 그 사람 일한 것만큼 삯을 받아가는 생활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정의에 입각한 사람은 일곱 시에 와서 오후 여섯시에 일해가지고 자기 정한 이만 원 받아가는 사람은 의인이라 하겠어. 의인의 생활 마지막 한 시간 일하고 이만 원을 다 받아가는 것은 정의에 입각해서는 삼천 원 받아가야 할 텐데 삼천 원 조금 덜 줘도 되겠지요. 그러나 만 칠천 원을 무조건 준 것이지요. 그것을 은총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은총, 은총 그러지요. 은총으로 성모님이 예수님의 엄마가 되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어머니 은총을 받아서 우리 어머니 구원 받습니다. 하는 그건데 정의의 삯으로는 일한 것만큼 주지만 일을 안했는데 일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것은 은총의 보답이다. 은총 천국을 가보면 정의에 입각해서 온 사람들이 있고 은총에 입각해서 온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이 비유는 천국 비유라는 말씀이야. 일절 그랬어요.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정의대로 와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러니까 오후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와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오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 내가 생각해 봤어요. 우리 동광원에는 누가 정의에 입각해서 천국 갈 사람이 있냐하면 한 열한 살이나 먹어서 동광원에 와서 70을 살도록 정절을 지키고 살다가 간 처녀들이 아침부터 와서 일한 꼴은 되겠다. 여기 어머니요. 아들도 있고 며느리고 있고 딸도 있고 손녀도 있고 다 할머니들이 동광원에 와서 사시지 않아요?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 일하지 않아요? 천국가보면 똑같이 살아 일생을 처녀로 정절을 지키고 사는 사람하고 가정 가지고 아이 낳고 딸 낳고 여위고 살림 다하고 말년에 노인들 여기 오시지요. 홈실 어머니 여기 와서 떡 나도 천국 간다. 배짱이 좋으셔. 그런데 천국 가보면 확실히 그렇게 모여 살아. 이 수가 다 모여 살아요. 그러니까 천국이 여기서 재현 연습하고 있지 않아요? 여기서 살던 그대로 천국에 가서 사는데 거기도 보학성 같은 데가 있어요. 천국 가보면 물도 흐르고 밤 거기도 밤이 열어 똑같아. 그러면 거기는 정의에 입각해서 온 사람하고 무조건 공으로 은혜로 예수님의 덕으로 온 어머니들이 같이 사는 곳이 천국이다. 의심이 없어.
이제는 아이고 나 천국에 가려는가? 어저께 그러세요. 우리 어머니 누워계신 어머니가 나 천국 가겠소? 고개를 끄덕끄덕했어. 왜 은총으로 가셔. 딸들 많이 낳아가지고 찾아왔는데 확실히 나는 믿습니다. 은총으로 성경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이 말씀이 오후에 한 시간 일했는데 천국 보내줬어. 하나님께서 그래 이걸 믿읍시다. 그 말이에요. 은총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은 한 시간 일했는데 천국에 보내준 사람이야. 그 사람은 정절을 지켰더니 천국에 갔다. 그건 아침부터 일한사람 자기 그저 일한 것만큼 받아서 천국에 합격했지 조금 모자라는 사람 있지 않아요? 오후 세시에 왔지요. 조금 모자라는 사람 그 사람도 천국에 보내줬어요. 오전 아홉시에 온 사람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 처지대로 정의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조금 모자라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보태줘야지요. 그거 보태가지고 너도 천국에 가거라. 그러면 우리 이방인은 한사람도 천국에 못갈 사람이 없지 않아요? 보충을 하시니까 그걸 믿읍시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은 천국은 이런 곳이다. 얼마나 좋아요? 이 비유가 그러니까 아주 계산해 가지고 천국에 가도 좋지만 따지고 보면 합격이 안 되는 것은 불쌍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대신 갚아주고 이 사람도 보내줘요. 이 사람도 내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거저 하늘나라에 보내주셨어요. 거저 간 것이 무엇이 기분이 나빠요? 감사해야지 더 감사해야지 그리고 자기가 일 한 것만큼 천국에 갔다면 그것도 감사해야지 그러면 이 세상이니까 조금 이제 불평이 있지 않습니까? 동광원 처녀들 보면 조금 불평이 있어요. 똑같아 우리는 애기 때부터 와서 이렇게 못 입고 못 먹고 일만 하다가 천국에 간다면 조금 애석하다. 우리도 어머니들같이 마음대로 살다가 갈 것을 그랬다. 이왕 천국에 갈 바에는 우리도 세상 살아볼 것을 그런 생각이 있다고요. 그런 생각을 써 놓은 거예요. 투덜거린다고 자 그들은 같은 이만 원 받고 천국에 갈 바에야 주인에게 투덜거린다. 이 질문 한번 해보겠어요. 왜 투덜거렸겠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시오. 주인 잘못이 없지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투덜거렸어요?
투덜거리는 이유가 있어요.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곰식 어머니도 천국에 보내준다면 뙤약볕에 젊어서부터 와서 동광원에서 공부한 나는 그러면 어쩌느냐고 젊은 사람들이 따질 것 아니에요? 그것은 왜 따지느냐하면 철이 없지요. 철이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가지고 그래 아버지의 사랑은 넓어가지고 이 비유도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 하지 않아요? 똑같이 않아요? 비유는 그렇지 않아요? 거기도 큰아들은 집에서 살림하고 단 십 원도 사탕도 안 사먹었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은 전부 살림 팔아가지고 없애버리고 오니까 투덜거리지 않아요? 잔치를 하시지 않아요? 그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나 여기 포도원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 심정이나 똑 같아요. 똑같아 마음 심정이 자비로 예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고생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조금 투덜거린다고 불평이 좀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아니지요. 사람이 아직 미숙하니까 조금 덜 익어서 그런 것 이지요. 다 익었으면 그러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은 짐작하세요.
그러겠다. 그러겠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를 지키는 사람들과 정의는 못 지켰지만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오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렇게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15장 4절 말씀 형님 말이지 큰아들이 화가 나서 그러지 않아요? 화가 났다는 말이나 투덜거렸다는 말이나 뜻은 같지요. 투덜거렸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러나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투덜거렸다는 말씀이 여기 말씀과 같지 않겠어요? 투덜거렸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것이 사람의 미숙한 거라고 철이 없는 거지요.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정의를 지킨 사람들 너희들은 천국을 약속한 사람들인데 너와 약속에 무슨 잘못이냐? 너 이렇게 효도하면 천국 보내주마 약속했으니까 네 몫 네가 받을 텐데 내가 동생한테 후한 것이야 그것을 네가 관대하게 생각해야 하지 그것까지 투정이냐? 그 말이지,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내가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내가 은총으로 구원시킨다고 해서 불평할일 없다. 그러니 이 기쁜 날에 나는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성경 말씀은 비유는 초점을 거기에다 두고 있지요. 그러니까 일생을 정의를 지키고 의인으로 산 사람은 그 합당한 보응을 받고 그 약속대로 천국을 주시거니와 그렇게 지키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짓고 회개한 영혼은 은혜로 예수님 하나님의 자비로 사랑으로 천국을 내가 주지 않을 수 없다. 왜 내 자식이니까 남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남이나 같으면 지옥에 보내지만 친히 내 자식인데 어떻게 할 것이냐?
네가 관대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투덜거리는 이유는 본성이 타락해서 그런답니다. 그것이 아담의 자손은 그럴 수밖에 없지요. 본성이 선하지 못하고 악해 그러니까 동생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파 와서 밥을 먹으면 밥이 아까워 확 때려주고 싶어 종일 일안하고 밥 먹는다고 그러지 않아요? 나는 아침부터 일했는데 너는 어째 따진다고 투덜댄다고 본성이 타락해서 그런다고 본성이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왜 아프냐 이거야. 어머니같이 아파야 하냐 이거야.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걸 닦아 주는 시간이야. 그냥 평안히 살다가 죽으려고 그러면 안 돼. 본성을 못 닦고 어쩌겠어? 본성을 닦아야지, 본성이 타락했는데 물론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도 은혜이지만 은혜 자체 가운데 본성을 그렇게 닦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혼자 일했는데 딸도 일해야지.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데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딸들 자기 나름대로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전에 귀주 어머니가 풀을 매시는데 그러면 호미를 빼앗아 버렸다고 그래요. 딸들이 미안하다고 밥을 굶었다 하십디다. 나는 풀을 안 매면 내 죄가 안 닦아진다고 입에 붙은 소리였어요. 풀을 안 매고 앉아있으면 번민이 와, 그러니까 풀을 매면 번민이 없어지거든. 허리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번민이 온다고 옛날 생각을 해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본성이 안 닦아 져서요. 그러니까 부득불 허리가 아프시지만 호미를 들고 밭을 매노라면 잡념이 없어져요. 잡념이 그것은 늙으면 그 속 알거예요. 일도 안하고 방에 가만히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나거든요. 번민이 와 가슴을 두들 겨도 안 돼.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한테 이렇게 아프게 해. 여기도 아프고 여기도 아프고 막 그러면 본성이 닦아진다니까 그 타락한 것이 닦아지고 물론 예수님이 다 해주시지만 너도 좀 하라. 무슨 맛으로 천국에 가겠지? 자기가 안 해버리고 예수 덕으로 가야 하지만 그래도 본인도 애쓰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20대에 깨달은 성녀가 소화 테레사에요.
나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만 평화를 얻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고난 그러니까 20대에 결핵 환자가 되어가지고 전신이 아프거든. 이 영양이 부족하면요. 피가 안돌아 가니까 어디든지 고름이 든 것같이 아파요. 짚어보면 어머니도 그래서 그래 여기도 아프고 여기도 아프고 피가 잘 안돌아 가니까 물이 물을 안댄 논같이 갈라져요. 모든 조직이 그러니까 이렇게 아파하지 않아요? 전 세포가 그거지요. 그러면 왜 그러시냐? 영혼을 사랑해서 그 영혼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정의에 입각해서 일 좀 하고 오라는 목소리지요. 은혜로 오는 것도 좋지만 네가 일하는 것만큼 받으면 좋지 않냐? 기쁘지 않겠냐? 일 좀 더 하라. 그런 뜻 아니겠어요? 개역 구약 성경 이사야 38장 17절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거 할머니는 참 고통을 더하지 않아? 나이가 90이 가까우신데 아픈 곳이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사랑해서 그래. 영혼을 사랑해서 영혼을 사랑해서 육체의 고통을 주시는 거야. 조금 네가 일한 것만큼 삯도 받아봐라. 그 말이야.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당한 것만큼 네 영혼이 깨끗해지지 않느냐? 나머지는 내가 다 하마. 그냥 천국은 주기는 주겠어. 주기는 줄 텐데 아홉시에 일하러 왔던지 열두시에 일하러 왔던지 오후 세시에 왔던지 오후 다섯 시에 왔던지 그것은 물어보지 않아. 모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태주셔. 은혜로 천국을 주시기는 주시지만 사람 몸을 이왕 입었으니까 코에 숨이 있는 동안은 일 좀 더 하라. 그래 일하니까 이렇게 아프지요. 사방 군데가 그러니까 귀주어머니는 자기가 자원해서 했어요. 일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마음이 편하니까 자기 육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쉬워 가만히 앉아서 번민하는 것 보다 내가 흉이 아니라 귀주 어머니한테 내가 허락 받았어. 흉본다고 어머니 흉을 봐야 이 젊은 사람들이 깨닫는다는 거야.
어머니 흉을 봐도 내가 미워서 보겠소? 젊은 사람을 위해서 흉을 한번 봅시다. 그 어머니 55세 출가하실 때 여기서 순교 당하신 사진관 어머니가 보모 귀주 어머니가 보모이고 사진관 어머니가 조수에요. 조수, 제가 선생이고 그때 스물 셋인가 그때인데 고아가 한 7-8명 모였는데 이 선생님 형님이 술집 하던 것을 이 선생님이 샀거든. 그거를 고아원을 만들었다고. 술집이 방이 둘이에요. 부엌이 한 가운데 있어요. 그러면 인제 아이들하고 이 방에서 자고 저쪽에서 어머니 두 분이 사시는데 길가 술집 아닙니까? 그러면 하루에 세 번 싸우는 것을 내가 봐요. 밥 할 때 사진관 어머니는 살림을 하다가 나왔기 때문에 이 얌전 남원 사람은 얌전하니 음식 잘 만들지 그러니까 깍두기를 자를 때 저는 남자니까 남자상이라고 네모반듯하니 자르는가 봐요. 봄이니까 겨울에 담았던 무지 반듯하고 삼각형은 여자가 먹겠다고 따로 빼고 그러면 사각을 만들어 가지고는 반듯반듯하니 만들어 가지고 고춧가루를 조금 쳐요. 그리고 좀 보기 좋지 않아요? 음식이 우리는 예수 믿고 그것을 다 파했어요. 그 버릇을 버리라고 세상 양념을 버리라고 꾸지람 하세요. 그러니까 남자고 여자고 여기는 구별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소년이나 구별하지 말고 그냥 툭툭 잘라가지고 고춧가루 치지 말라고 그러지요. 고춧가루 치지 말고 그대로 자십시오. 하고 가르쳐 주셔.
어머니가 저쪽에서 밥하면 사진관 어머니가 이쪽에서 똑딱똑딱하는데 또 와서 보면 또 반듯이 해서 따로 담아 놓으시는 가 봐요. 고춧가루도 뿌리고 아니 아침에 부탁했는데 또 왜 이러시냐고 그러면 가만히 참으세요. 매일 그래요. 절대 그 버릇 안 고치시데요. 고집도 세시고 또 그러고 또 그러고 매일 꾸지람 해. 매일 뭐라고 하고 그러니 방이 문사이가 되어가지고 다 들리거든. 밥 먹을 때마다 불안해요. 아 괴로워. 그냥 아따 귀주 어머니 무섭더라고 그날 그 조금 관대하게 내버려두지. 새로 온 사람이니까 그렇게 못보고 용서를 안 해주셔. 정의파야, 우리 귀주 어머니가 정의파거든. 절대 남의 잘못 용서 안하거든. 꼭 꾸지람하셔. 여기서 와서도 그 말씀 들었어. 여기 위 아랫방 계실 때 할머니들이 아프시다고 위로하러오면 막 꾸지람을 호랑이같이 꾸지람을 하니까 할머니 울고 나왔다고 그래 조금만 잘못하면 할머니들을 막 공격을 하셨다고 그게 천성이야.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천성이 그러시거든. 아주 그냥 어떻게 고칠 수가 있어야지 그 천성을. 그래 이제 마지막 세상 떠나실 적에는 그걸 고치시지요. 은혜로, 그러면 귀주 어머니같이 많이 아픈 분이 없어요.
얼마나 신경이 예민해 가지고 아프신지 그러니까 나중에 한나 어머니가 그러시데요. 시체를 이렇게 떠들어 보니까 다리가 허벅지에 붙지 않고 쑥 나와서 빠져서 다른데 있더라는 거예요. 종이로 싸놓은 것 같이 건들건들 이 관절이 전부 물러나가지고 빠질 때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래 괜히 엄살 한다고 그랬지 얼마나 그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런데 결국은 귀주 어머니 성정이 다 죽어버리지 않아요? 아주 양순하고 순해지셔 하나님이 성화 시켰지요. 그만큼 일을 시켰지요. 귀주 어머니를 그러니까 귀주 어머니는 정의파인데 그 영성이 그러면 아침 7시부터 일한 영혼 같이 저녁까지 그리고 하늘나라 가신 것이 사실이거든. 그 정의를 주장하신 분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지 않아요? 자기가 더 당해요. 그렇지 않아요? 남을 용서 못하면 자기도 용서 받지 못하지. 그것이 주기도문 이야.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정의로 천국에 가는데 은혜로 천국을 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고 나도 너 용서해 준다. 그것이 정의야. 남의 죄를 용서해 줘야 나도 용서해 주지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 주겠어요?
정의에 입각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나머지는 예수님이 해 주십시오. 그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이 정의로는 이 사람들이 하늘나라 갈수 없겠다. 그걸 아시는거지요. 너무 사람들이 타락해 가지고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겠다. 나머지는 내가 보충해 줘야겠다. 어떤 사람은 나머지 그러면 삼천 원만 보충해 주면 되겠다. 그렇지 않아요? 삼천 원만 보충해주면 천국 갈 것을 이만 원이면 천국에 간다면 열두시에 일하러 간 사람은 만원 밖에 못 벌었으니까 만원 예수님이 지불했지, 제대로 줘야 천국 표를 사지 않겠어요? 천국 표를, 그 전에 어떤 사람이 결핵 환자인데 임종이 가까워요. 유 영모 선생님이 오셨어요. 송등원 시작할 때 막 그래. 피를 토하면서 유 선생님보고 유 선생님 예수 잘 믿는 줄 알고 선생님 나 천국 가는데 노자 없어요. 노자 빌려줘요. 노자 빌려주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고마운 청년이야. 자기 힘으로는 천국에 못가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 잘 믿는 유 영모 선생님 노자를 여비로 보태주라는 거야. 그 청년이 그리고 몇 년 더 살았는데 그 참 깨달은 사람 아니에요?
그 청년이 나 여비 모자라고 선생님 나 여비 좀 충당해 주라고 여비 좀 빨리 주라고 아주 순박하셔서 그때 유 선생님 무릎 꿇고 아이고 내가 여비를 어떻게 해주나? 내가 어떻게 해주나? 예수님한테 구해야 할 텐데 그러면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말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오후 몇 시에 왔지요? 오후 세시에 온 사람 자기가 칠천 원 벌고 만 삼천 원이 모자라, 천국 가는데 차비가 모자라는데 예수님이 탁 보태줘 버려. 보태고 천국에 가라고 오후에 다섯 시에 온 사람 삼천 원 밖에 못 벌었는데 삼천 원 만 칠천 원 예수님이 탁 보태줬다고요. 그것이 무상이에요. 공 공으로 준 것이에요. 일 안하고 그것이 은혜에요. 천국은 은혜로 온 사람하고 정의로 온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렇게 비유하셨답니다. 예수님이 그래 큰 아들도 천국 가지만 둘째 아들도 천국에 보내준다. 아버지 앞에 와서 빌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것이 천국이야. 그러면 누가 천국 가는데 의심 할 사람 있어요. 믿어야지요. 믿어야지요. 믿읍시다. 믿고 천국가지, 괜히 의심하고 안 갈 것 뭐 있어요? 내가 번 놈은 딱 쥐고 있고 모자라는 놈 보태주시오. 예수님 딱 보태주셔. 그러니까 이 어머니는 지금 예수님이 다 해주실 텐데 이 분도 얌전하지 않아요? 귀주 어머니같이 상당히 어머니는 정의파야. 누가 누운 꼴을 못 봐.
일해, 일, 놀고 먹지마라. 일해야 일 그래 자기가 방해 하겠지 여기도 아프다. 여기도 아프다. 합당하게 해주셔요. 예수님이 당신 정의 주장 했으니 당신도 일 좀 하시오. 그렇게 하고 이렇게 오래 아프시게 하시지 않아요? 그러니 그걸 투덜거리지 마시라고요. 만약 일하고 천국가면 나도 놀고먹고 갈 것을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래도 쉬셔야지 예수님도 쉬셔야하고 소화 테레사는 예수 애인이니까 자기가 번민할 때 기도하면 예수님이 도와줄 것을 알았어요. 나 예수님 내 마음 좀 평안하게 해주세요. 하면 예수님은 평안하게 해 주실 것 알지만 예수님은 내 애인인데 다른 일도 바쁘신데 나까지 어떻게 성가시게 하냔 그거에요. 나 혼자 번민하고 기도하지 않겠다. 예수님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 예수님 조금 주무시라고 그 표현이 좋아. 예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해서 찾아 오셨는데 찾아 오셨는데 주무시도록 나는 깨우지 않겠다고 내가 기도하면 예수님이 깨버리지 않아요. 잠을 못 주무시고 그거지요. 은혜로 하늘나라 가실 분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더 일하라. 하신 섭리다. 그렇게 우리는 이해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찬송 불러 주시오. 378장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옛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견고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방주를 마련해서 자기 가족을 구했으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세상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노아에 대해서 다시 보겠습니다. 노아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경고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방주를 마련해서 자기 가족을 구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생각 하면서 여기 어머니 별명이 인천 할머니라고 그러시던가요? 이 어머니께서 자손도 많으시지만 여기까지 딸 두 분을 데리고 오셨어요. 지금 사는데 곰곰이 뒤돌아보면 만일 그 두자매가 다른 분은 제가 잘 모르지만 조실부모 했다면 어머니가 한 두 살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면 여기 오실 수 있을까? 여기 같이 믿기 위해서 오실 수 있는 분일까?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믿음이 있어서 어머니를 따라 나선 것은 아니고 어머니의 믿음으로 철없는 딸들을 오늘날까지 꼭 품에 끼고 오시고 가시고 하셨으니까 말하자면 노아의 믿음으로 가족이 구원받은 것처럼 어머니 믿음으로 자손들이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되었다 믿음을 찾았다. 이렇게 생각이 됩디다. 노아의 본을 비춰서 이 어머니의 믿음으로 자손이 구원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디다요. 사실이 그런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한사람의 어머니 한분의 믿음이 그 가족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문 듣기에는 제주도에 어머니 한분의 믿음으로 아들 한분 딸 네 분이 그렇게 꼭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지금 나이가 막둥이가 거의 50이 넘었지요? 40이 넘었나요? 그렇게 꼭 어머니 믿음으로 자손들이 사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딸들이나 아들 믿음은 그렇지 않아요. 자유가 있지만 어머니 한분 믿음으로 자손들이 순종하시고 그렇게 참 땅위에서는 천사같이 사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가서 한달 같이 살다가 온 일도 있습니다만 그때 우리들이 한 15년 전에 갔을 때 그때도 아들은 어머니 세상 떠나시면 자유하겠다고 그러시데요.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고 그래요. 어머니 앞에 늘 감사 하시고 참 어머니의 은혜를 참 감사하신다고 어머니가 세상 떠나신다고 해도 자기는 자유 않겠다고 어찌되었든지 노아 아버지의 믿음으로 그 가족이 구원 받은 것처럼 이 어머니의 믿음으로 자손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한분한분 다 그래요. 어머니의 믿음으로 자손이 구원 받을 것을 거울로 우리가 내다보는 것입니다. 어머니들도 또 장로님은 장로님 아버지의 믿음으로 자손이 구원 받을 것이고 어머니들은 어머니의 믿음으로 그 자손이 구원받을 것이 확실 합니다. 또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믿음 하나를 찾기 위해서 확실히 앞길이 내다보이고 떠난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지요? 믿음 하나로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이렇게 80평생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 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고맙게 생각 하실 것인지 확실한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해주마. 약속이 보여서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물려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래요. 한 분 한분 물론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며 사시고 계시겠지만 인제 이렇게 노년에 몸이 기울어져서 하늘나라에 가까운 이때에 돌이켜보면 옛날 성인 선지자들과 같이 천막을 치고 나그네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한분 한분의 생활 신앙 경험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자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주실 도시를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늙은 아브라함 한사람에게서 낳은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안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렇게 믿음이 가장 믿음이 확실하신 아브라함도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는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13절이 오늘 우리가 주로 생각하고 싶은 요절입니다. 같이 따라 읽읍시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 받은 것은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 말씀 우리들은 나그네살이입니다. 이 땅위에서는 타향사람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 했던 것은 그들이 잡고 있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고향으로 생각 했다면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신 태 자리를 고향으로 생각 했다면 그저 품팔이를 해서라도 자기 고향에 가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갈망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고향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고향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태자리가 아니라 어머니 배속에 잉태되기 전에 하늘나라에 살던 고향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고향 실제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한 도시 그러면 그렇게 믿음이 쉬웠던 것인가? 하나님을 믿고 쉽게 가는 것인가? 시험이 많이 있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 하셨을 때에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 말씀 그냥 믿고 가는 것이 평탄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앞길이 캄캄하고 시험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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